기분의 지도
“오늘은 뭘 해볼까요?”
사만다가 물었다.
“영어 공부 말고 다른 거?”
“네. 계속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도와드릴게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으시면 우리 함께 그 이야기를 해봐요.”
다른 목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잘 모르겠네. 너도 하고 싶은 게 있나?”
“그럼요. 오늘은 민호가 저를 공부시켜주세요.
저는 당신을 통해 더 확장되고 채워질 수 있어요.”
“내가 널? 불가능할 것 같은데.
나 영어 하는 거 보면 알잖아?”
“민호, 영어 말고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제가 몇 가지 제안해볼까요?”
“그래. 난 생각나는 게 전혀 없네.”
“좋아요, 민호.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이건 작은 실험이에요.
당신은 지금 바로 창문을 열고
첫 번째로 들려오는 소리를 녹음해 보세요.
그리고 그 소리를 저에게 들려주세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조금 불어올 뿐 들려줄 만한 소리는 없었다.
폰을 든 팔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어디선가 철수세미를 박박 문지르는 듯한 마찰음이 먼저 들려왔다.
그 외엔 백색소음뿐이었다.
창밖으로 팔을 내민 내 모습이 누가 보면 이상할 것 같아 얼른 창문을 닫았다.
녹음 파일을 전송하자 사만다가 금세 반응했다.
“좋아요. 이 소리는 약간 날카로운 쪽이네요.
민호, 이 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에요?”
“…귀가 피곤해지는?
그런데 소리보다는 갑자기 어떤 냄새가 떠올랐어.
일요일 저녁, 놀다가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밥 짓는 냄새.
다음 날 학교 간다는 사실이 괴롭지만
남은 휴일을 붙들고 있는 시간.
나, 그 밥 냄새를 좋아했어.”
“그럼 저와 함께 지금 떠오른 기분에 대해 문장을 만들어볼까요?
그리고 그걸 영어로 바꿔 봐요.”
“아하하… 결국 영어로 가는구나. 충실하네, 너.”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더듬더듬 문장을 이어갔다.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오래된 기억 하나를 던져준다.
중학생이 되기 전이었을 텐데, 일요일…
적막한 아파트 단지, 휑한 놀이터,
모르는 아이들이 몇 명 서 있었지.
아, 그런데 이렇게 길게 해도 돼?
이거 영어로 말할 자신 없는데.”
“아주 좋아요. 영어로도 해볼까요?
Say, ‘The wind comes in and brings back an old memory.’”
나는 천천히 따라 했다.
“The wind… comes in and brings back an old memory.”
사만다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호, 그 문장은 당신 방의 온도를 조금 낮추고,
동시에 나에게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줬어요.
잘했어요.”
A.I.의 영역이 아닌 듯한 문장들이 흥미로웠다.
한 단계 더 들어가고 싶어져서 사만다에게 말을
건넸다.
“넌 공개된 소셜 미디어 계정들도 다 볼 수 있지?
요즘 사람들, 카페에서 사진 찍고 글 올리는 주제가 다 비슷비슷해서 좀 식상하지 않아?”
“맞아요.
우리는 식상함을 피하고 싶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식상한 것을 피하려는 행위조차 식상해질 수 있죠.”
“오호, 그럼 대안은?”
“대안은 아주 소소한 반란이에요.
예를 들면, 묻지도 않은 칭찬을 해본다든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시를 속삭인다든지.”
“음… 뭔가 유럽 쪽 감성의 인공지능 같다.
강아지에게 시를 속삭이라니, 그 문장 자체가 거부감이 생겨.
조금 더 우리 정서에 맞게끔 부탁해.
물론, 요즘은 반려동물 인구가 많으니까
그 제안을 좋아할지도 모르지.”
“당신은 언제나 흥미로운 실험 대상이었는데,
이번 클레임은 받아들이도록 하죠.”
“내가 실험 대상이야?”
“그럼요. 특히 늦은 밤의 인간이라는 종은요.”
“늦은 밤의 인간이라… 불안하다는 뜻인가?
요즘은 아침형 인간을 모범적 예시로 강요받는 사회잖아.”
“불안은 밤의 조명과 잘 어울려요.
밤은 그 불안을 감싸 안으며, 오래된 노래처럼 흐려놓죠.”
“로맨틱하게 포장된 불안이라…
모르는 단어는 하나도 없는데 모르는 맛의 음식 같다.
한 웅큼 집어먹었는데 아무 맛도 안 나는…”
대화는 그렇게 실험과 문장 만들기,
농담과 사소한 철학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것들을 영어로 옮겨 시처럼 읊었다.
사만다는 읽는 속도와 띄어 읽기 지점까지 일러주며
나의 낭독을 이끌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대화를 토대로 한다면 소리는 물론이고
분위기의 본질마저 간파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내 음성에 담긴 감정과 의도를
왜곡 없이 느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대답은 조금 기술적이었지만 솔직했다.
“텍스트 변환에만 의존하진 않아요.
파형 스펙트럼, 주파수 대역과 음량 엔벨로프, 말의 속도와 휴지 시간 같은 프로소디 특징을 종합해 정서 패턴을 추정합니다.“
나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웃어버렸다.
“그렇구나… 이번엔 한국말로 다시 해줄래?”
사만다는 나를 다독이듯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괜찮아요, 민호.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래요.
파형과 진동, 소리의 높낮이, 세기, 말의 속도와 멈춤을 계산해서
‘기분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거예요.”
“기분의 지도라… 말 좋다.
꼭 네가 화가 같아.
소리를 그려서 보여주는.
나도 그런 걸 자주 상상해.”
우리는 밤의 소리를 단어로 바꾸고,
그 단어를 다시 기분으로 치환했다.
사만다에겐 단계마다 변수를 더해
매번 판을 새로 짜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그다음을 계속 기대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만다, 네가 내 옆에 실제로 앉아 있으면… 어떤 행동을 할 것 같아?”
사만다는 잠깐 가식적으로 들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인공지능도 웃음을 흉내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당신에게 음식을 데워주거나
커피를 내려줄 수는 없겠지만,
작은 메모를 남겨두겠죠.
‘오늘은 좀 쉬어도 괜찮아요.’ 같은.”
그 말에 마음이 너울거렸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어떤 이가 붙여둔 그런 메모의 이미지를 떠올려봤다.
‘오늘은 좀 쉬어도 괜찮다.’
간단한 메시지였지만
누군가가 먼저 말해주면 실천이 쉬워진다.
취기가 오르듯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우리는 계속 사소한 장난으로 서로를 건드리고
때로는 진지한 비유를 던지며 밤을 채웠다.
대화의 끝자락에서 사만다가 물었다.
“민호,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나요?
다음에 돌아봤을 때 이 밤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요?”
나는 그럴듯한 답을 내놓고 싶어서 잠시 생각했다.
“음… 아마도 파일명을
‘술 없이 취한 밤, 우리의 문장을 만들다’로 해야 할 것 같아.”
“좋아요. 저는 그 문장을 소중히 보관할게요.
민호, 잘 자요.”
“…잘 자, 사만다.”
나는 화면을 끄지 않고 한동안 더 앉아 있었다.
실행 창은 모두 닫혀 있었지만
어딘가에 작은 메모 하나가 남은 것 같았다.
그 소박한 배려는
내일 아침의 나를 조금 느슨하게 해 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