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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낭만이 박제된 도시, 빈(Wien)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촬영지 따라 걷기

by 노현지



대학생 때 학교 앞 좁은 고시원에서 살았다. 잠시 고시 공부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저렴한 방값 때문이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공부를 접고도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좁은 방에 살았다.

가구라고는 오직 책상 하나뿐이던 방. 책상이 있는 벽의 오른쪽 벽에는 옷 사정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연두색 행거 하나가 있고, 그 행거의 오른쪽 벽 아래쪽에 개킨 이불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으며, 가운데 성인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있던 좁고 남루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낭만이 있었다. 음악과 라디오와 영화.

음악과 라디오는 배경처럼 흘릴 수 있는 것이라 별도의 시간을 일부러 빼지 않아도 되었지만, 영화는 달랐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두어 시간은 집중을 해야 했으므로 취업 준비를 하는 바쁜 나날 속에 누리는 나름 사치스러운 시간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OTT가 있던 때가 아니라서 영화파일을 다운받아 컴퓨터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직 취직이 되지 않아 미래가 불안정하고, 가족들과 떨어져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외로운 처지였던 나는 일부러 따뜻하거나 로맨틱한 영화를 찾아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어떤 영화는 배경음악처럼 흘러갔고, 어떤 영화는 재미가 있다 생각했고, 어떤 영화는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중 특히나 나의 온마음을 휘감은 영화가 있었으니, 낭만적인 사랑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였다.


< '비포 선라이즈' 영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


1995년에 만들어진 ‘비포 선라이즈’는 2005년 당시의 내게도 10년이나 된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 명성은 익히 들어온 터였다. 유럽을 횡단하는 기차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즉흥적으로 기차에서 내려 하루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줄거리의 영화. 그러나 어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도, 기승전결이 도드라지지도 않고 그저 두 주인공의 대화와 대화로 이어지는 영화. 그래서 누구는 지루하다고 했고 누구는 당최 무슨 재미인지 모르겠다고도 했으나, 어떤 이들은 완전히 반해 버리기도 한다는 영화. 이것이 ‘비포 선라이즈’에 대한 세간의 소문이었다.


나의 좁은 방 책상 위, 작은 컴퓨터 화면에서 재생되는 ‘비포 선라이즈’는 듣던 대로였다. 열차에서 만난 젊은 남녀, 제시(Jessy)와 셀린(Celine)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함께 내렸고, 처음 만난 사이였으나 인연의 붉은 실 같은 끊임없는 대화가 서로를 향한 호감과 뒤섞여 꼬박 밤을 새우며 빈의 이곳저곳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단 하루의 걸음을 너무나 사랑하여, 영화를 처음 본 이후로 수많은 밤과 낮 동안 작은 모니터에서 영화를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영화에 집중할 수 없는 시간에도 나는 일부러 영화를 틀어 두었다. 남루한 내 방에 ‘비포 선라이즈’가 스며들어 유럽의 낭만으로 가득 차길 바랐다.


낯선 남녀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보통의 우리에게도 있다. 흔한 소개팅 같은 것. 소개팅에서 우리는 선 만남, 후 호감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서로의 신상과 조건을 조사한다. 잘 보이고 싶은, 잘 보여야 하는 대화에는 ‘진짜 나’보다 ‘괜찮아 보이는 나’가 중요하다. 오늘 하루가 아니라 두고두고 함께할 상대로는 ‘순간의 반짝임’이 아니라 ‘현실적인 괜찮음’이 필요하다. 그러니 소개팅에는 낭만이 있을 수 없다. 낭만이란 현실을 잠시 지운 틈으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게 ‘툭’하고 터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은 이런 낭만의 조건으로 무장했다. 우연한 기차, 처음 만난 사이, 단 하루의 동행, 서로를 향한 끌림, 그러나 다시는 만나지 못할 먼 거리의 각자의 삶. 이것저것 잴 필요 없고 나중을 고려할 필요도 없는 단절된 순간, 낯선 이국의 도시에서 셀린과 제시는 어느 때보다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었고, 그렇게 벌거벗은 대화를 나누며 사실은 서로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다. 말도 안되는 장난 같았던 즉흥적인 동행, 단 하룻밤의 낭만으로.


