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콘월 키넌스 코브
여름의 뜨거운 열기와 맑은 청량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위 사진은 잉글랜드 콘월 여행에서 찍은 사진 중 내가 가장 ‘애정하는’ 사진이다. 아마도 영국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일지도.
나는 항상 커피로 아침을 시작한다. 콘월에서도 예외는 없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닝커피를 마실 카페를 찾았다. 커피를 좋아는 하지만 커피 맛을 특별히 가리지는 않아서(커피면 된다는 소리다.) 구글 지도를 켜 숙소에서 가까운 카페를 검색했다. 여행 중 필요한 간단한 생필품과 간식을 사기 위해 마트에도 들러야했는데 마침 숙소에서도 가깝고 마트에서도 가까운 위치에 아무개 카페가 있었다.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 오로지 커피 생각만 하며 도착한 카페는, 세상에 패션잡지 화보촬영을 위해 세팅해 두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힙한 느낌의 카라반 카페였다!
대형마트 건너편 주차장 어귀, 허허벌판에 세워진 카라반 한 대. 파란색과 흰 색으로 채색된 카라반은 콘월의 하늘과 구름, 혹은 바다와 파도의 색을 닮아 있었다.
눈에 하트를 가득 달고 커피와 간단히 먹을 것을 주문한 뒤, 아직 이른 오전이라 손님이 별로 없는 틈을 타 열심히 ‘인생사진’을 찍었다. 이런 배경은 누가 어떻게 있어도 예쁘고, 누가 어떻게 찍어도 근사할 것이다.
예상대로, 그리고 이미 고백한 대로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을 얻었다. 인스타그램에 내 사진을 잘 올리지는 않지만, 만약 그런 성향의 사람이라면 과시(?)하고 싶게 만드는 느낌의 사진일 것 같았다. 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이 카라반 카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간 혹은 배경 자체가 멋을 품고 있어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드는,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딱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을 묘사할 때 영어로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이라는 신조어를 쓴다고 한다. 한국에서 ‘인스타용’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일 듯하다.
영국인 지인을 통해 이 새 단어(Instagrammable)를 습득했을 때의 아연함이라니. 많은 것들이 IT에 기반하여 돌아가는 현시대에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SNS 매체의 힘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아침에 일어나 별 생각 없이 모닝커피를 마시러 간 카페가 이런 수준인 콘월은 아주 ‘인스타그래머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중세시대 혹은 고대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전통적으로 유명했던 영국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1900년대 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콘월은 상대적으로 젊고,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는, 그래서 영국 사람들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가는 곳이다. 게다가 태양빛이 좋고, 역동적이고 극적인 감상을 일으키는 해안선과 해안절벽, 짙은 바닷물이 출렁이는 콘월은 어디서나 쉽게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다.
콘월의 수많은 해변과 명소들 중에서도 영국 사람들에게 사진이 잘 나오는 곳,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곳, 최고의 인스타그래머블한 해변으로 각광받는 곳이 있다고 한다. 콘월의 남쪽 해안선에 있는 키넌스 코브(Kynance Cove)다. 이곳은 ‘인스타그래머블’이란 영어 단어를 알려준 영국인이 추천한 여행지 2곳 중 한 곳이기도 했다. (한 곳이 키넌스 코브이고 다른 한 곳은 다음 시간에 떠나볼 ‘포트 아이작’이다.)
콘월 남서쪽, 영국의 가장 남단에 해당되는 리자드 반도(Lizard Peninsula)에 위치한 키넌스 코브(Kynance Cove)는 콘월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로, 앞서 여행한 세인트 아이브스만의 서핑하기 좋은 드넓은 해변과 달리, 해변을 둘러싼 해안 절벽의 극적인 형상과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바닷물, 그리고 모래사장 위에 굳건히 박힌 큰 바위가 바닷물의 깊이(밀물과 썰물)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함으로 사랑받는 해변이다.
