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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un 29. 2023

관계의 종말

네 말처럼 정말 이별이 다가온 걸까

너와의 최초의 기억은 네가 전학을 왔을 때다. 통통한 얼굴, 뿔테 안경을 쓴 우리가 닮았다는 이유로 선생이 우리를 엮어주었었지. 그게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다. 같은 아파트 바로 옆 동이었던 너와 나는 매일 집에 함께 갔고, 초, 중, 고, 대학을 같이 다니며 근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나는 항상 너를 지켜봤고, 너는 나를 지켜봤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네가 기억했으며, 네가 잊어버린 과거는 내가 기억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항상 굳건할 거라 믿었다. 형제가 없는 내게 너는 언니이자 동생이었으니까. 아니 피를 나눈 가족보다 너를 신뢰했다. 만약 미래에 가정이 생기더라도 나는 네가 먼저일 자신이 있었다.


나는 시간의 힘을 믿어서 우리가 쌓은 긴 역사가 평생 빛날 줄 알았다. 모든 변화의 시기를 함께 겪고, 우리 주위를 둘러싼 온갖 소용돌이 속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값진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는 설명할 수도, 볼 수도 없어 오직 우리 둘 뿐이 느낄 수 있다 생각했다. 근데 누가 추억은 힘이 없다고 하더라. 아마도 너였나 보다.


오랜 친구와 이별하는 중이라는 너의 이야기를 보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잠시 각자의 생활에 집중하는 중인 줄 알았다. 달라진 너의 태도가 걸리긴 했지만, 우린 소극적 완벽주의자니까, 지금 닥친 과업에 열중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네가 이별을 준비 하는지 모르고.


얼떨떨했다. 나의 어떤 옳지 못했던 행동들이 너를 괴롭히고 있었을까, 나의 무례함이 어떤 피해를 주고 있었을까 자책했다. 네가 우리의 역사를 단 번에 등질 정도로 내가 그렇게 후진 인간이었는지 돌아봤다. 그리고 배신감을 느꼈다. 네가 정말 나를 귀하게 여겼다면, 회피하듯 이별하는 방법은 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회피의 지옥에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네 앞에서 얼마나 목놓아 울었는지 모두 지켜봤으면서. 한 편으로는 너를 완벽하게 안다는 나의 오만함이 상처가 되었을까 미안하기도 했다.


너는 내게 항상 예외의 존재여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생각을 하든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네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한 적 없다. 혹여 그랬더라도 너는 나의 범주 밖을 벗어난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위로의 말을 전하며 떨어져 있어도 내게 의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물론 너도 그랬겠지.


네가 더 이상 추억의 힘을 믿지 않고, 네 스스로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된 것처럼 나도 변화를 맞이했다. 나를 통제하던 늪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내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나를 비우고 비워냈다. 설사 그게 자기 파괴적인 행동일지라도, 순수한 열정을 다시 채워 넣으며, 냉소적인 인간이란 타이틀을 떼어냈다. 네가 나를 지칭하던 따뜻한 로봇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회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싶어서. 또다시 나를 갉아먹는 피의 반성문을 쓰고 싶지 않아서.


이제 나는 모든 관계의 종말이 한쪽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책하지 않을 거고, 네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을 것이며, 너를 기다리지도 않을 거다. 이 또한 너의 선택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언제나 나는 너를 믿고 지지했기에 분명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어느 시점에 우리가 만난다면 나는 똑같이 너를 맞이할 거다. 항상 그곳에 있던 것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너의 행복을 빌 거고 응원할 거다.


더운 여름에 태어난 우리, 매년 같이 생일을 보냈었는데.

진정한 30대가 된 올해는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길.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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