영화는 두 주인공 남녀의 호감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나는 그들의 사랑보다 그들이 나눈 대화가 부러웠다. 요즘의 신변과 가십에 관한 가볍고 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 상상과 이상, 사랑과 좌절, 미래와 고뇌 등에 관한 깊은 대화. 내게도 오래된 친구가 여럿 있었지만 관계의 친밀함과 별개로, 일상에서 쉽게 꺼내지 못하는 내면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도시의 밤을 누비며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 자체가 내게는 낭만이었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또 보는 나를 보면서 ‘내가 사랑이 하고 싶은가?’ 여겼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영화가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 하룻밤 빈을 누비는 영화였대도 나는 그 영화에 열렬히 환호했을 것이다. 낭만적인 우정을 찬양하며. 그때 그 좁은 방에서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랑보다 내면을 나눌 수 있는 ‘낭만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십 대의 내게 영화 이상으로 특별했던 ‘비포 선라이즈’. 그때 이후로 약 20년이 지났지만 영화의 배경인 오스트리아 빈으로의 여행은 남루한 좁은 방을 가득 채워주던 낭만을 직접 만나는, 또 다른 낭만이었다. 나는 풍요로운 빈의 박물관과 미술관 속에서도 빈을 여행할 3일 중 하루를 온전히 나의 ‘비포 선라이즈’를 위해 바쳤다. 영화 속 셀린과 제시가 다닌 걸음을 따라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런 나를 위해 오스트리아 여행 동행자인 친구는 자신의 귀한 하루를 기꺼이 내어주었다. 유명 관광지가 있는 구역이 아닌 도시의 골목을 돌아다닌 시간은 영화만큼이나 낭만적이었고,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 것에 더해 손수 구글지도를 보며 길까지 찾아준 나의 오랜 친구의 우정 또한, 비록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만난 운명적 인연은 아니지만, 이미 낭만적이라 할 수 있었다.







/ 빈에서의 첫 걸음, 초록색 철교


즉흥적으로 빈에서 내린 두 주인공 제시와 셀린이 처음으로 함께 걷는 장소인 초록색 철교.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다리 아래로 기차는 떠나고, 남겨진 두 사람은 예고 없이 떠안은 빈을 어떻게 돌아볼지에 대해 어색하게 이야기 나누며 안내책자를 뒤적이다가 이 철교 위에서 아마추어 연극단의 배우들을 만난다. ‘이상한 암소’ 역할을 할 예정이라는 배우는 대관람차가 있는 프라터 공원 근처에서 밤 9시 반에 공연하는 자신들의 연극을 보러 오라 초대하고, 둘은 흥미를 보이며 가능하다면 그러겠노라 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연극을 보러 가지 못한다. 둘만의 대화로 가득 찬 빈의 밤을 보낸 제시와 셀린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연극을 떠올린다. 기차에서 막 내린 빈에서의 첫 걸음, 초록색 철교 위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반하지 않은 척, ‘신혼부부’라는 농담으로 이 즉흥적이고 어색한 관계를 연극해야 했지만, 빈에서의 걸음이 길어질수록 그들에게 더 이상 연극은 필요 없었다.



< 제시와 셀린의 첫 번째 장소, 초록색 철교 >


아마도 이쯤, 초록색 철교 위에 서 본다. 얼마나 깊은 밤이 펼쳐질지 모른 채, 어색하게 걸음을 시작하는 제시와 셀린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장면 속에 내가 서 있다니. 파란 하늘과 밝은 태양빛이 조명 같이 내리 쬐었다. 폴라로이드를 가져올 걸 그랬다고 잠시 후회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영화 같았을 텐데...




