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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J Apr 24. 2020

이름 없는 행장

서양 신문에는 오비추어리 (obituary) 란이 있다. 우리의 부고 (訃告), 조사 (弔詞), 행장 (行狀)과도 좀 다른데, 아마도 ‘사망 기사’ 정도가 'obituary’에 가장 근접한 우리말이 아닐까 싶다.

사망 기사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 간 사람의 생몰 기간과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이 담겨있다. 보통 고인의 자녀가 그것을 쓰지만 생전에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 정서와는 좀 다르나 간혹 기르던 반려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있다.

남이 작성한 글의 내용은 대부분 엇비슷하다. 고인의 고매한 인격을 치켜세우거나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추억과 회고담이 주를 이룬다. 반면, 자신이 직접 쓴 글에는 본인의 삶 혹은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언뜻 드러난다.

끝’, ‘에드워드 죽다’, ‘사는 거 그리 나쁘지 않았어’, ‘대체로 좋았어. 성깔 있는 둘째 며느리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었을 텐데’. ‘클린턴과 트럼프 중 한 명을 찍어야 한다고? 젠장, 차라리 투표하기 전에 죽는 게 낫지’. 짧건 길건 간에 부고기사를 스스로 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었으리. 가벼운 농담으로 몇 줄 기사를 채운 이는 세상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K가 생각난다.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제일 먼저 사망기사를 찾아 본다는 그. 자신의 기사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농담이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의 농담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 지구적 재난은 슈퍼파워 미국도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현재까지 집계된 사망자 수만 46,000명 이상. 평소 한 면 남짓했던 일간지의 사망기사 지면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10개 면 이상으로 늘어났다.

뉴욕 하트(Hart) 섬은 이미 거대한 '코로나 무덤'으로 변했다. 드론으로 촬영한 무연고자 시신 매장 장면은
차라리 엽기에 가깝다. 살아생전 가난으로 고통받았고, 죽어서까지 최소한의 품위마저 지킬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한 줄의 사망기사를 남길 여유도, 자신들을 기억해 줄 그 누구도 없었으니 죽음마저도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내용과 사연을 담고 있을까. 그것들이 과연 이미 몰한 자를 추억하고, 유가족과 지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우연히 태어나 잠시 부유하다 결국 사라질지라도, 세상에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큼 좋은 것은 아마도 없으리. 몇 줄 생전의 행장을 적지 않으면 어떠한가. 그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아무도 읽지 않으면 또 어떠리. 오늘 우리는 살아있고, 내일도 그럴 수 있기를.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옴 마니 반 메훔!

#옴마니 반메 훔
#obit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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