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한 마음이, 당신에게도 찾아온다면.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의 글을 읽고 적은 글 2

by 팥앙금

누구나 목소리를 지녔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이 거세된 이들이 존재한다. 청각장애로 인하여 말하지 못하는 언어장애가 있는 장애인. 우리는 그들을 ‘농아(聾啞)’라 부른다. 말은 ‘마알’에서 생겼다. ‘마알’은 ‘마음의 알갱이’가 축약된 단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타인의 말에 상처받고 때로 위로받는다. 말이 곧 상대의 마음이라 믿기 때문이다.

농아인은 말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듣지 못한다. 대다수인 ‘우리’가 듣지 못하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장애를 부여했고 그들을 안전하게(‘누구’의 안전인가) 가둬버렸다. 이십대의 나는 목소리 잃은 이 인어들의 섬을 막연히 ‘농아’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날의 공고를 보지 않았더라면.

대학에 가자 1~2학년 때 바지런히 봉사활동 점수를 채워 두라고 선배들이 말했다. 고학년이 되면 도서관 좀비가 된다며. 그날도 습관적으로 PC 스크롤을 내렸다. ‘어디 편하게 놀면서 채울 수 있는 데 없나?’ 이내 맨 하단에 깜박이는 배너. 하……. 헛웃음이 나왔다. 자세를 바로 하고 프랭클린 플래너를 꺼내 빨간 펜으로 면접 일에 동그라미를 쳤다.

아직도 그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비가 내렸고 마을버스는 끝도 없이 올라갔다. ‘그분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다니지?’ 보기만 해도 아득했다. 도착하니 면접자 몇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 어색한 듯 애꿎은 과자봉지만 뜯고 있었다. 곧 담당자가 왔고 간단히 기관소개를 한 뒤 타이핑한 원고를 주었다. 각자 내용은 달랐는데 나는 <요통이 근골격계에 미치는 영향>을 받았다. 10분 줄 테니 연습하고 호출하면 부스로 오라고 했다. 마치 언론고시 최종 면접만 남겨 둔 지원자 1번이 된 것 같았다. 나름 학창시절 방송 반 경험을 살려 끊어 읽기를 미리 표시하고 강세도 점찍어두었다.

드디어 부스. 일러준 대로 카세트테이프에 공테이프를 넣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큐 사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 줄씩 천천히 읽어 나갔다. 지렁이 같던 글들이 낭독으로 다림질한 듯 빳빳하게 펴졌다. 그저 당연한 줄 알았던 목소리가 눈이 닫힌 그들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 주었다. 순간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마음 졸이며 자주 서성이는 내가 보였다. 그들도 매주 그렇게 설레면서 이 녹음테이프를 받아보겠구나. 눈을 감은 채 어떠한 방해도 없이 자기만의 방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가겠지. 어느덧 내 목소리는 헬륨 풍선이 되어 둥실둥실 녹음실 안을 떠다녔다. 한번 쏘아 올린 난장이의 작은 목소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아무도 없는 네모 박스는 그렇게 매일 서로 다른 목소리로 채워졌고, 그들은 성실하게 각자 목소리의 빗장을 풀었다. 그 섬의 또 다른 이름은 ‘맹인’이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읽지 못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읽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알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목소리를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목소리를 지녔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잘 보지 못한다. 화자(speaker)의 위치에 따라 목소리는 잘 들리기도 하고 아예 묻히기도 하니까. 생각해보면 서로의 소리가 활동하는 음역대가 다를 뿐인데.

이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소리의 주파수를 한번 낮춰보면 어떨까. 살다가 목소리를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머뭇대며 버튼을 돌리다 보면 처음 들어보는 어떤 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주파수를 조금만 더 낮춰 보려는 그 선한 마음이, 당신에게도 찾아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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