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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Sep 27. 2018

소유(所有)의 까닭



  나는 무엇이든 내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 간단히 읊어보자면 영화, 음악, 사진, 글 등이 그랬다. 이것들을 어떻게 손에 쥐고 있는지는 간단하다. 영화는 아직 돈을 잘 버는 어른이 아니라 스토어에서 '소장용'으로 구매한다거나 별로 마음 쓰이지 않는 가벼운 영화들은 '대여'한다거나. 그렇게 내 이름으로 등록된 아이디 밑으로 포함시켜두고, 나중에 구매 목록을 훑어보면서 뿌듯해한다.


  음악은 멜론에서 스트리밍으로 내 목록을 만들어 듣고, 사진은 다시 보지 않더라도 꼭 저장해서 갤러리를 가득 채워 놓는다. 언젠간 볼 거라고 다짐하면서 저장하지만 내 갤러리에는 중복 사진들이 꽤 많다.


  글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종이책을 선호한다. 인쇄용지에 글자 모양의 잉크들이 잘 스며든 것을 보면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진다. 조건이 있다면, 정식으로 출간된 책이라야 된다. 좋은 글을 보더라도 A4용지에 인쇄된 것은 제본도 되어있지 않고, 어설퍼서 좋은 글을 보아도 태가 나질 않아 직접 인쇄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이다.


  소유한다는 건 작은 희열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다. 가령 누군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 한 권을 이야기하는데 그 책을 내가 가지고 있다면, '나 그 책 있, 재밌더라'하는 상황에서도 보람을 느끼곤 한다.



  내 경제권을 내가 쥐고부터는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떻게든 소유하려고 하지만 사람은 ―당연하게도― 그게 잘 안된다. 나는 쥐고 있다가 끊어지는 인맥이 많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맥관리'라는 걸 잘 못하는데, 그럼 저절로 내가 그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 그래서 협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이 부분이 딱히 불만족스럽진 않다.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내 슬픈 이야기를 다 들어줄 게 아닌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해서 고독한 인간을 자처했지만 더러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사람의 애정을 소유하지 못해서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는 습관으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나는 지금의 내 상태와 내 형태와 내 생각을 사랑하므로, 아무래도 좋으니 모든 부분에서의 '성장'을 제외한 모든 '나'는 이대로였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이념을 사랑하니까, 그것 또한 이대로 보존하여 후생(後生)까지 들고 가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하는 편이다. 개개인이 가진 추상적 이념의 보존에는 한계가 있고, 망각의 본능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이치인 걸 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그것을 조금이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펜으로 끄적이고, 흔적을 남기려고 글을 쓴다. 하지만 다음 생에 내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지, 글도 모르는 송충이로 태어날지도 모를 일이고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한들 내가 내 글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소용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면 또 허망하다.


  스님들이 이런 소유욕 끝에 오는 허망함이 싫어 속세를 버리고 떠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현인(賢人)은 우리에게 무소유의 삶을 살랬는데 나는 도무지 무소유가 어려워 죽겠다. 뭔가를 손에 쥐고 소유하면 이렇게나 짜릿한데 어떻게 소유하는 행위를 끊을 수 있나. 무소유로 돌아가려면 손에 쥔 것들을 다 내다 버려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상실감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영영 소유하자니 일말의 지식이나 어중간한 재능을 싸안고 저승까지 가기가 힘들다. 여기서 다시 '인간은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 찰나의 행복을 맛보고 다 잊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무소유에 동의하기도 한다. 속세적인 생각과 염세적인 생각은 항상 내 머릿속에서 서로 마주 보지 않고 공존하기만 한다.


  오늘은 속세적인 생각이 조금 더 강력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어쨌든 뭐라도 하나 더 끌어안고 가보려고 글도 써보고, 폴더 어딘가에 있을 똑같은 사진을 한 번 더 저장해 보고, 어제 들었던 노래를 또 듣는다. 갈대 같은 내 얄팍한 마음이 내일은 또 무리하게 무소유를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나는 인간이 이 생에서 얻는 유일한 것이 찰나의 행복이라면 차라리 힘껏 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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