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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Dec 17. 2019

차이나타운, 누아르의 탄생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9번지 일대. 차이나타운으로 지정된 곳이다. 초입의 언덕길로 올라가면 외관이 붉은색 일색인 중국식당이 즐비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중국에도 없는 중국음식을 먹고, 식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두세 시간을 둘러보다 귀가한다.

도시계획에 의해 잘 정비된 이곳은 그러나 누군가에겐 영화 세트장 이거나 디즈니랜드의 중국관과 같다. 거리는 호객하는 상인들로 소란하고, 몇 군데 좌판에서 월병이나 포춘 쿠키를 팔지만 이곳은 결국 차이나타운이 아니다. 잘 관리된 관광지, 박제된 상품일 뿐, 무엇보다 이곳에서 길을 잃기란 불가능하다.

차이나타운은 어쩌면 지도에도 없는 심리적 공간이다. 일몰이 다가오자 거리의 홍등이 하나둘씩 켜진다. 해골같이 삐쩍 마른 노인이 계단 아래에 앉아 궐련을 핀다. 그의 이름은 루, 후난성 출신이다. 지난 세기초 금광 노역자로 일하기 위해 화물선을 탔다. 12명의 아이를 낳았고, 32명의 조손을 두었지만 그는 아직 살아있다.  

차이나타운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거래된다. 청경채와 곰발바닥, 정체 모를 한약재와 물개의 신(腎), 거북이 등껍질과 마릴린의 밀랍인형도 이곳에 있다. 마릴린 옆에는 마오의 모자를 쓴 거리의 여인이 앉아있다. 곱상하게 생긴 사내가 지나갈 때 다리를 벌려 왼쪽 허벅지의 마오 문신을 슬쩍 보여준다. 그녀는 악명 높은 사디스트. 사전에 합의하는 게임의 규칙 따윈 없다.

이곳에는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둘 밖에 없다. 그것을 구분하려면 루처럼 오래 살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곳에서 물건을 사면, 이곳의 냄새까지 덤으로 가져간다. 오랜 시간의 더께가 배어있는 그 냄새를,  그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

그것은 밑바닥의 냄새 혹은 썩거나 발효되는 냄새와 흡사한데, 그 연원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 냄새와 함께 차이나타운은 시작되었고 그것과 더불어 삶은 매 순간 넘쳐났다. 도처에 삶 아닌 것이 없다. 간혹 홍등의 골목 너머 깊게 파인 어둠이 잠복하지만,  그것 또한 삶이다. 치정과 불륜, 폭력과 살인, 마약과 조직, 매춘과 도박 또한 그 삶의 배경이자 플롯일 뿐이다.

늘어진 주발을 헤치고 식당으로 들어가면 루의 아들이 밥을 먹는다. 몸에서 흐른 땀으로 그의 러닝 셔츠는 이미 흥건하다. 그에게 하나의 철칙이 있다면 혼밥을 하지 않는 것. 혈통은 매우 완고하여 그는 슬하의 모든 비속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그중 일부는 큰소리로 무언가를 떠들고, 일부는 연신 폭소를 터트리고, 나머지는 사정없이 음식을 집어삼킨다. 그러다가 돌연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비명처럼 거리를 질주한다.

운이 나쁘면 죽거나 운이 좋으면 살아남으리. 언젠가 루가 개봉한 포춘 쿠키에 쓰인 말이다. 이 문장이 그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 그가 받은 한 세기 분량의 모욕과 멸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오래 살아야 존경을 받는다. 그는 혼자 중얼거린다.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곳의 삶은 위생 처리되기 이전의 것.  그래서 차이나타운은 보통 미스터리 거나 스릴러 지만, 간혹 낭만적인 당신에겐 멜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장르의  본질은 결국 누아르에 닿아있다. 이곳에 들어오면 같은 곳으로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하다. 구절양장, 이 미로의 한 복판에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는다. 길을 잃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곳. 차이나타운은 그런 곳이다.

차이나타운엔 언제나 최고의 요리가 있다. 최상품의 양귀비도 이곳에 있다. 진실은 가끔씩 드러나지만 대부분은 영원히 은폐된다. 사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의라던가 공정 따위의 말들은 마피아들의 언어다. 대신 하류의 삶도 허접한 사랑도 차이나타운에선 멜로가 된다. 치명적 사랑은 종종 예고 없이 실종된다. 사랑이 없는 욕망을 누아르라고 부른다면, 차이나타운에서 누아르는 언제나 차고 넘친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잃고 깊은 시름에 빠져, 실연에 대처하는 열두 가지 방법을 찾고 있다면, 영화 ‘차이나타운’을 강추한다. 눈동자 자체가 누아르를 닮은 잭 니콜슨, 예기치 않은 애인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그에게 누군가 어깨를 치며 툭 한마디 던진다.

Forget it Jake, it’s Chinatown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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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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