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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pr 15. 2018

내 마음 속 음성파일이 함께 열리다

조현민 음성파일을 듣고 



실시간 검색어를 눈여겨보지 않는 나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어 클릭해 보았다.



'조현민 음성파일' 



얼마 전 물벼락 갑질을 해서 사과를 한 후 해외로 떠났다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음성 파일이 공개되었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음성 파일은 예전처럼 암암리에 떠도는 파일로 공개된 것이 아니라 뉴스 미디어를 통해서 대놓고 공개되어 있었다. 




- 음성 파일 전문 참고: http://lifeisllll.blog.me/221253264499




사람이 그렇다. 글로 아무리 설명을 잘 해놓아도 직접 보고 들으면 그 느낌이 다르다. 이 경우도 그랬다. 기사 전문만 봤을 때는 놀랐을 뿐이었는데, 실제로 그 음성을 듣고 나니 내 과거에도 존재하는 비슷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조현민을 향해 비난을 쏟고 있고, 이 음성 파일의 공개가 전현무에게 실질적으로 어떻게 작용할지에 - 모욕죄 성립 여부 - 관심을 집중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수많은 회사 내에서 공공연하게 허용되는 '인격 모욕 악습'이 개선되는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회사에서 상대를 모욕하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 정도도 다양하다.

내가 겪은 일을 몇 가지 얘기해보면 이렇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버럭 OO'이라는 별명을 가진 상사가 있었다. 단순히 직원들이 뒤에서 험담하기 위해서 붙인 별명이 아니라 마치 '애칭'처럼 붙여진 별명이었다. 회사라는 이유로 부하 직원에게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는 일이 '필요한 일' 혹은 그냥 저 사람의 '성격'이라고 그저 단정 지어지는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애칭 같은 별명이라고는 해도 그분이 정말로 버럭 할 때에는 부서 전체에 시베리아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못지않게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질러대던 중학교 체육 선생님을 미리 겪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면역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끔 내가 당할 때나, 선배들이 당하는 모습을 볼 때면 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선배들도 알고 있었다. 그분이 꼭 나쁜 분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결국 끝에는 함께 일하는 것을 대부분 불편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입 시절의 나는 이런 캐릭터의 상사가 그냥 회사에 당연히 존재한다고만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겪었고, 드라마에서도 많이 봤으니까.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안 겪어본 사람들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시기가 되어 되돌아보니 그것이 더 이상 당연시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다른 상사가 있었다. 이 분은 평소에 늘 버럭 하는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잘 숨기는 분도 아니었다. 어느 날 그 분과 몇몇 직원분들과 함께 보고서 작성에 대한 회의에 들어갔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회의록을 놓치지 않고 쓰기 위해 그날도 습관처럼 회의를 녹음하고 있었다. 회의 후반부에 들어갈 무렵, 어떤 지시를 받았는데 그것이 도무지 납득도 이해도 가지 않는 내용이었다.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의 업무를 우리가 떠맡은 걸로 보였다. 그때는 회사 분위기가 다소 캐주얼한 편이었기 때문에 선배들과 나는 각자 그 지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 일을 정말 우리 팀이 해야 하는 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주면 될 텐데, 그분은 끝까지 그 논리를 주장하더니 우리의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었다. 평소에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선배들도 나도 황당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얼떨결에 녹음이 되고 있는 그 상황이 나는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살다가 화가 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만한 행동도 잘못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 사과도 받지 못했다. 사과를 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의 나도 회사의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던 노예였으니까. 하지만 오래된 이 일이 기억에 남았다는 건, 내 심리에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일 거다. 






회사에서 '소리 지름'을 당연히 여기던 나의 인식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미국 지사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현지에서 채용된 직원이 본사에서 출장을 온 상사를 도와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직원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으므로 한국말은 잘해도 마인드셋은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출장을 오신 분은 완전히 한국 스타일이셨다. 결국 두 사람 간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출장을 온 한국인 상사분이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언성을 높였다. 나는 또 그러려니 했었는데, 나중에 그 한국계 미국인 직원과 이야기를 하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서 회사 다니면서 저런 경우는 없다고, 직원들이 다 있는 곳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굉장히 매너 없는 행동이라 너무 불쾌했다는 것이었다. 서로 간의 감정이 상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상대를 안 좋게 말한 것이기야 하겠지만 '회사 내 공동 공간에서 언성을 높이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라는 개념을 처음 느끼게 된 계기였다. 

'아, 이게 당연한 일이 아니구나.' 






그리고 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회사 경험에서의 하이라이트를 그 후에 목격했다. 굉장히 강력한 파워를 가진 어떤 초고위층 간부가 있었는데, 이 분은 회의를 하면서 화가 나면 재떨이도 집어던졌다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래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건 옛날 일이겠지.' 

좋지 않은 일은 모르는 편이 낫다는 주의라 한 귀로 듣고 흘려들었다. 내가 단독 면담을 할 일도 전혀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의 분이었기에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의 간부부터 신입 사원까지 모두 모여 회의를 하던 날이 있었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일로 인해 그 간부의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그러더니 앞에 있던 서류 뭉치를 집어 들어서 이슈가 있는 부서의 부장님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서류는 정통으로 그분의 얼굴을 타격했고, 서류를 맞은 분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서류를 맞은 분도 다른 직원들이 격식을 차리는 부장님이었는데. 신입사원들까지 보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화가 난 고위 간부는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부장님은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챙겨서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셨다. 즉, 처음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혔다. 

'저 서류가 옛날엔 재떨이였던 걸까.' 

소문으로만 듣던 일을 눈앞에서 목격하니 오히려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의 그 장면도 지금 내 머리 속에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다. 









나의 상사님들의 모습이, 서류를 맞은 부장님의 모습이, 내가 이 회사를 10년, 20년이 넘게 다니면 맞이하게 될 나의 미래 같아서 두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얼른 나 자신을 그 환경에서 끄집어냈다. 

내가 겪은 일들은 다른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더한 일도 겪으면서 힘들게 일하는 분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회사 직원들을 우산으로 때리며 거침없이 막말을 하던 어떤 이름 모를 회사의 팀장의 영상도 본 적이 있었다. 2018년에 일어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그분들보다 '더' 좋은 선배와 '더' 좋은 다른 상사들도 만났고 보살펴 주셨기에 덜 겪은 일이겠지만, 내가 계속 회사에 남아 승진을 하고 더 높은 책임자가 되었다면 그것이 나의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크기가 어떻게 되었든, 그 역사가 얼마나 되었든, 결국 중요한 건 악습은 반드시 뿌리 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든 회사는 결국 상사 편이라던 - 신입 시절 어느 선배의 말처럼, 정작 회사는 모욕을 당하는 직원을 지켜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도 너무 안타깝다. 저런 환경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자존감. 되찾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잘 되지 않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땅콩회항이, 물벼락 갑질이, 막말 욕설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저 곳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저 사건들의 폭로가 대한민국의 더 많은 회사의 악습을 뿌리뽑을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글: 노이

커버 사진: Photo by Andre Hunt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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