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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읽기

거북이가 되어버린 토끼

by 노랑연두

나는 글을 빨리 읽는 편이다. 웬만한 소설책은 한두 시간이면 다 읽고, 양 많기로 악명 높았던 수능 국어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고 꽤 많이 읽은 덕분이다. 덕분에 속도뿐 아니라 문해력도 좋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영어도 그렇게 느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독해 문제집에서 영어 지문을 읽을 때나, 수능 영어, 토익 영어까지는 어쨌든 한국에서 다른 한국사람들과 비교하니까.


그런데 스웨덴에서 영어로 하는 수업을 듣기 시작하고 난 후로부터는 나의 영어가 얼마나 하찮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모르는 단어도 너무 많고, 단어를 알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많다. 특히 한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는 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알려주는 비소설 지문을 주로 읽었는데, 그런 글들은 비교적 깔끔하고 정돈된 데다가 쓰이는 단어도 정해져 있다. 그래서 같은 영어래도 시험 영어나 영어로 된 교과서에 쓰인 영어들은 그나마 편한데, 논문이나 소설은 형식부터 단어까지 내 수준을 넘어선다. 영어단어도 모르겠고 단어를 알아도 내용이 이해가지 않아서 한글로 읽을 때에 비해서 시간이 거의 8배는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정도로 시간이 충분하진 않았던 터라 거의 모든 논문을 번역기를 돌려서 읽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영어로 대학원 학위를 받은 게 무색하게 영어가 늘지 않았다. 매번 이번에는 번역기 안 쓰지 말아야지 마음을 먹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번 학기에 온라인 강의로 “creative writing”을 듣게 되면서 또 한 번 다짐했다. 영어 실력을 향상을 위해 영어로 읽고 영어로 쓰겠노라.


그렇게 해보니 새삼 영어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너무 답답하다. 고작 7페이지짜리 단편소설. 처음에는 모르는 단어들에 밑줄만 치며 읽었다. 불면증에 걸려 현실과 백일몽이 섞여버린 주인공의 이야기였는데, 그걸 읽는데 나도 현실과 꿈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주인공처럼 내용을 마구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만 읽는데도 몇 시간에 걸렸고 내용은 희미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하나 단어를 찾으며 읽는데도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번역기를 켜서 책을 찍었다. 갑자기 모든 내용이 선명하게 이해된다.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어려운 단어들도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he들도 너무나 명확하게 파악되니 더 힘들다. 차라리 우리말을 더 못 해서 번역마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면 영어가 더 쉬웠을까? 지름길이 너무나도 빠르니 그 간극이 더 괴롭다. 하지만 그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그냥 느린 길을 우직하게 가는 것임을 알기에 답답함을 견디며 영어를 읽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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