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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Mar 16. 2018

스페란차에서의 절대고독

-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살아오는 동안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은 책이 있지 않나요? 까마득한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만화책과 추리소설, 위인전부터 어른이 되어 가는 중에 본 사상서 등등 중에 말입니다.


제겐 투르니에의 이 소설이 그러합니다.  서가에 있는 책을 뽑아 보았습니다

1995년 민음사 번역판본입니다.

표지가 좀 바랬어요. 좋은 구절들이 나오면 저는 책 귀퉁이를 접어 놓는데, 이 책은 유난히 많이 접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다시 보니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전에는 '방드르디'라는 등장인물에 집중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끝'이라는 단어가 더 눈에 띄는군요. 아마도 당시에는 '이야기' 위주로 책을 읽었고, 지금은 그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의 의미가 먼저 상기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이 '끝'으로 번역된 불어는 'Limbes'입니다. 이 단어에는 '고성소'라는 의미도 있지요. 고성소는 예수 생전에 나서 그를 알지 못하고 죽었지만 선량한 자들이 처한 장소를 말합니다.)

  

사실, 저 '끝'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절체절명의 삶이라는 간곡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절체절명의 삶일까요? 이 소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건 '혼자 있는 삶'입니다. '타인 없는 세상'이지요. 로빈슨이 난파하여 다다른 그 타인 없는 세상, 즉 스페란차 섬 말입니다. 그게 '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설명한 바를 보시면 이 소설을 모르는 분이라도 '아, 이거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 소설이 바로 투르니에의 이 소설 원작이지요. 그러니까 투르니에는 다니엘 디포의 그 '모험소설'을 각색한 겁니다. 그러나 읽어 보시면 대번에 느끼시겠지만,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디포의 소설이 무인도에 표류한 한 영국인의 고난 극복기라면, 투르니에의 이 책은 바로 '철학소설'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좌)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1719년 초판본 속표지, (중) 미셀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1967년 초판본 겉표지, (우) 미셸 투르니에의 모습

투르니에 자신이 프랑스 소르본 대학과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수자격시험에 실패하는 바람에 학계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문수학했던 푸코와 들뢰즈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니 철학교수 아닌 철학자, 또는 그들보다 더 탁월한 철학의 예술가라고 부를 만합니다. 특히 질 들뢰즈(1925-1995)는 투르니에의 이 소설을 가지고 아주 뛰어난 한 편의 '아름다운 논문'(<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을 썼습니다. 이 논문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우선 제가 이 소설에 매료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첫 구절 때문입니다.


납덩이 추를 매단 끈처럼 팽팽하게 선실의 천장에 달린 현등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점점 더 깊어지는 파도에 휩쓸린 '버지니아호'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기울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피터 반 데셀 선장은 아랫배 위로 몸을 기울이면서 로빈슨에게 타로 카드를 내밀었다.


난파하기 직전, 버지니아호 선장실의 모습입니다. 이 첫 구절에 등장하는 '현등'은 배가 난파하는 그 순간까지 '팽팽하게' 그리고 '흔들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현등이라는 물체가 이 선장실 시퀀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모든 오브제들의 움직임을 압도합니다. 역반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현등은 선장이 카드를 내미는 그 '수평의' 운동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 운동을 덮치고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다른 구절을 보시죠.


은근한 충격을 받아 배가 요동치는 한편 현등은 천장과 45도 각도를 이루면서 흔들렸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뱃머리가 돌아가는 통에 그만 '버지니아 호'는 옆구리에 바람을 맞았고, 거대한 파도 더미가 대포 소리를 내면서 배의 갑판을 후려쳤다. 로빈슨은 두 번째 카드를 젖혔다.


자, 이제 좀 감이 오실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현등이라는 작은 물체는 바로 버지니아호의 분신인 것이지요. 현등은 거대한 파도 더미에 유린당하고 있는 버지니아호의 요동을 그대로 시퀀스 안에 전달합니다. 그와 동시에 인물들의 위태로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긴장된 상태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로빈슨이 두 번째 카드를 내미는 그 행위는 중력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지만, 현등은 천장과 45도 각도 안에서 빙글 빙들 돌면 그 힘을 조롱하지요.

마지막으로 난파되는 순간의 현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현등이 난파하고 있는 거대한 선박의 무한한 움직임을 꽉 채워 담고 있는 팽팽한 어떤 '줄' 같이 느껴집니다.)


