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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Jan 13. 2021

일시정지를 눌러 놓고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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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4일의 산책-


시간이 남아돌아서 산책하는 편은 아니다. 운동화를 신으려면 쓰고 싶은 글, 그리고 싶은 그림, 욕심부려 대출한 수북한 책들에 눈 감아야 한다. 언제나 미완성인 집안 일과 아이들의 네버 엔딩 요구들에 일시정지를 눌러 놓고 밖으로 나간다. 그것들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잠깐이라도 산책한다. 승모근에 들러붙은 일감들을 털어버리듯 팔을 흔들며 요란스레 걷는다. 그러다 보면 어깨에 있던 짐 덩어리들은 떨어져 나가고 무게감 없는 귀여운 흙 알갱이와 마른 잔디 동강이들만 발목에 달라붙는다. 산책은 숨 막히는 일상에게 내가 처방하는 산소호흡기다.


아이들이 유아였을 땐 이런 잠깐의 심호흡도 어려웠으나 이제는 가능하다. 마침내 누리게 된 자유 한 조각이다. 그러나 노동을 잠시도 끊어내지 못하는 이웃들이 여전히 많다. 노동에 눌리다 못해 물리적으로 압사되는 사람들도 있다. 집에서는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치우느라 차분히 떠올리지 못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걷다 보면 생각난다. 오죽 갈 곳이 없으면 낯선 나에게까지 걸어왔을까. 환대할 수밖에 없는 고단한 손님들을 마음속으로 맞이한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말했다. "걷기에 대한 이야기는 부득불 다른 화제들로 걸어들어간다."


허공에서 물수제비를 하듯 통통거리며 날고 있는 저 작은 새는 무엇일까. 공중에서 통-하고 튀어 오를 때마다 삑-하고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돌쟁이 아가들의 삑삑이 신발이 새가 되어, 하늘에 놓인 투명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뛰어넘는 중인가 보다.

털이 검고 부리가 불그스름한 큰 새 세 마리는 작은 새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휘적 휘적 날았다. 흑고니인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의 활이 일제히 올라가고 내려가듯, 큰 새들의 날갯짓은 똑같은 방향과 박자로 구성돼 있었다. 쭉 쭉 날아가는 모습에서 "공중을 깨며 부리를 벼린 새"*라는 시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새의 비행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겨울나무를 보는 즐거움도 있다. 무질서하면서도 질서 있게 뻗은 가지들은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다. 가지가 마구 겹쳐 있는 부분에선 절대 풀 수 없는 미로 같다가도, 가지 끝이 몽땅 출구가 되어버리는 싱거운 미로 같기도 하다. 겨울나무는 기능적으로도 마음에 든다. 가지에 앉아있는 새들을 나뭇잎으로 숨기지 않으니까. 나무에  앉아있는 새들과 눈을 맞추는 게 좋다. 내가 새들의 이름을 잘 모르는 건 답답하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조류 도감을 읽어봐야겠어,라고 신용 없는 다짐을 해버렸다.






-2020년 12월 8일의 산책-


전봇대 그림자나 아파트 그림자를 주민들과 공유하는 대신, 갈대 줄기를 닮은 산책길과 햇빛 뭉텅이를 산책객들과 공유하는 쪽이 즐겁다. 기온과 산책객의 수는 꼭 비례하진 않나 보다. 오늘은 추워졌는데도 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모두 모르는 사람이지만 모두가 산책 친구들이었다. 


겨울 햇살이 종아리를 데워서 다리가 따끔따끔했다. 햇빛은 내 모자챙에 걸려 튕겨나갔다가도 걷는 리듬에 따라 챙의 각도가 살짝 변할라치면 어김없이 후다닥 날아와 내 눈을 콕 찔렀다. 맑은 산책길에서 햇빛을 잔뜩 먹었는데 이상하게 허기가 졌다. 연한 된장국 색의 푹신한 잔디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우리 집의 반대 방향으로 작은 새가 째잭- 째잭- 하며 날아갔다. 잠깐 돌아서서 멀어지는 새를 보다가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나는 집으로 가야 했다. 좀 있으면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남편도 밥 먹으러 오고 나도 집에서 할 일이 많으니까. 그렇지만 내 마음은 저 새가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 박준, 「우리의 허언들만이」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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