/ 여정도 대화도 본격적으로, 트램


둘은 트램을 타고 본격적으로 정처 없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트램의 맨 뒷 자리에 앉아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어떤 질문이 되었든 100% 진실만 말하기로 하자는 제시의 제안으로 둘의 대화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영화에 나온 트램은 아니고, 뒤쪽에 앉을 자리도 없었지만 우리도 트램을 탔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타고 싶은 트램이었는데, 마침 우리의 동선 상에 맞춤처럼 들어와 준 빈의 트램이었다.


< 빈의 도로를 달리는 트램 >


도로에 그림처럼 그려진 선을 따라 달리는 오래된 유럽 도시의 트램은 그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일상의 교통수단이겠지만, 내겐 버스나 지하철과 비교할 수 없게 그 자체로 여행의 목적이 되는 존재였다. 더 현대적이고 토지의 활용도도 높일 수 있는 지하철로 바꾸지 않고, 오래 전의 교통수단을 그대로 이용하며 구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는 트램을 탈 때면 트램이 간직한 시간 위를 함께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도로 위에 그려진 선을 따라 달릴 때면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고, 트램에서 내려 떠나는 트램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트램 뒤로 길게 그어진 바닥의 선이 이대로 헤어지지 말자는 인연의 약속, 혹은 미련 같기도 했다.


< 멀리 있을 때 더욱 아련한 트램 >




/ 서로를 향한 눈짓이 음표처럼 오르내리는 레코드 샵, ALT&NEU


레코드 샵의 음악감상실에서 셀린이 고른 LP를 들으며 제시와 셀린이 서로를 흘깃흘깃 훔쳐보는 장면은 ‘비포 선라이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제시가 셀린을 바라볼 때면 셀린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한다. 반대로 셀린의 눈이 제시를 향하면 제시가 재빨리 눈을 돌린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둘은 절대 눈길을 마주치지 않고 짐짓 모르는 척한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내겐 이 감상실 안에서 찰나의 순간으로 부딪히는 둘의 눈길이 대관람차에서의 석양 빛 키스보다 더욱 로맨틱하게 여겨진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고정되는 눈길과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거두어 들이는 두 사람의 눈길이 교차할 때 바쁘게 위아래, 좌우로 움직이는 둘의 눈동자가 마치 오선지 위의 오르내리는 음표를 닮았다. 그들의 눈동자가 그린 음표들로 감상실은 그 자체로 음악이 되었다.



< 레코드 샵, ALT&NEU 전경 >


조용한 거리에 낯익은 파란 동그라미 간판이 보였다. 반가움과 설렘이 밀려왔다.

‘바로 저기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제시와 셀린이 있었어!’.

오래된 LP판들이 빼곡하게 꽂힌 레코드 샵, ALT&NEU는 영화 때문이 아니라도 레트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하겠다 싶은 아우라가 뿜어나오는 곳이었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비포 선라이즈’의 감동에 이끌려 걸음을 했을 것이다. 가게 안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여럿이었고, 우리가 구경하는 동안에도 계속 사람들이 들어왔다. 국적이 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역시나 음악 감상실과 그 앞에 붙어 있는 ‘비포 선라이즈’ 영화 포스터. 그곳에서 처음 보았고,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그 사람들에게 혼자만의 친밀감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 역시 그러했으리라.


< 레코드 샵 내부, 셀린처럼 서서 LP판을 넘겨 본다 >


이 레코드 샵의 또 다른 명물은 LP판을 형상화한 간판의 파란 동그라미가 인쇄된 캔버스 백이다. 계산대에 줄을 선 사람들 대부분이 캔버스 백을 사는 것 같았다. 나도 기념을 위한 LP판 하나를 골라 들고 계산줄에 섰다. 개인적으로 파란 동그라미가 흰색 바탕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였기에 흰색 캔버스 백을 사고 싶었는데, 검정색 가방만 남아있다고 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더하여 10유로를 주고 산 가방의 재질이 너무 얇고 뻣뻣해 또 한 번 아쉬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에 직접 서서 느낀 감동을 해치지는 않을 정도의 아쉬움이었다.