바로 그때 천장의 현등이 줄 끝에서 갑자기 반원을 그리면서 흔들리더니 선실 창에 가 부딪혀 깨졌고 선장은 머리를 탁자 위로 향한 채 꼬꾸라졌다. (...) 선체가 크게 요동하고 난 직후에 뒤따르는 저 끔찍한 정지 상태를 발밑에 느끼는 순간, 엄습하는 고통 때문에 전신이 아파왔다. 만월의 비극적인 빛이 어렴풋이 비치는 갑판 위에서 그는 한 무리의 선원들이 보트 걸이에서 구명정을 벗겨 내리는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그들 쪽으로 몸을 향하려는데 발밑이 내려앉았다(17쪽).


여기 단어들의 계열을 보세요. '반원을 그리며 흔들리며 깨지는 현등'-'꼬꾸라지는 선장'-'갑작스러운 정지상태'-'엄습하는 전신의 고통'-'선실 바깥의 긴박한 움직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려앉아 버리는 발 밑'까지. 픽션 내부의 인물과 오브제들의 움직임이, 읽는 우리 독자의 시선을 완전히 압도하면서, 실제로 발밑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대단원, '난파의 순간'은 다음과 같이 묘파 됩니다.


마치 수 천 마리의 숫양 떼가 전속력으로 달려와서 이 운송선의 좌현 허리에 부딪히는 것만 같았다. 잇달아서 검은 물의 성벽이 갑판 위에 와서 무너지면서 모든 것을 송두리째 휩쓸고 사람과 물건들을 한꺼번에 다 앗아가 버렸다.


발밑이 무너짐과 동시에 정확히 '좌현 허리'가 유린당합니다. '수 천 마리의 숫양 떼'는 분명 거대한 파도 더미를 은유하는 것이겠지요? 이 은유가 매우 감각적이고, 생생한 이유는 파도 더미를 그저 큰 덩어리로 묘파 하지 않고, 그 물 알갱이 하나하나의 폭력적 '힘'을 숫양 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로빈슨은 마침내 스페란차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그는 완전히 고립되어 혼자인 채로 살아갑니다. 온종일 해변을 쏘다니고, 숲을 헤매며,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다가도 차분하게 자신의 노동을 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소설의 플롯 자체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단순한 플롯 안에서 '혼자 있는 인간'의 원초성을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소설의 주제가 드러나는 한 구절을 인용해 보지요.


고독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순전히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식성의 세계이다.

'고독'을 하나의 '세계'로 정의하는 투르니에 상상력의 진중함이 보입니다. 게다가 그 세계는 자아를 부식시키지요. 조금씩 조금씩, 고통 없이 죽이는 형벌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소설 안에서 로빈슨은 스페란차에 표류한 그 순간부터 정신을 챙겨서 의도적인 과잉노동을 하기 전까지 말 그대로 '부식'하는 영혼과 신체를 경험합니다.


혼자 있다는 것, 타인의 부재를 경험한다는 것의 파괴적 성격을 알아채기 전만 하더라도 로빈슨은 스페란차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지요. 그는 난파된 날부터 하루 종일 해변가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수평선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생명'을 느끼기 시작하는데요, 그런데 이 느낌이 처음에는 '공포'로 다가오게 되지요. 그 부분을 한 번 보지요.


그는 며칠, 몇 주일 혹은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 약간 불룩하게 튀어나온 모습으로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며 고여 있는 광대한 대양의 공간이 그를 사로잡는 듯 매혹하여 혹시나 자신이 환각에 사로잡히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우선 그는 자신의 발밑에 있는 것이라고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물의 더미뿐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그것이 수평선 저 반대편에 머리를 두고 있는 어떤 공상적인 동물의 등일 거라고 생각해 보았다. 마침내 갑자기 섬과 바위들과 숲들은 깊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물기 있는 거대한 푸른색 눈의 눈꺼풀과 눈썹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처음으로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날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이후 공포감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28 쪽).  


'거대한 물의 더미', '공상적인 동물의 등과 푸른색의 눈썹'... 이 상징들은 마치 동화나 애니메이션의 괴수처럼 이미지화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로빈슨이 느낀 그 공포감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허허벌판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리던 그 경험 말입니다. 투르니에는 우리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공통 감각'을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재주는 다음의 구절에도 보입니다. 위의 구절이 우리에게 '공포'라는 '공통감'을 느끼게 했다면, 이번에는 어떤 '포근함'  또는 '말랑말랑한 감촉'을 느끼게 합니다.


