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적 보조성을 바란다
자격에 대하여
— 시민적 보조성을 바란다
무언가를 말할 자격
무언가 결정하거나 결정에 참여할 자격
이런 건 누가 정하는 것인가, 어떻게 정하는 건가?
무슨 일이건 어디에나
전문성과 당사자성은 중요하다.
그런데 전문성도 당사자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조금 무리해서 말하면
전문성은 그 일에 대하여 갖는 당사자성이고
당사자성은 그 일이 그 사람에 대하여 강요하는 전문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문학이 주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격에 대해 생각하였다.
문학이 상처 내고 고통 주어도
그 맥락이 있어 필요하고, 유익하고
결국 위로해 내는 데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시간 위에서 그다음의 치유란 건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앎의 영역이 아닌 헤아리기의 영역.
고통은 어떻게 정당화하나?
나 자신이 선택하여 확신하는 게 아닌 때,
스스로가 감내하고 나아가는 게 아닌 때에.
모두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당사자성은 필요와 한계가 있다.
당사자가 물리적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용이한 한편
질적으로 올바른 이해와 충분한 접근이 가능한가가 자동으로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을 겪는 이가 아니라도
그 일에 대해 잘 아는, 잘할 줄 아는 전문가 집단은 일종의 당사자로서 작동한다.
그런데
어떤 문제이건 당사자성이 있다면
보조성도 작동한다.
당사자가 결과와 방법을 결정하고 원한다 해도 그것을 이룰 수 없을 때
거기의 동의하고 동조하는 것이 보조다.
물론 보조성은 당사자성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일으킬 수 있는 무수한 해악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더라도 오늘날 보조성에 대한 이해도, 보조성의 견문과 실행도
모두 떨어진다는 우려가 든다.
당사자성과 보조성이 ‘연대’하는 건
우리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동의에 기초한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든 말든
어떤 증거로 입증하여 사실로 제시하든 말든
증거를 믿고, 논리를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침해 불가능한 내적 결단이다.
그러므로 연결에 대한 예감, 연대에 대한 확신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고
유도될 수 있지만 강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연대에 응답하지 않아도
무응답을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삶도 입체적이고
여러 줄기로 뻗어 있으며
누구도 홀로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그것을 사회성이라고 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와 주고받고, 사회로부터 규제와 의무를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사회로부터 심판받을 수 있다면, 어떤 결정이 사회에 의해 이루어져
개인에게 부여될 수 있다면
연결은 부정할 수 없고
어떤 당사자도 홀로 모든 전문성을 갖추거나,
당사자로서 온전히 오롯하게 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보조성은
당연하고,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된다.
보조자의 많고 적음, 적합하고 부적합함으로
취약한 당사자성이 공평하지 못하게
보조성의 빈익빈 부익부를 일으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없다.
다 제 팔자이고, 다 운명이고, 오직 자기 앞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우리가
보조성의 빈익빈 부익부가 당연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보조성이 최소한의 균질성을 가지고
우리 곁에 발동할 수 있도록
일종의 네트워크, ‘공동의 시선’을 형성할 수 있다.
관심사나 전문성에 의해서만 아니라
같은 ‘시민’이기 때문에 발생할 때
보조성은, 보편적이고 다정한 것이 된다.
나는 그것을 ‘시민적 보조성’이라고 불러 본다.
내 알 바 아니라거나, 다른 누구에게 더 가까운 일이라고 미룰 수 없는
모두에게 즉각적 부름을 일으키고
다름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적절한 이가 다가갈 수 있는,
당사자에게 묻고 허락을 구할지언정
당사자에게 도움이 필요함을 깨닫게 할 최적의 누군가가
그에게 노출되고 그도 그에게 노출되어
이 서로 드러남[계시(啓示), revealation]에 의해
보조성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동시 성취되게 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다.
시민의 보조성.
종교인이니까, 정치인이니까, 동향인이니까 같은 것 말고
누구나가 서로에게 손 내밀 수 있는 것.
모두가 잠재적으로 모두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것.
비록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하고도 힘이 부쳐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들의 인간성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최종 결말에 이르기까지 지켜질 수 있을 거라고.
시민적 보조성이
그전에 중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든,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하든
그 어떤 말로든 ‘가장 사실’이 될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나는 너를 어쩌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나를 부른다면
나는 너와 같이 설 것이다.
왕과 귀족이 아니라
모든 나와 너의 계약.
비로소 이름에 차는 ‘사회’ 계약을
바란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