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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07. 2021

채도와 대조를 상실해가는 오후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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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4일의 산책-



묽은 흰색 수채화 물감으로 슥- 그어 만든 구름이 옅은 푸른색 하늘에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사계절 내내 면적의 변동이 없는 하늘을, 강은 부러워했다. 강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지만 착실한 물그릇이었다. 가을 가뭄과 싸우면서도 철새들을 위한 여력은 꼭 쥐고 있었으니까. 그 강에서 오리들은 물거품을 일으키며 수영하고 잠수했다. 머리가 갈색인 흰죽지도 왔고 푸른 색인 청둥오리도 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은색, 회색 오리들도 있었다. 백조라고도 하는 고니 몇 마리도 떠다녔다.


우리 동네의 강은 기득권과 토건업자들의 삽자루를 비껴간 곳이다. 강의 복판엔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인 하중도가 여럿이며, 여름엔 숨고 겨울엔 드러나는 모래톱도 있고, 산발 같은 흙빛 갈대밭이 푸근하게 펼쳐져 있다.


오늘은 오후 4시 40분에 산책로에 도착했다. 짧은 해가 도시의 실루엣에 걸린 시간이었다. 하루의 마지막 햇살은 낮은 아파트의 꼭대기 창문을 주황색 발광체로 만들었다. 조도가 낮아질수록 산책로, 갈대, 강물, 모래톱, 하중도, 멀리 보이는 단풍 산들의 그림자가 일제히 흐려졌다. 그늘진 곳이 없으니 눈앞의 풍경이 트였다. 산책로 옆 갈대밭은 영토 확장을 한 듯 넓어 보였다. 채도와 대조를 상실해가는 오후 5시의 공원은 자신의 원래 색을 드러내는 팝업 전시장이었다. 빛과 그림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연이 제 빛깔을 온전히 내보이는 시간은 하루 중 불과 일이십 분. 자기소개를 매일같이 절제하는 자연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신비의 대상으로 건재하다.


산책하러 왔다가 때아닌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키 큰 나무의 왼편에 앉은 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내 주먹보다 작은 생명이었다. 새는 나더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래를 부를 테니 너는 노래 가사를 받아 적어라" 내가 완성한 답안은 이랬다. "찌르르, 짹짹짹, 삑- 삑- 짹짹, 찌르르르르-" 출제자는 내 답안을 보더니 꼬리를 탁탁 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답이란다. 우수한 문자인 한글로도 작은 새의 노래를 고스란히 표현하기란 버거웠다.


꽥꽥 거리는 소리가 떠들썩해서 보니 오리 떼가 상당히 가까이 와 있었다. 오리들은 어쩜 저렇게 당당한지. 저 목소리에는 비굴함이나 가식, 두려움 같은 불순물이 없다. 고니 세 마리는 멀리서 중후한 관악기 소리를 냈는데 높은 음에선 소리가 약간 갈라지는 게 멋스러웠다. 계이름은 '라, 라 플랫, 파' 정도였고 의성어로 받아써보자면 '뿍-뿍-'과 비슷했다. 단음을 짧게 내거나 '라 플랫-파-파'로 구성된 마디를 노래하기도 했다. 셋은 강 왼쪽으로 스르르 이동하며 뿍뿍거리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백조들의 이야기가 수십 미터 떨어진 나에게까지 들렸다. 새들은 귓속말이라는 걸 모르나 보다. 아니면 숨길 게 없거나.


공원 한쪽엔 시민들을 위한 운동기구가 있다. 몇 사람이 운동 중이었는데 발로 밀어서 몸을 들어 올리는 운동기구에 녹이 슬었는지 삑삑 소리가 났다. 고니와 운동기구는 뿍뿍 삑삑 소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신이 만든 것과 인간이 만든 것의 싸이퍼*였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고 산책 나온 강아지도 많았다. 강아지들은 하나같이 신이 나 있었다. 어떤 강아지는 주인의 만류를 따돌리고 레이싱 카처럼 내 쪽으로 질주하더니 나와 충돌하거나 나에게 안기는 대신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쌩 지나갔다. 즐거움의 가속이 붙을 대로 붙은 사랑스런 생명체였다.


모든 생명들이 다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내 얼굴 높이에 딱 맞춰서 떼로 부유하던 좁쌀 크기의 벌레들이 그러했다. 그런 무리가 서넛이나 되었다. 왜 하필 내가 걷는 산책 경로에서 비행을 해야 되느냔 말이다. 공중 부양한 벌레 뭉치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질색했다. 그렇다고 살충제를 사서 걔들에게 발사하진 않았다. 그럴 정열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들은 내 보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해충이 아닌 이 공원의 토박이였다. 자기 몸의 천육백 배가 넘는 고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떠 있는 경이로운 주민들. 왜 우리 비행을 하필 훼방놓느냐는 말을 이방인인 내가 들어야 했다.


수전 손택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자연 그 자체, 곧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하여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실이 어떻게 펼쳐지고 충만한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깊이 있게 한다."**

10 , 중장비를 동원한 사람들은 자연이 인간을 깊이 자극하는 일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강바닥만 깊이 파헤쳤다. 삽을  그들에겐, 물과 미생물과 곤충과 물고기와 새의 지지대였던 모래가, 제거해야  불순물이나 시멘트의 재료로 보였나 보다.  막히게 아름다웠던 강과 그곳에서 살던 생명들의 숨이 막혔다.  눈앞의 정돈되지 않은 아름다운 강을 응시하면,   너머의 , 정돈을 구실로 칼에 찔린  개의 강들이 떠오른다.


5시 15분쯤 되자 흰색이 많이 섞인 오렌지색 빛이 공중에 콕콕콕 찍혔다. 은근한 어둠 속에서 반짝,하고 눈을 뜬 밝음이 퍽 어여뻤다. 가로등의 빛은 어두워져가는 것들을 물리치며 주인공인 양 낭랑해졌다. 그럴지라도 이 공원의 주인공은 강이다. 모래이다. 곤충과 새와 풀과 나무와 하늘과 산이다. 가로등은 그 주인공들을 비추는 조명일 뿐이다.







*. 힙합 용어로서의 싸이퍼 : Cypher. 거리에서 랩으로 대화를 나누는 힙합의 놀이문화.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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