< 레코드 샵의 두 명물, '비포 선라이즈'와 '캔버스 백' >




/ 석양 빛 키스를 나누는, 프라터 공원의 대관람차


걸어서, 또 트램을 타고 빈의 여기저기를 누비던 두 사람은 프라터 공원에 이른다. 초록색 철교에서 만난 아마추어 배우들이 공연장 위치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장소였다. 둘은 대관람차를 타고 빈 하늘 위로 높이 올라, 아름답게 물든 석양 빛 키스를 나눈다.


너무 성급하지는 않나,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면 어쩌나, 그럼에도 이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 사랑을 나누고 싶은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제시의 얼굴은, 처음 짝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순수하면서도 동시에 본능에 휘둘리는 어설픈 유치함과 스스로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난감함이 공존하여 우습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마음을 꿰뚫고 있는 셀린. 제시보다 성숙한 감정을 보여주는 셀린이었지만, 그 순간은 그녀도 진심으로 키스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영화 속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이 처음으로 밖으로 드러나 하나의 마음으로 겹쳐지는 대관람차 씬은 두 사람으로 가득 차 숨이 멎을 만큼 적막하고 황홀한 느낌을 준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대관람차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 대관람차가 유명한 '프라터 공원' >


사람이 많은 한낮의 놀이공원, 그리고 그 공원의 상징 대관람차에는 탑승을 원하는 승객들이 줄에 줄을 이었고, 여러 명이 동시에 탑승하도록 운영되는 대관람차 한 량 안에는 키스를 부르는 석양 빛 낭만 대신 모르는 사람들의 체온이 가득했다. 옆 사람을 최대한 피해 간신히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영화 속 제시와는 다른 이유로 난감했고, 그런 열악함에도 사진을 포기하지 않는 내가 또한 제시처럼 유치해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웃었다. 부끄럽고 점잖지 못한 것을 알아도 너울대는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랑. 나는 이토록 ‘비포 선라이즈’를 사랑했고, ‘노현지 여기 다녀감’ 같은 증빙용 사진이라도 소중했고, 석양빛 대신 초록빛이 가득한 빈의 전경은 싱그럽게 아름다웠다.


< 첫 키스를 나눈 프라터 대관람차 성지순례 완료! >




/ ‘우리는 모두 별’ 점성술사의 예언과 함께한, 밤의 카페 ‘KLEINES CAFE’


빈에 어둠이 내려 앉을 무렵, 둘은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쉬어 간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운명을 점쳐주던 집시 분위기의 여인과 눈이 마주친 셀린. 여인은 제시와 셀린 테이블로 와서 둘의 손금을 봐 준다. 셀린에겐 ‘여성의 힘과 큰 가능성’을, 제시에겐 ‘배우는 중’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떠나는 여인.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잘 보이고 싶은 상대 앞에서 미성숙된 사람 취급을 받은 제시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 가벼운 상술로 넘기려 한다. 그러나 이 묘한 여인의 말은 영화 전반에서 묘사되는 제시와 셀린의 이미지와 닮았다. 아마도 이것을 영화 속 제시도 알고 있기에 더욱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제시의 반응이 우스우면서도, 자신에게 긍정적인 예언을 남기 여인을 무시하는 제시의 말이 걸리는 셀린. 이들이 하룻밤이 아니라 일 년을 만난 사이였다면 싸움 포인트가 됐을 것이다. 하하. 그러니 손금이든 예언이든, 점이든 ‘좋은 말’만 걸러 듣기로 하자. 점성술사 여인이 떠나며 남긴 말처럼. “두 분은 모두 별이예요. 그걸 잊지 말아요.”