콘월 자체가 영국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1900년대 들어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SNS가 발달한 후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는 ‘키넌스 코브’는 인스타그램, 블로그 등에서 ‘사진 찍기에 좋은 스팟(Spot)’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이방인인 나의 눈에는 영국 내 어디를 가나 새롭고, 낯설고, 근사하게 보이지만 영국 사람들에겐 이 키넌스 코브가 ‘영국 같지 않은 영국 풍경’으로 불린다고.
이 특별한 해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해안 절벽 사이로 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내려가는 길과 계단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 마주하면 훨씬 가파르게 느껴진다.) 조심조심 계단을 밟는 중에도 햇살의 윤슬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키넌스 코브 바다가 자꾸만 눈길을 잡아당겼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는 동굴처럼 움푹 들어간 바위 아래를 고개를 숙이고 성큼성큼 건너야 해변에 닿았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쉽게 닿을 수 없는 신비한 곳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후 늦게 방문한 키넌스 코브 해변에는 바닷물이 꽤 깊이 들어와 있었다. 밀물의 시간. 이 바닷물이 저 먼 바다까지 나갔을 때는 하얀 모래사장이 훨씬 넓게 드러난다고 했다. 그리고 썰물 때의 해변이 모래사장 위의 바위와 해안 절벽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하루 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키넌스 코브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겠으나, 유한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영국의 곳곳을 더듬어가는 우리에게는 물이 가득 차오른 키넌스 코브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차올랐다.
키넌스 코브의 해변은 듣던 대로 독특했다. 해변 한 가운데에 누군가 높은 곳에서 떨어트려 놓은 듯한 큰 바위들이 무심하고 우직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각각의 바위들이 제자리에서 밀려오는 물살을 이리저리 밀고, 갈랐다.
큰 바위 두 개가 만든 좁은 길 안으로 밀려들어 모래사장 위에서 넓게 퍼졌던 파도가 다시 뭉쳐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 힘이 무척 빠르고 강했다.
큰 바위보다 바다를 향해 한 발 들어서 있는 얕고 넓은 바위는 바위 옆면을 타고 양쪽에서 밀려온 물살이 마치 바위를 백허그하듯 감싸 바위 가운데서 만났고, 두 갈래의 물살은 서로 부딪히며 엉키어 바닥의 모래를 마구 휘저었다. 키넌스 코브의 정체성이자 상징 같은 바위들이 파도와 함께 만든 물살은 거칠었고, 동요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 방황하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물살이 거세거나 말거나 바다를 보자 아이들은 일단 발부터 담그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수영복도 없고(세인트 아이브스만에서 이미 충분히 해수욕을 한 뒤라 콘월의 남서쪽 여행에서는 해수욕을 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수영복을 챙겨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거센 물살 때문에 처음에는 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속도 모르는 파도는 계속 같이 놀자고 밀려왔고, 아이들은 슬금슬금 바다로 발을 뻗었다. 이런 바다에서 발을 담그지 않기란 쉽지 않았다. 또한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외면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꾸만 물과 가까워지는 아이들을 향해 마침내 출항을 허락했다.
순식간에 돌격하려는 아이들을 붙잡고 무릎 아래 발까지만 담근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물살이 거세 조금만 방심하면 중심을 잃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마중 나온 파도가 아이들의 발을 덮쳤다. 꽤 거센 파도의 공격에도 아이들은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신이 났다.
‘발만 담그기’ 협약에 대해 분명히 알겠다고 대답한 아이들의 반바지 끝단이 금방 젖었다. 사방에서 거칠게 휘몰아치는 키넌스 코브의 파도는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조심할 수 있는 출렁임이 아니었다.
끝까지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남편이 한숨을 쉬며 걱정했다.
“저거 봐. 발만 담글 수가 없다니까. 옷이 다 젖어서 어떡하지?”
“내 가방에 여벌 옷 있어.”
“언제 챙겼어?”
“아침에. 혹시 몰라서. 해수욕 계획은 없었지만, 그래도 바다잖아?”
