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비 Apr 08. 2019

피렌체를 거닐며

혼자 이탈리아 여행 02 산책하기 좋은 날, 발이 닿는 대로


깊게 잠에 들지 못했다. 낯선 공간에서의 잠자리를 가리는 탓이었다. 몸은 피곤한데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몇 번이고 비몽사몽한 채로 눈을 떠 밤을 확인했다. 유난히 이불이 무겁게 느껴졌고 달이 지지 않는 긴 밤이라 생각했다.




여행 2일 차
로마 - 피렌체


늦잠을 잤다. 밤잠을 설치다 겨우 빠져든 깊은 잠에 알람을 꺼버렸나 보다. 예매해둔 피렌체행 기차 티켓은, 음 그냥 소장해야겠다.


괜찮아, 사실 예매하면서도
늦잠 자서 놓칠 것 같다 생각했어


앞으로는 오전에 기차를 예매하지 말아야지 하며 부스스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켰다.




로마는 서울보다 8시간 늦게 하루를 시작한다. 왠지 8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전날 저녁에 로마를 맞이했던 테르미니 중앙역에 다시 왔다. 피렌체행 기차를 예매하기 위해 티켓판매기 앞에 서서 시간표를 보는데, 이런. 늦잠 잔 대가는 컸다. 다음 시간은 놓친 기차 티켓의 약 두 배 가격이었다. 티켓을 결제한 뒤 승차홈에 미리 와있는 기차를 확인하곤 올라탔다.


기차가 천천히 로마를 벗어나자 도시에서 녹음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군데군데 작은 집들과 너른 들판이 보였다. 소리가 들렸다면 새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질 것 같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취가 좋았다. 이런 여유로움을 느껴본 게 언제였을까. 차창 밖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의 차창 밖 풍경


날씨가 흐리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피렌체가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맑게 갰고 기차 안까지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했다.




1시간 30분 만에 피렌체에 도착해 숙소를 찾아 나섰다. 캐리어를 끄는데 길들이 모두 울퉁불퉁해서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덜그럭 쿵 돌길에 튀는 캐리어 소리는 골목길에 접어들 때면 더 심해졌다. 매일 관광객이 끊이지 않을 텐데 이곳에 사는 시민들은 참 시끄럽겠다 싶었다.


피렌체 시내의 골목길


피렌체에서 머무를 숙소는 한인민박이었다. 한국사람이 운영한다니 안심되기도 하고 새로운 여행자들을 만나볼까 싶어 선택했지만 아쉽게도 내가 머무르는 기간 동안 여자 여행자는 나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방을 혼자 쓰게 된 것은 편했다.


숙소에서 대충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향한 곳은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봐둔 랍스터 파스타가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랍스터 반 마리와 토마토소스로 맛을 낸 파스타는 먹음직한 플레이팅과 고소한 냄새가 시각과 후각을 자극해 식욕을 돋웠다.


<CIRO AND SONS RISTORANTE  PIZZERIA>의 랍스터파스타


탱탱한 랍스터의 살은 치즈와 함께 쫄깃한 식감에 고소한 풍미를 더했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익은 토마토가 톡 터지며 새콤달콤한 즙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토마토소스가 은근히 배어든 파스타 면은 씹을 때마다 생기를 더해 요리를 천천히 음미하며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계획했던 대로 피티궁전과 보볼리정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보볼리정원 입장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전에 기차를 놓친 탓이었다. 그 시간에 들어가면 조금밖에 보지 못할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패스하고 아르노 강변을 산책했다.


원래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까


마침 산책하기 너무 좋은 날씨였다. 햇빛은 적당히 따사로웠고 바람은 두 볼을 간질이곤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베키오 다리가 보이는 아르노 강변


목적지를 입력해 빠른 경로를 탐색하는 지도를 켜지 않고, 그저 발이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한 곳에 멈춰 반짝거리는 강물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수많은 갈림길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며 작은 골목들을 거닐었다.


아르노 강변에 있는 건물의 입구


기억에 남는 순간은
꼭 대단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골목을 산책하다 우연히 본 건물의 입구가 너무 예뻤고, 입구를 따라간 끝에 마주한 아르노 강변의 풍경이 너무 예뻤다.


