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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11. 2024

(어른 동화) 신발 상자 이야기

고양이는 위대하다 

처음 종이 공장에서 싱싱하고 각이 살아 있는 멋진 상자로 태어나 

일생 동안 새 신발을 품고 신발 가게의 한 모퉁이를 지키며 살아온 신발 상자 왕자님은 

어느날 낯모르는 사람에게 이끌려 택배차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아야, 아프다고 하기 전에 택배차 문은 쾅 닫히고 어둠 속에 들리는 건 드렁드렁 제멋대로 굴러가는 

바퀴 소리였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요. 


갑작스레 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내던진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아까의 아픔이 생각나서 움찔 몸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아주 가만히 바퀴달린 수레에 열을 맞추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넌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니?" 옆 상자에게 말을 붙여 보았습니다. 옆 상자는 '예산 사과'라고 써진 문구와 예쁜 사과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우린 죽으러 가는 거야."

사과 상자가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할 일은 끝났어. 좀 있으면 우리 몸은 접혀서 끝장나는 거야. 냄새 나는 쓰레기장으로 갔다가 불로 태워지겠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수레가 멈추고 사과 상자가 먼저 내렸습니다. "종이 나라에서 보세." 상자가 담담히 말했습니다. 

"종이 나라? 거기가 어딘데?"

신발 상자가 다급히 물었습니다. 

"종이가 죽으면 만나는 곳이야. 거기서 우리는 자기가 되고 싶은 모양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즐겁게 살아가."

인사도 제대로 할 겨를 없이 종이 상자는 엘리베이터에 태워졌습니다. 


1014호. 

인터폰 소리와 함께 신발 상자는 차가운 땅에 내려졌습니다. 멀어져가는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을 살그머니 감싸는 여자의 손이 느껴졌습니다. 


"자기 신발 왔다!"

여자는 집 안 누군가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신발 상자는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네 할 일은 끝났어. 이제는 내가 주인공이야."

흰 운동화가 말했습니다. 

"네가 태어난 건 나를 감싸고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이제 난 내 주인에게 쓸모를 다 할 거고 넌 쓸모가 없어졌어."


그 말을 듣자 불현듯 화가 치밀었습니다. 

"지금껏 널 돌봐준 게 누군데 고맙다는 소리는 못 하고 지금 이게 무슨 막말이야?"

"내가 왜 고마워해야 하지?"

흰 운동화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됐다. 말을 말자."

신발 상자는 입을 닫고 긴 침묵에 빠졌습니다. 어차피 이제 곧 죽을 텐데 소모적인 일로 에너지를 낭비하기 싫었습니다. 


운동화의 말대로 남자와 여자의 시선은 온통 흰 운동화에게만 쏠려 있었습니다. 남자가 운동화 끈을 매고 여자에게 발을 내보였습니다. 

"딱 맞는다. 어때?"

"말해 뭐해. 자기는 뭘 신어도 빛나."

"고마워!"


이제 버려지는구나.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뭔가가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네 발달린 그 무엇인가가. 

두 개의 쫑긋하고 세모난 귀와 왕방울만한 큰 눈, 수염이 있었습니다.

고양이였습니다.

 

종이상자는 무서워서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고, 무거워!"

갑자기 몸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양이가 상자 안에 들어와 앉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와하하!"

"깔깔깔!"

남자와 여자는 종이 상자 안에 들어앉은 고양이를 보고 숨이 넘어가게 웃었습니다. 


"쟤는 왜 저렇게 상자를 좋아할까."

"고양이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

"에휴. 상자는 방에다 넣어놔야겠다. 애옹이 숨숨집으로 쓰게."

"도대체 집에 상자가 몇 개야."


 


"애옹님. 저를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오늘도 종이 상자는 고양이에게 이야기합니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말라옹. 난 그냥 상자가 좋아서 앉았던 것 뿐이라옹."

고양이는 새침하게 대답합니다. 

그러면서도 늘 밤만 되면 하루도 빠짐 없이 종이 상자에게 다가옵니다.

그동안 이사를 몇 번 했는데도 종이 상자는 가족과 늘 함께였습니다.  

고양이가 이 종이 상자를 아주 좋아해서 주인은 상자를 버릴 수가 없었어요. 


"나는 이 얄팍한 종이가 제일 좋다옹. 그럼 오늘도 꿀잠 부탁한다옹."

고양이의 따스한 온기에 종이 상자도 솔솔 눈이 감깁니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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