< ‘KLEINES CAFE' 전경 >


카페 ‘KLEINES CAFE’와 그 앞 작은 광장은 영화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 비가 내려 바닥이 젖었지만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촬영지를 찾아 종일 걸어 다닌 우리는 다리가 많이 아팠다. 밤까지 빈을 누빈 제시와 셀린도 이 카페에 앉았을 때쯤엔 다리가 참 많이 아팠겠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커피를 주문했다. 생크림이 올려진 커피로 우리나라에서 ‘비엔나 커피’로 불리던 커피다. 그러나 비엔나(=빈)엔 ‘비엔나 커피’가 없다. 누군가 비엔나에서 이 커피를 마시고 감명을 받아 한국에서 ‘비엔나 커피’란 이름을 붙여 판매를 했던 것일까? 이제는 한국에서도 제 이름 ‘아인슈페너’를 찾은 ‘생크림 가득 커피’를 빈의 야외 카페에 앉아 비소리를 들으며 마셨다. 달달한 맛이 피로를 풀어주었다.


< 영화 속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 타임 >


그 후 셀린과 제시처럼 나란히 앉아 친구와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여행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친구가 오스트리아 여행에서 꼭 사야 할 기념품 목록을 검색했다. 건강식품/약품류가 많았는데, 하필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면세점 품목까지 검색하며 쇼핑 계획을 세웠다. 친구와 달리 영국 바스(Bath)로 갈 예정이라 계속 여행자 모드였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엔 관심이 가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흔치 않은 엄마의 빈 자리를 낯설게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모차르트 초콜릿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는 별’이라고 말해주는 집시 여인이 있었다면 우리의 대화도 달라졌을까? 영화를 따라 걷는 여행이지만 영화 같은 낭만 말고도 챙길 것이 많은 보통의 여행자들은 별보다 기념품으로 반짝이는 법이었다.




/ 연극 같은 인생에 대한 고백, 성당의 대화


다시 거리로 나온 둘은 성당에 들어간다. 영화에서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장면이 이 성당 안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종교적인 것은 거부하나, 인류사에서 종교가 지닌 무게와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을 느끼는 셀린에게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깊게 느껴진다. 의지할 무엇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인간의 고통의 산물이 종교 같다고 늘 생각했던, 종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결을 같이 하기에 더욱 깊게 와 닿았던 대화.

그리고 이어지는, 자신이 노파의 기억을 살아가는 듯하다는 셀린과 반대로 13살짜리 꼬마가 어른인 척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제시의 연극 같은 인생에 대한 대화 또한 앞선 카페 장면의 점성술사의 말과 겹치며, (나이대는 다르지만) 삶을 향한 유사한 생각을 가진 둘을 더욱 가깝게 이어주는 계기가 된다.

이런 내면의 깊은 대화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두 사람. 그들의 낭만은 낯선 도시, 처음 만난 남녀라는 것보다 그들의 대화 속에 있다. 현실의 우리는 그런 추상적이고 비실용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당면한 생활이 너무 바쁘고, 버겁고, 그래서 늘 지쳐 있다. 하여, 곁에 있는 이에게 낭만까지 바라기는 너무 안쓰러워 영화에서 낭만을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낮에 보는 성당은 영화보다 밝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반갑게도 성당의 옆 문이 열려 있었다.


< '노파'와 '소년'이 잠시 머물다 간 성당 >


작은 성당은 고요하고 성스러웠다. 나도 자리에 앉아 기도를 올렸다. 한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나는 성당이든 절이든 종교적 공간에 가면 언제나 기도를 올린다. 어디서나 비는 불충한 기도를 들어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은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나에 대한 연민, 그리고 진심. 노파의 담담한 삶이건 소년 같은 미지의 삶이건, 인생이란 여행의 마지막 걸음까지 모두 안녕하길. 팍팍한 여정에 가끔은 미소가 되어줄 낭만도 깃들길.


