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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Sep 28. 2018

'너 목소리 좋다'

  나는 내 목소리를 싫어했다.


  그 감정의 계기가 된 일은 참 별거없었다. 어린 시절 방학을 맞아 놀러 가려고 이모 집에 전화한 적이 있었다. 전화 너머 들리는 이모 목소리에 반갑게 여보세요! 했더니 누가 들어도 낯선 사람을 대하는 목소리로 '응, 그래~' 하길래 당황해서 '이모'하고 불렀더니 그제야 '아름이구나'하며 나를 반겼다. 내가 아들과 같은 반인 남자애인줄 알았다고 했다.


  가히 충격적이었다. 살다 보면 별거 아닌 일에 큰 충격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 일도 그런 부류의 사소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나이가 되고서야 이모에게 '어릴 때 이모가 나한테 그 말을 했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연히 이모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사소한 일이니까.


  단지 어린 나에게 큰 일이었다. 나는 내 목소리가 정말 곱고 예쁜 줄 알았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뒤론 난 내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들어보니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낮았고 왠지 굵고 거칠게 느껴졌다. 이놈의 목소리는 그 생각을 먹고 자란 건지 목소리는 나이를 한 살씩 더해갈 때마다 더 굵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통화 중에 녹음 버튼이 잘못 눌려서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는데 정말 부끄러울 만큼 싫은 감정을 느낀 적도 있다. 내 중성적인 목소리와 경상도 특유의 투박한 말투가 나를 더 촌스럽게 만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목소리도 쓸데없이 커서 더 싫었다.


  간혹 나도 낯설 만큼 거친 소리가 나오는 것도 싫었고, 오랫동안 말을 안 하고 있으면 금세 쉰 소리가 나오는 것도 싫었다. 평소엔 '보통'으로 싫어하다가 '아주 불만족'으로 싫어할 때가 더러 있는데, 내 녹음된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나 누군가 내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할  그랬다. 그럼 나는 '아주 불만족'상태로 혼자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라도 되는 양, 말도 않고 있었다. 혼자 뚱하게 있다 보면 늘 생각나는 애가 한 명 있었다.

 

  그 애를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때. 메신저에서 반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자기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며 채팅방에 그 애를 초대했다. 그렇게 채팅을 통해 알게 된 그 애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스스럼없이 대화했다.―내가 욕을 하고 있을 때 그 애가 채팅방에 들어와 버리는 바람에 욕을 터버렸다―


  초면에 욕까지 튼 사이에 못할 말이 없었다. 이미지 관리할 필요도 없으니 우리는 순식간에 친해졌다. 그러다가 밤중에 그 애랑 통화한 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별거 없이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어디서 통화하고 있냐, 하늘 보이냐 따위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통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그 애와 다시 채팅을 하는 도중에 그 애가 그랬다. '너 목소리 되게 좋다' 고.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나 목소리 되게 남자 같은데?' 했더니 그 애는 '아닌데? 되게 듣기 좋아.'라고 했다. 그게 그냥 빈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지만 그래도 난 마치 그 말이 고백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장이 떨렸었다. 지금도 그 일을 회상하면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하다.


  난 아직도 그 애의 그 말을 들었던 시간의 공기가 차가웠던 정도와, 하늘에 떠있던 별의 갯수와, 그 때 쳐다보았던 우리 집이 풍기고 있던 찰나의 분위기를 모두 기억한다. 살다보면 사소한 일에 큰 충격받는 일이 종종 있다. 그리고 살다보면, 사소한 일에 큰 감동을 받는 일도 종종 있다. 그 말이 나에겐 그랬다.


  이제는 내 목소리도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너무 방정맞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중저음도 아니고. 가끔 말하다 음이 나가는 경우도 있고, 술 마시면 들떠서 조금 방정맞긴 하지만, 그런 부분은 인간미가 있는 거라 치자. 요즘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할 때나, 샤워할 때 혼자서 나지막이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의 내 목소리 좋아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나의 음색을 좋아하게 된 많은 이유 중 그 애의 한마디가 있음은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자부심이 생겼다고나 할까.


  내가 그 한마디를 기억하면서 아직도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도 못할, 어쩌면 나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조차 기억 못 할 그 친구는 이제는 서로 안부도 자주 묻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이 기억을 다시 심심하면 꺼내보는 기억모음에 넣어두고, 드문드문 나에게 말 거는 내 목소리가 싫을 쯤엔 또 그 애의 말을 꺼내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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