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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02. 2023

다시는 5성급 호텔에서 조식 못 먹을 것 같은 이유

결혼 20주년 기념여행 마지막 날 깨달은 사실

평소라면 일어나지 않을 새벽 시간.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눈이 떠졌다.  


'조식이 기다리고 있다....'


호텔에 결제한 금액 중 5분의 1이 조식 비용이었기에 우리에겐 상당히 중요한 일정이었다. 창가가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여유 있게 먹으려면 일찍 나서야만 했다. 그래도 눈곱은 떼고 가야겠기에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픈 시간보다 삼십 분 늦게 도착했을 뿐인데도 이미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한 요리사들과 그릇을 정리하러 다니는 직원들, 식사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여행객들로 활기차 보였다. 우리는 마침 비어있던 창가 쪽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통유리창 너머로 비에 젖은 야자수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는 위치였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였기에 조금이라도 여행지의 풍경을 느끼며 식사를 하고 싶었다. 


음식을 고르는 원칙은 하나였다.

집에서 자주 먹지 않는 음식이거나 비싼 식재료일 것.


첫 접시에  담을 요리로 남편은 스테이크를, 나는 해산물찜을 선택했다. 즉석에서 해주는 요리여서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이런 음식이야말로 비싼 식재료니 꼭 먹어야 했다. 두 번째 에그베네딕트와 단호박 수프, 몇 가지 종류의 샐러드를 담아 왔다. 브런치 스타일의 구성이었다.


에그베네딕트를 나이프로 썰고 샐러드와 수프를 적절히 조합해 가며 절반 가량 먹었을 즈음. 속이 부대끼 시작했다. 국물음식이 필요했다. 미역국과 된장국을 좋아하지만 여기엔 안 어울릴 것 같아 베트남 쌀국수를 한 그릇 챙겨 왔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다 먹어갈 즈음 내 머릿속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다. 


'배 부른데 어떡하지?'

'이제 그만 먹을까?'

'얼마 정도의 금액만큼 먹었을까?'


사실 나는 뷔페 음식을 즐기기엔 매우 가성비가 떨어지는 식성과 위장고 있다. 결혼식장에 가면 잡채나 메밀국수 같은 면을 꼭 먹고, 떡볶이나 피자 같은 밀가루 음식이 있다면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폭식을 즐기던 20대 때보다 위장도 작아졌으면서 평소에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평소의 식성을 자제하리라 마음먹고 처음부터 해물찜을 선택했으나, 결국 두 접시 이상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일어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래 봤자 사과나 삶은 계란 한 두 개 먹으면 포만감을 느끼는 나로선 이미 먹은 음식만으로도 과식한 셈이었지만 '조식을 먹기 위해 방문한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소식 따위는 허락할 수 없다'는 자기 검열이 작동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귤잼이 들어간 요구르트와 모닝빵, 스콘, 오메기떡과 과일 몇 조각을 추가로 가져왔다. 바리스타가 주문 후 내려주는 카페라테도 챙겼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에서 먹기엔 과한 디저트였지만, 음식을 먹다가 남기는 것이야말로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평생을 가난한 목수이자 농부로 살았던 아버지는 그릇에 밥알 한 톨 남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그런 영향 때문에 먹을 만큼만 차려서 먹고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떡, 빵, 사과, 커피.... 결국 평소에도 자주 먹는 것들...


최선을 다해 디저트를 비우고 나니 음식이 목구멍까지 찬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비어있을 위장에 너무 많은 음식을 욱여넣은 탓이었다.


비용 대비 먹는 양의 경제적 측면을 따지자면, 처음부터 호텔 조식을 선택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가고 싶었던 생애최초 해외여행을 포기한 데다 이 호텔에서의 숙박도 3박에서 1박으로 줄였고, 결혼 20주년이니 한 번쯤은 비싼 아침식사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식을 예약했었다. 그런데 막상 식사를 하고 보니 호텔에 지불한 비용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내가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사 먹었으면 훨씬 돈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이런 후회가 무슨 소용인가. 이미 돈은 지불했고, 음식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데. 다시는 먹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를 식사를 45년 인생에 처음 했으니 그리 큰 사치를 부린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늘 익숙한 방식의 여행도 좋지만, 진짜 여행의 묘미는 새롭고 낯선 경험에서 오는 법이니까. 나는 남편과 새로운 식사 경험을 즐겼다는데 위안을 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날 점심을 거르고 오후 비행기를 탔다. 1시 비행기라 공항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인 데다 배도 전혀 고프지 않았다. 집에 도착 후 남편은 약속이 있어 나가고 나는 짐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배가 알싸한 느낌이 났다. 생애최초 5성급 호텔 조식을 먹은 것이  대장에게는 큰 사건인 모양이었다.