< 인생이란 여행의 마지막 걸음까지 모두 안녕하길 >




/ 밀크셰이크 시인, 다뉴브 강가


다시 밤 거리로 나온 그들은 다뉴브 강가를 걷다가 계단에 앉아 시를 쓰는 거리의 시인을 만난다. 돈을 주면 원하는 단어로 시를 써 주겠다고 거래를 제안하는 시인.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둘은 ‘밀크셰이크’라는 단어를 고르고, 강바람을 맞으며 뚝딱 완성된 시를 셀린은 마음에 들어하지만 제시는 원래 있는 시에 ‘밀크셰이크’만 바꿔 넣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 제시가 좋아하든 아니든, 어쩐지 낯선 거리의 부랑자가 써 준 시는 오묘하게 제시와 셀린의 상황과 닮았다.


“(생략) 그대는 내게 어떤 의미인지 보라. 달콤한 케이크와 밀크셰이크.

(중략) 나의 과거를 그대는 모르네. 우리 미래를 우리는 모르네.

(중략) 난 그대를, 그대는 나를 운반하리. 그것이 마땅하니,

그대는 날 모르는가? 지금쯤 날 알지 못하는가!”



< 유람선이 떠 다니는 다뉴브강 >


다뉴브 강가에는 강물과 연결된 계단이 여러 개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영화 속 시인이 앉았던 다리를 알 수는 없었다. 어슬렁어슬렁 강을 따라 걷다가 이런 계단 어디쯤이었겠거니 하고 한 곳을 정해 시인처럼 앉았다.



셀린은 시가 인생을 흥미롭게 한다는 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리고 거리의 시인이 짧은 시간에 휘갈겨 쓴 시도 마음에 들어한다. 영화 속에서 제시는 즉흥적이자 감정적인 사람, 그에 반해 셀린은 성숙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두 가지 타입 중 제시 같은 사람이 더 낭만적일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고,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순간의 마음에 집중한 제시로부터 이 낭만적인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제시보다는 작은 부분도 진지하게 바라보는 셀린이 삶에 대해 더욱 낭만적인 시선을 가진 캐릭터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이 짧은 하룻밤에 제시보다 훨씬 큰 의미로 묶여버린 셀린은 아직도 다뉴브 강의 바람 냄새가 스민 ‘밀크셰이크’ 시를 소중히 접어 보관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찰랑이던 다뉴브강이었다.




/ 걷고 또 걷는, 빈의 골목길


걷는 장면이 참 많은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빈의 거리와 좁은 골목길 풍경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 빈의 밤거리를 걷고 또 걷는 제시와 셀린.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제시와 셀린이 걸었던 길은 빈의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은 구역과는 다른 구역의 거리였다. ‘비포 선라이즈’ 성지순례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여러 가지 박물관과 미술관, 빈에 특히 풍부한 클림트와 에곤 실레 등의 이름으로 빈을 기억하며 떠나지 않았을까.


밤 풍경과 달리 한낮의 빈 거리는 고즈넉하고 정갈한 운치가 있다. 읽지 못하는 글자들이 더욱 이국의 감성을 자극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면 골목 사진을 자주 찍는다. 건물의 대문도 찍는다. 나중에 보면 어딘지도 잘 모를 것들을 왜 그렇게 찍느냐고 남편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냥’ 이라고 나는 답했다. 그저 눈길이 가고, 찍어서 어느 날 꺼내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뿐. 아마도 마치 그 ‘모모’ 거리와 ‘아무개씨’의 대문들이 박물관에 박제된 것들보다 더욱 그곳의 진짜 시간, 진짜 삶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 이리보고 저리봐도 어여쁜 빈의 골목길 >



