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5 두 번째
오늘, 그러니까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신승철 1주기 추모(축)제 준비 회의를 이어가고 있다. 연구소는 얼마 전에 이사를 했는데 문래동을 떠나 온 신길동이 낯설지만 설렌다. 고양이들이 벌써 적응이 됐는지 이곳저곳 디비지며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래도 얼굴 본 지 몇 년이 넘어가니 오늘은 무릎에도 와주시고 갸르릉도 해주시고 아주 영광이다.
신 샘의 장례식에 가던 길 추모제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새벽에 꺼냈던 말을 하나의 계기로 추모제를 만들어가고/만들어가려 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어디부터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하지만, 곳곳에서 나타난 얼굴과 건네준 손길이 있어 먹먹하지는 않다.
저번 회의에서 추모제 이름을 지었다. ‘떡갈나무 혁명’, ‘생태적 지혜’, ‘전환은 빠르게 삶은 느리게’ 등 여러 쟁쟁한 후보가 경합했지만, 모두 마땅치가 않았다. 고민하다가 ‘국지적 절대성’이라는 낯설고도 험난한 개념이 나왔다.
곱씹어도 도무지 모르겠을 이 말은 신 샘이 평소 애용하던 집순이 철학의 핫 키워드인데. 지혜가 먼 곳에 있지 않고 지역에, 동네에, 우리 곁에 “지금, 여기, 가까이” 있다는 뜻이란다. 이어지는 개념어로 ‘범위한정기술’도 있다. 무한한 확장이 아닌, 유한한 나의 반경과 공간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의 중요함과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지 싶다. 불교의 수처작주(隨處作主)처럼 진리를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지금 여기 옆에서 살피자는 뜻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름다운 뜻을 뒤로 하고 보면, 지금 여기 가까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길은 매번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 점에서 신 샘의 말은 조금 막막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추모(축)제를 준비하면서 이 말이 조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 같다. 자리가 만들어져가는 준비 과정은 완벽하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지만, 흙을 주물러 도자기를 빚는 것처럼 천천히 흐물흐물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다. 신 샘과 연구소와 연결된 거진 서른 분의 정성과 기여로 천천히 익어간다. 그 감사함을 되새기며 내일 아침은 충만하게 일어나고 싶어졌다.
“아침이 늘 올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색다른 아침을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승철(2017),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