아르노 강변에 있는 건물의 테라스


조금 있으니 노부부가 옆에 자리했고 또 조금 후에는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가 뒤편에 섰다. 지나가다 멈춘 사람들을 보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새 열댓 명이 되어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순간의 감동을 함께 나눴다.




한인민박집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젤라또 가게가 마침 근처에 있어 들어갔다. 하나에 1유로. 저렴한 가격으로 작은 콘 하나를 맛볼 수 있었다. 사장님이 강력 추천하신 피스타치오 맛. 한껏 기대하며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Gelateria della Passera>의 젤라또


이탈리아에서 처음 맛본 젤라또는 한국에서 먹던 아이스크림보다 식감이 더 쫀득했다. 입 안에서 바로 녹지 않아서, 혀로 녹이면서 쫀득쫀득 씹는 맛(?)이 있었다. 피스타치오 맛은 내가 아는 맛과는 조금 달랐다. 진한 녹차 맛에 피스타치오의 달콤한 맛이 섞인 것 같은 색다른 맛이었고 녹차 맛을 좋아하는 내겐 ‘호’였다. 이탈리아에서 먹은 젤라또 중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생각나고 맴돌았다.




아르노 강을 따라 곧장 걷다 보면 미켈란젤로 언덕이 나온다. 피렌체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맥주를 마시며 노을과 야경을 바라보기에 좋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피렌체 시내의 전경


언덕 위로 올라오니 벌써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맥주는 포기했지만 아무 잡념 없이 눈 앞에 펼쳐진 것들에 가만히 집중하는 이 순간이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과 구름이 물들어가며 노을이 점차 번져나갔다. 기분 탓일까, 도시 전체가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미켈란젤로 언덕의 계단에 앉아 노을을 즐기는 사람들


기차역이 저어기 즈음이었던가. 거기서부터 성당을 지나 다리를 건너 강변을 따라 걸어온 곳곳들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담겼다.


멀리서 내려다보면
크게만 느껴졌던 것들이 모두 작아 보인다


신기한 일이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도 시야가 달라지니 말이다. 멀리서 보면, 심각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복잡했던 것이 단순하게 풀리고 집착했던 것이 부질없음을 느낄 때가 많다.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생각은 대개 내가 어디에 서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걸까 수없이 불안해했던 마음은 지금 이 언덕에서 별 걱정거리로 작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시간이 지나야 결과를 알 수 있으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쌀쌀한 바람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커피를 마시러 갔다.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질리>에서 에스프레소와 티라미수를 주문했다.


<Gilli>의 에스프레소와 티라미수


설탕을 넣지 않은 에스프레소는 처음엔 썼지만 이내 퍼지는 깊고 진한 이탈리아 원두의 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천천히 음미하는 맛이 있었다. 티라미수는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크림 아래 페스츄리처럼 얇게 층층이 쌓인 쿠키가 바삭하게 씹히면서 식감을 더했다. 에스프레소와 티라미수는 함께 곁들이면 진하고도 달콤한 커피의 풍미가 한데 어우러지는 환상의 조합이었다.




피렌체에 온 첫날인 만큼 피렌체의 역사와 명소들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미리 예약한 가이드 투어를 들으러 갔다.


피렌체는 작은 도시라서 맘만 먹으면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낮에 혼자 돌아본 것과 가이드님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는 것은 또 달랐다. 낮에는 도시의 풍경과 정취, 분위기를 느꼈다면 밤에는 피렌체를 대표했던 메디치 가문의 역사와 예술가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Santa Maria del Fiore 대성당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부흥했던 곳으로, 메디치 가문에서 후원한 예술가들이 만든 건축물들과 예술작품들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었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예술작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피렌체에 기증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피렌체의 시민들은 도시에 대한 자긍심이 높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걸어온 발자취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노고를 알고 나면 그곳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지금 사는 동네의 역사는 무엇일까


그냥 살기만 했지 그곳을 미처 들여다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 지금까지 살고 있는 나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인 지역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들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곳곳에 있는 조명이 피렌체의 밤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도시를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고요한 거리는 오래된 도시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왠지 조금 쓸쓸해보였다.


어느덧 저물어가는 두 번째 밤. 여행 다이어리의 두 번째 페이지를 끄적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을 청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 혼자는 처음이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