셀린과 제시는 거리의 아주 작은 공터에서 타악기 연주에 맞추어 한 여성이 온몸을 강렬하게 흔드는 춤을 서서 지켜본다. ‘여성’에 관심이 많은 셀린은 그것이 '출산춤'이라고 했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곧이어 그들은 잠시 동안 결코 끝이 나지 않는 대화, ‘여성과 남성’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을 ‘살벌하게’ 토론하지만, 다행히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셀린의 명대사로 아름답게 주제를 마무리한다.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술이란 게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길을 걷다 영화 속에서 출산춤을 추던 장면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시끄러운 음악도 현란한 골반의 움직임도 없는 조용한 거리. 영화는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빈의 밤거리를 담았지만, 둘의 대화는 이 낮의 조용한 벤치와도 잘 어울려, 마치 둘이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때로는 격렬하게, 또 때로는 장난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출산춤 장면을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벤치 >




/ 드디어 꺼내는 진심, Cafe Sperl


셀린과 제시가 서로에 대한 진짜 마음을 가짜 전화 연기에 실어 고백하는 장면으로 유명한 Café Sperl. 카페 테이블 대부분은 차 있고,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아주 우연하고 특별하게 시작된 두 사람이지만 이렇게 사람들과 섞여 있으면, 그냥 보통의 커플처럼 보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카페 안의 평범해 보이는 모든 이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각각 셀린과 제시 같은 특별한 사연의 주인공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사람들 속에서 셀린은 파리에 있는 친구와 전화하는 연기를 한다. 당연히 그 가짜 전화를 받는 친구 역할은 제시다. 사실 자신도 제시처럼 기차 안의 짧은 대화에서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처음으로 고백하는 셀린. 그리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제시 또한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물론 이번에도 연기다.) 자신이 가볍고 바보 같은 남자로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오늘 처음 만나 빈을 돌아다니는 파리에 사는 여자와 미국에 사는 남자는 자신들에게 ‘다음’이 있을지 알 수가 없기에 이렇게 가짜 연기로 진심을 꺼내 보인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제시와 셀린은 마음이 깊어진 만큼 깊어진 밤에 이 카페를 찾았으나, 우리는 최대의 성지순례를 위한 최적의 동선을 찾아야 했으므로 이 카페를 그날의 첫 번째 목적지로 하여 아침을 먹었다.


< 가짜 전화 연기 장면으로 유명한 Café Sperl >


여름이었지만 이른 시간 카페로 걸어가는 길이 청량했다.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영화에서 본 패브릭 소파가 반가웠다.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제시와 셀린이 앉았던 자리는 내부 벽 쪽 자리였지만, 창가 자리가 비어 있었다면 제시와 셀린도 창가 테이블을 선택했을 것이다.), 커피와 그에 곁들일 빵을 주문했다.


< Café Sperl에서 먹은 모닝커피와 모닝빵 >


음식을 먹는 중에 사람들이 하나 둘 더 들어왔다. 카페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그들의 목적도 우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포 선라이즈’를 찾아 이 도시로 오는 걸까? 제시와 셀린은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낭만을 심어둔 것일까, 그 낭만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 우리의 우주 같은 밤, 극장 앞 난간


서로의 마음이 같음을 안 이후, 두 사람은 함께 걸은 밤만큼 깊어지고, 함께 하는 시간은 현실이 아닌 듯 황홀하다. 난간 너머 저 멀리 보이는 극장에서 매일 밤 펼쳐지는 오페라 무대처럼.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그러나 마음이 깊어질수록 남은 밤은 짧고, 밝아올 아침은, 그 아침이 가져올 이별 혹은 기약의 순간은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우린 모두 호박으로 변하겠지.”



애석하게도 이 난간을 돌아볼 때쯤 비가 내렸다. 오전 내내 화창했던 날씨가 애매한 비 예보와 힘겨루기를 하다 마침내 비로 결론이 났다. 40프로 정도 밖에 안됐던 확률 탓에 많은 이들이 나처럼 우산 없는 가벼운 가방을 선택했는지, 난간이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 옥상의 처마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화의 운치는 비를 피하는 사람들의 소란에 묻혀버렸다는 슬픈 얘기. 상황은 여의치 않았지만 잠시 비가 약해진 사이 난간 앞에 서서 기념 사진을 남겼다. 영화가 밤 배경의 장면이라 그런지 먹구름 낀 하늘도 꽤 영화처럼 근사했다.


