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시간

너의 시간 속으로 14화

by 다별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살이 얼굴에 닿자, 서연은 미간을 잠시 찡그렸다가 살며시 눈을 뜬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한 기분! 실로 오랜만이다. 기차 안 준겸의 어깨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느꼈던 편안함이 밤새 지속된 것처럼.


서연은 아래층을 내려다본다. 준겸은 아직 자고 있다.


'꿈이겠지. 꿈이었을 거야.'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어렴풋한데 입술에는 아직 부드러운 달콤함이 남아있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눈을 뜨면 꿈에서 깨어버릴까봐 눈을 감고 있었던 건가, 서연은 그렇게 생각해본다.


'아무렴 어때? 그냥 꿈일 뿐인데.'


위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서연은,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는다.

그 소리에 깬 준겸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금 씻고 나온 서연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아직 물기를 머금은 뽀오얀 민낯에 엷은 아침 햇살이 닿아 반짝거린다.


'아! 참 예쁘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같은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다니......'


준겸은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잠에서 깬 게 분명한데도.


"일어났어? 어제 늦게까지 안들어온 것 같은데,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선배는요?"


"나두."


'휴우. 다행이다. 잠결이라 기억을 못하나보네.'


준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런 내색이 없는 서연의 마알갛기만 한 표정에 내심 서운하기도 하다. 모르겠다, 이 마음이 뭔지.


"준겸아, 우리 아침 먹으러 가자. 서둘러야 해. 아비뇽 가는 9시 기차 타려면."


어젯밤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숙소 인테리어가 꽤나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럽다. 로비로 내려가니 출입구 옆에 다이닝룸이 보인다. 들어가는 순간 널찍한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마음마저 뽀송뽀송해진다. 뷔페 테이블에서 각자 원하는 걸 담아서 자리에 앉자, 주인장이 다가와 커피를 따라준다. 그 따뜻한 향기가 퍼지자 서연은 미소를 짓는다.

소박하고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 준겸은 크롸상을, 서연은 뼁 오 쇼꼴라를 접시에 담아왔고 주인 아주머니가 갓 구운 바게뜨 몇 조각과 함께 직접 만든 장미잼(confit de pétales de rose)을 맛보라고 가져다주셔서 테이블이 빵과 장미향으로 그득해졌다. 먹기도 전에 흐뭇하다. 파리에서도 브레장 스트리트 골목 건너편 불랑쥬리에서 풍겨나오던 고소한 버터향과 빵 굽는 냄새에 이른 아침마다 서연은 작은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준겸은 서연의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오랫동안 서연을 지켜봐오고 살펴와서인지 금방 알 것 같다. 현재 기분이 '맑음'이라는 걸.


다음 행선지 아비뇽에 대한 기대보다는, 이 아침이 주는 설렘이 그에겐 훨씬 더 크다. 빵과 커피향을 함께 즐기며 그녀와 마주 앉아있는 지금 이 순간!


***

서연이 파리 선우집에 처음 간 날, 그녀는 벽에 걸려있는 네 장의 사진들을 다 보고나서야 책상 겸 식탁으로 썼을 듯한 작은 테이블에 눈길이 간다.


그 위엔 흰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겉면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봉해놓지도 않아서 서연은 그냥 열어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건 사진 엽서 세 장. 엽서마다 뒷면에는 프랑스의 중소도시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첫번째 사진은 Angers[앙제]였고 거기엔 REnnes, TOURs [헨느, 투르]라고,

두번째 사진은 Bordeaux[보르도]였고 거기엔 NANtes, Amiens [낭뜨, 아미엥]이라고,

세번째 사진은 Chenonceaux(쉬농소)였고 거기엔 MOnt st. michel, étRetaT (몽생미셸,에트르타)라고 씌여있다.


'이게 뭐지?'

서연은 어리둥절했고 아무런 감도 오지 않았다. 아름답고 유명한 곳이라는 것 외엔 어떤 공통점도 보이지 않았고 엽서의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각 사진의 뒷면엔 또 다른 지명들을 적어놓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준겸이 Paris Lyon Avignon Nîmes 에서 PLAN을 읽어내는 순간, 서연의 머릿속엔 반짝 불이 켜지는 듯했다. 전공 공부 때문에 마케트(maquette : 건축물 축소 모형)를 자주 만들곤 했던 선우는, 평소에 Plan A가 어떻고 B는 어떻고... 그런 말을 즐겨썼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사진들이 plan을 뜻한다면... 엽서 사진 속 도시 이름은 혹시 A,B,C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연은 무릎을 탁 쳤다.


'앙제, 보르도, 쉬농소...어? 정말 그러네?

첫글자가 A, B, C 맞네!'


***

아비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서연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선우의 플랜을 따라가다보면 A, B, C 중 하나에 다다를까? 그럼 거기서 내게 남긴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까? 선우는 왜 이런 걸 남겨둔 걸까? 내가 영영 못볼 수도 있었는데...... 그냥 연락을 할 수는 없었나? 뭔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있었겠지.'


"선배! 선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우리 다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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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통역사, 라디오 방송작가 겸 진행자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어느 날부턴가 나다움을 그려가는 글을 씁니다. 고여있던 슬픔도, 벅차오르는 기쁨도 이제는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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