물을 좋아하지 않는 자신 빼고 모두 한 통속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남편도, 아이들에게 그냥 마음 편하게 놀라고 자유를 허한 나도 옷을 걷어 올리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밀물은 계속 깊이 들어왔고, 거칠 것이 없어진 아이들이 혹시나 물살에 휩쓸려 넘어지면 주워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막상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적시고 나자, 남편은 두 갈래 물길이 회오리를 만드는 파도를 헤치고 얕고 넓은 바위 위까지 올라갔다 오며 해변에서의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첨벙첨벙 바다로 뛰어 든 아이들은 삽시간에 가슴까지 젖었고, 급기야 파도가 치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렇게까지 젖기를 허락한 건 아니었지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즐거울 수 있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가벼움이 부러웠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것을 갖추어서 찾은 세인트 아이브스에서의 해수욕보다 이곳에서의 짧은 해수욕이 훨씬 즐거워 보인 것은. 반항적인 키넌스 코브에서의 물놀이에는 계획하지 않은 일탈이 주는 설렘과 즐거움이 있었다.
놀다보니 어느덧 주변에 북적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모래사장도 거의 사라졌다. 밀물이 차오른 바다는 이제 더 이상 거칠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남은 몇 명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멀리 바다수영을 떠났다. 고개를 물에 넣지 않고도 수영을 잘 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는데, 이 키넌스 코브에서 보는 바다수영은 훨씬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였다. 저들처럼 바다로 뛰어들 수 없는 우리는 이제 바다에서 나올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옷을 갈아 입힌 뒤, 해변으로 내려온 길의 반대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숨막히는 장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의 긴 해가 아직 걸려 있는 경사진 언덕을 내달리면 해안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키넌스 코브를 만날 수 있었다. 물이 차오른 때라 해안 절벽은 많이 잠겼지만, 대신 만(Cove)은 짙은 바다의 푸르름으로 넘실거렸다.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서 있는 언덕과 저 멀리 길게 뻗은 콘월 남서쪽 해안 절벽이 보였다.
“내가 저기 언덕 끝에 서 있을 테니까, 여기서 나를 찍어줘!”
남편에게 사진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멀리 언덕 끝을 향해 힘껏 뛰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키넌스 코브에서 ‘인스타그래머블’한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세상의 끝에 선 듯 서 있기만 하면 되었고, 남편은 핸드폰 카메라의 동그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다. 그외 모든 감성과 근사함은 이곳, 키넌스 코브와 여름의 햇살이 완성해 주었다.
늦은 여름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은 키넌스 코브의 바다와 해안 절벽이 어우러진 풍경은 ‘충만’이라는 필터를 끼워놓은듯 아득하고, 가득했다. 해안 절벽 끝에 이는 바람은 나의 모든 것을 비워내고 그안을 여름의 공기로 채웠다. 나는 그만, 여름의 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여름이 잘도 익어가고 있었다.
※ 덧붙이는 글
키넌스 코브를 방문한 뒤 우리는 최남단 지점도 찾아가 보았다. 키넌스 코브가 있는 리저드 반도에는 영국 본토 최남단 지점, '리저드 포인트(Lizard Point)'가 있다. 영국 본토의 가장 서쪽 끝인 ‘Land’s End’를 방문했으니, 최남단 지점도 가서 봐 주어야하지 않겠냐는 우리 딴의 의리였다.
서쪽 끝 ‘Land’s End’에 비해 최남단 지점은 소박했다. 찾아온 사람도 우리 가족 외에 한 팀의 여행객들 정도였다. 보여줄 사진이나 흥미로운 점이 별로 없지만, 번잡하지 않은 조용한 가장 남쪽의 땅 끝에서 고요하고 차분하게, 조금은 아쉽게 저물어가는 콘월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런던 빼고 영국 여행] 잉글랜드 콘월 키넌스 코브
‘인스타그래머블’한 키넌스코브(Kynance Cove) _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