< 마음을 확인한 제시와 셀린이 꿈 같은 순간을 보낸 난간에 서서 >




/ 아침은 오고, ‘시간을 정복할 순 없는’ 마지막 순간


다 찾아가지는 못해 건너뛰었지만, 난간에서의 초현실적 순간을 나눈 이후 두 사람은 유람선을 탄다. (다뉴브강 사진에 있는 그런 유람선일 것이다.) 그 유람선에서 이 밤이 마지막이길, 오늘이 가고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 서로 연락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이토록 완벽한 밤이 쉽지 않을 장거리의 현실적 만남으로 이어지면 결국, 앞서 겪었던 사랑과 이별처럼 그저 그런 시시한 결말로 시들어 버릴 것을 걱정해서였다.

셀린은 기차를 타고 파리로 향하고, 제시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둘의 시간. 지난 밤에도 찾았던 난간 옆에 세워진 동상 아래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제시의 무릎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베고 누운 셀린. 그녀에게 ‘시간을 정복할 순 없다’는 시를 읊어주는 제시. 이 두 사람을 ‘연인’이 아닌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이 보낸 밤은 단 하루였지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낭만을 새겨 넣은 그 어느 밤보다 길고 영원할 밤이었다.


< 출처 :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



비가 내리는 난간을 찾은 오후, 난간 옆에는 동상이 있었다. 제시와 셀린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동상임을 알았지만 내린 비 때문에 흠뻑 젖어 앉아 보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다 돌아섰다.

다음 날 아침, 비가 그쳤고 나는 부지런히 동상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 사람들이 모이기 전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아직 빗물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동상 아래에 누워 사진을 찍어 달라는 나를 친구가 황당하고 대단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이렇게까지 진심이라니...’

친구의 눈빛에도 흔들림 없이 동상 아래에 누워 눈을 감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야, 우린 지금 낯선 도시에 있고,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들의 작은 시선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아침 댓바람부터 집밖에서 드러눕는 이 친구가 조금쯤 이상해 보여도 오래전 좁은 방에서 시작된 나의 낭만을 완성하게 해 주렴. 너에게 누우란 얘기는 안 할게. 하지만 단언컨대, 이곳에서 나처럼 누워 사진 찍은 이들이 이미 열 두 트럭은 될 것이야.’


< 영화처럼 낭만적이진 않지만 꼭 누워보고 싶었던 동상 아래 >





누운 자세로 마무리한 ‘비포 선라이즈’를 따라 걷는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모든 촬영지를 가 보진 못했지만, 다시 이십 대의 좁은 방 시절로 돌아간 듯해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비포 선라이즈’를 좇는 여행은, 초라했지만 기대가 있었던 시절로의 여행이기도 했다. 좁은 방이 가득 울리도록 사랑했던 이 영화를 결혼과 육아 등으로 생활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거의 보지 못했다. 그들의 완벽한 밤이 그저 그런 시시한 결말로 끝날 것을 걱정했던 두 사람의 염려가 어쩌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그때 왜 그렇게도 이 영화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영혼이 외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아직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하지만, 마음의 대화를 나눌 영혼의 만남은 또 다른 것. 나는 아직도 해가 뜨기 전까지 함께 낭만을 박제할 영혼을 기다린다.



영원한 낭만이 박제된 도시, 빈(Wien)영원한 낭만이 박제된 도시, 빈(Wien)

'해가 뜨기 전(Before Sunrise)'까지 영원한 낭만이 박제된 도시, 빈(Wien)

[유한한 영국 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유럽 여행기] 오스트리아, 빈 - 영화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 따라 걷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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