어딘가로 떠나고는 싶지만 돈이 없던 시절, 혼자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경기북부 외곽의 끝에 자리한 산에 간 적이 있다. 초행길이라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데 마주 오던 등산객이 조금만 더 가면 토끼를 볼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산에 사는 토끼라면 야생일 테니 등산객이 오고 가는 발걸음에 놀라 도망갔겠지 싶어 서두르지 않고 오르막을 올랐다.


몇 분쯤 걸어가자 낮은 나무와 풀이 무성한 산비탈 오른쪽으로 갈색 덩어리 같은 게 보였다. 설마 했는데 등산객이 말한 토끼가 정말로 있었다. 제법 덩치가 큰 토끼였다.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까이 걸어가 보았더니 녀석은 입을 오물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먹는 중이었다. 음? 저게 뭐지? 처음에 나는 눈을 의심했다. 토끼에겐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야생토끼답지 않게 뚱뚱한 녀석이 먹고 있는 건, 새우깡이었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 사람이 준 과자를 먹는 게 처음이 아닌 듯했다. 풀을 먹고살아야 할 토끼가 튀긴 밀가루 반죽에 각종 양념과 합성 조미료가 뒤섞인 과자를 먹다니. 사람의 음식에 길들여진 토끼가 과연 숲에서 토끼답게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5성급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배탈이 난 내 모습이 마치 새우깡을 먹던 그 산토끼처럼 느껴졌다.




인간이 본래 육식을 하기에 적합지 않은 치아와 소화 기관을 갖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수렵과 채집을 거쳐 곡류와 뿌리채소를 주식으로 삼아 생존해 온 인류가 지금처 육식을 자주 하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 공장식 축산업이 발달하면서부터다. 우리가 하루에 세끼를 먹는 것도 20세기 중반 녹색혁명 이전엔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신체의 진화 속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다양한 음식을, 그것도 많이 먹어치운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난 후 곧바로 디저트를 곁들여 차를 마시거나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저녁을 먹고 나서 야식을 먹기도 한다. 생존과 노동에 필요한 영양소와 칼로리 이상으로 많은 음식을 섭취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각종 성인병이나 심장질환, 암 등 현대 인류가 겪는 수많은 질병들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기는 것들이다. 그러니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식당에 내려가 몇 접시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토끼가 새우깡을 먹는 것만큼이나 비상식적이다.


농부이자 엄격한 채식인으로서 백 세까지 건강한 삶을 살다가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한 미국의 사회주의자 스캇 니어링과 53년 동안 함께 땅을 일구며 건강한 식사법을 지킨 부인 헬렌 니어링의 삶을 들여다보면, 잘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최대한 많은 종류의 음식을, 최대한 많이 먹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헬렌은 음식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에서 이런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


헬렌은 식사를 간단히 하는 대신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음식은 배가 고플 때 먹고, 적당히 부르면 그만 먹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와 함께.




호텔에서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진열해 두고 골라먹는 행위는 그런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헬렌 니어링의 충고에 따르면 쓸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을 쓰고,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데 또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더구나 인간의 뇌는 너무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효율성이 떨어진다. 스티브 잡스가 선택의 시간을 줄이고 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검은색 티와 청바지만 입은 이유이기도 하다.


자, 그렇다면 '5성급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 행위'를 주관적 경험과 생물학적 지식을 조합해 개인적으로 정의 내려보면, '시간을 소모하고, 뇌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신체에 과도한 영양을 주입함으로써 건강까지 해치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데 굳이 자기 돈까지 쓰는 일'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나처럼 더 먹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나 더 먹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질 사람들에게는 매우 권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먹어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터(5성급 호텔에서 욕심내서 조식 먹으면 *똥 싼다는 사실). 호텔 조식을 위해 지불한 비용은 단순한 음식값이 아니라 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해 보는 '경험비용'으로 처리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이것은 경험 가치에 투자하는 비용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인풋 대비 아웃풋의 결과물이 명확지 않다는 점 때문에 매우 쓸모없는 소비로 보일 수도 있다. 


결혼 20주년 기념여행을 위해 쓴 비용만 따져보아도 우리 가족이 한 달은 풍족히 먹고도 남을 식비와 생활비를 겨우 4일 만에 지출하였으니 매우 비경제적인 낭비를 한 셈이다. 하지만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행복은 가까운 사람과의 좋은 관계이고, 나는 이를 위해 우리가 큰 투자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은 우리가 함께 할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화폐 가치로만 평가하기엔 모호한 측면이 있다. 


물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거나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꼭 여행을 가거나 비싼 음식을 먹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론 집 앞을 잠깐 산책하거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수많은 철학자나 작가들이 여행을 예찬했던 이유,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통한 감각과 인식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여행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결혼 30주년엔 생애최초 해외여행 경험담으로 돌아오고 싶다...).   



출처

-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 디자인하우스

- 한겨레 21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397.html

“사자도 동물 먹잖아” vs “인간은 이성적 선택 가능”… 비건 논쟁 총정리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032165&code=11171377&cp=nv “삼시 세끼와 섭식행동”

-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804/114816537/1 “육식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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