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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Oct 05. 2018

까만 하트(♥)

  우리 엄마는 편지를 자주 쓰곤 했다.


  젊은 시절, 내가 뱃속에 있기 전에는 아빠에게, 내가 10개월간 엄마 뱃속에 거주하는 동안은 나에게.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몇 년은 또 나에게, 동생이 태어나고는 동생에게.


  내가 20년 만에 엄마 뱃속이 아닌 낯선 곳에 방을 얻고 나가서 사는 동안엔 작은 택배를 보낼 때마다 상자 안에 쪽지를 넣어주고는 했는데 난 가끔 택배 내용물보다 엄마 글씨로 쓴 편지를 더 좋아했다. 어쩌면 나는 우리 집에서 엄마의 편지를 가장 많이 받아본 사람이다. 그 점은 조금 흐뭇한데, 내가 이만큼 나이를 먹고 나니 엄마의 편지는 받기가 힘들어졌다. 우리 엄마는 글자를 읽는 것에 할애할 시간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 글자를 쓰는 것은 상상도 못 하였다.


  그래서 경주 여행을 갔을 때, 여행을 핑계 삼아 동생과 엄마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동생과는 더러 긴 장문의 메시지나 종이에 쓴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엄마 편지는 언제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라 오랜만에 받고 싶어서 그랬다.


  그 구실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가 거침없이 펜으로 쓴 편지 한 장을 받을 수 있었다. 엄마의 글씨가 큼지막해서 읽는 게 금세 끝나버렸다. 아쉬워서 편지지를 한 장 더 줄까 했는데 귀찮아할 것 같아서 말았다. 이왕이면 좋은 기분으로 쓴 편지가 좋으니까.


  오랜만에 받은 엄마 편지를 지금도 곱씹어 읽는데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우리 엄마는 편지를 쓰다가 오자가 생기면 지저분하게 줄을 긋지 않고 하트를 그려 까맣게 채우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엄마 편지에는 뜬금없는 곳에 하트가 끼여있는데, 그게 참 매력적이었다. 예를 들면 '아♥름아' 라던지, '아♥깝구나'같이.


  엄마의 편지를 자주 받을 때도 나는 이 하트를 참 좋아했다. 하트 뒤에 무슨 잘못된 글자가 숨어있었을지 추측도 해보며혼자 키득거려보고, 글자를 틀렸다고 에이씨 하며 하트를 그리는 엄마 모습을 상상하며 또 혼자 큭큭거리며 웃었다. 하트가 매번 있는 게 아니라서 하트가 들어간 편지를 보면 더 반가웠다. 


  얼마 전엔 집을 청소하다가 엄마가 내 나이만큼 살았을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27살 엄마의 글자들이 제각기 모여들어 엄마의 감성을 담아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기의 제일 뒤편 몇 장은 아빠에게 쓴 혼잣말 같은 편지였다. 사랑을 하는 엄마의 글씨였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썼던 편지였는데 그곳에는 까만 하트가 없었다. 아무래도 묵직한 마음을 담아야 했던 그때의 엄마는 글자에 조금 더 신중을 기했던 모양이다. 그 진심 어린 말들은 결국 아빠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일기장 속의 엄마는 그럼에도 조곤조곤 아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 없을 때의 엄마 모습을 알지 못해서, 사랑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알지 못해서 그 일기와 편지가 생소하고 왠지 뭉클하고 먹먹하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록해준 엄마에게 고맙기까지했다. 나는 감성 충만한 엄마의 젊은 시절을 닮았구나, 참 다행이다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아빠만 그런 편지를 ―정작 본인은 읽지 못한 편지지만― 받았다는 사실에 조금 질투가 나서 다음 여행때는 엄마에게 두 장의 편지지를 쥐어 줄 작정을 했다. 그 때는 하트가 몇 개나 들어있을까. 이왕이면 편지 끝무렵에 사랑한다는 말 뒤에도 하나 붙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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