나에게 색체란 단단한 것이나 보드라운 것의 징조에 지나지 않으며 형태란 내 손안에 만져질 부드러운 것이나 빳빳한 것의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반죽통 속에서 반쯤 벌거벗고 있는 한 사내의 주무르는 손에 내맡겨진 채 있는, 머리도 없고 따뜻하며 선정적인 덩어리보다 더 미끈거리고 더 상냥한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밀가루 반죽과 빵 가게 조수 사이의 기이한 결혼을 상상했고 심지어는 빵에 사향 맛과 봄철의 짙은 향기 같은 것을 첨가해 줄 어떤 새로운 종류의 효모를 몽상하고 있었다(98-99 쪽).


놀랍게도 투르니에는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촉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내용을 가지면서도 감각적인 이런 문체는 투르니에만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합니다. 이 구절 바로 앞의 문장은 투르니에가 이런 문체를 선호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나에게 색채란 단단한 것이나 보드라운 것의 징조에 지나지 않으며, 형태란 내 손안에 만져질 부드러운 것이나 빳빳한 것의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그의'철학'이 완연한 경험론의 그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주된 감각인 '시각'이 아니라 촉각을 전면에 내세우는 아주 '특이한' 경험론자라는 것도 함께 보여주지요. 제 생각에 이 '특이한 경험론'은 타인의 피부 또는 시선의 와 닿음이 없으면 존속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존재를 보증하는 것이 그러한 '감각'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투르니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로빈슨도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진창에 뒹굴기'라는 기묘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이 행위는 일종의 '제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독을 탈출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타자, 즉 스페란차의 끈적끈적한 펄 안에서 좀 전에 말한 그 '감촉'을 느끼는 것이지요. 여기서 그는 '진정한 해방감'에 젖게 되고 마침내 자신이 정체성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땅바닥에 코를 처박은 채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먹었다. 그는 엎드린 채 변을 보고, 자신의 따뜻하고 물렁물렁한 배설물 속에서 뒹굴었다. 그는 점점 자리를 옮기는 일이 드물어졌고 몸을 움직였다가는 곧 진창 속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곳에서 그는 육체를 잊어버렸고 진창의 물기와 따뜻함에 싸인 채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진창은 그가 지닌 자기 내부로 침잠하는 경향과 외부 세계를 기피하는 특성을 드러내 줌으로써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가 요크의 필목 도매상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48-49쪽).


 이러한 원초적인 제의는 그의 사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의 기묘한 '철학'이랄까, 그런 것을 발전시키기까지 하지요.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진창 속에서] 그는 하나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오직 과거만이 중요한 존재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현재는 추억의 샘, 과거의 생산 공장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산다는 것은 오직 그 값진 과거의 자산을 늘리기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죽음이 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그 축적된 금광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에만 진정한 죽음이었다.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49-50쪽).


이건 사실 꽤나 퇴행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에 따르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과거' 뿐이고, 현재는 과거로부터 연유하는 파생물이며, 미래는 오직 죽음만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 말이 언뜻 퇴행적으로 보이는 이 철학을 희망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볼까요?



우리가 소란스러운 현재 속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주의 깊게, 현명하게, 감각적으로 삶을 음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원이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이 문장에 와서 퇴행적인 과거는 '영원성'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재우쳐 생각해 보면, 과거라는 것이 뒤에 놓인 퇴적물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에 고여 있는 영원성의 표현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 영원성의 시간이 출현하는 우리의 삶에서 '나'를 긍정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투르니에는 로빈슨의 입을 통해 그것이 '타인'임을 확인해 줍니다.


고독으로 시들어가는 인간에게 '영원'이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 없는 어떤 미지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무리 우리 삶을 영원한 무엇으로 만들어준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 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나님, 그 누구인 것이다.


현실적인 모든 것들은 이렇게 타인에 의해 '현실성'이라는 날인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심지어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 체계도 타인의 존재에 의해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됩니다. 투르니에는 "타인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강력한 주의력 전환 요인"이라고도 말합니다(45쪽). 이 말은 곧 타인이 있으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내가 있어서 타인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감각이 그쪽으로 끌려가고,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철학은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그 말(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타인 그리고 그 타인으로 인해 환기되는 세계가 먼저인 것이지요.


그러나, 로빈슨에게는 아직 '타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세계, 스페란차도 제대로 된 현실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하면서 스페란차를 어떤 '타인'으로 조성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빈슨은 이 '영원성'의 세계에 시계를 도입하게 됩니다. 물시계를 만들고 매우 뿌듯해하는 로빈슨은 그가 조성하고 있는 세계에 이제 영원성 대신 '시간성'을 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이 씁니다.


나의 시간은 기계적으로, 객관적으로, 거부할 길 없이 완벽하고 정확하게,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똑딱거리는 소리에 의하여 논리화된다. (...)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이제부터는 측정, 증명, 확인되고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되기를 요구한다(81-82쪽).


1977년에 출간된 [Vendredi ou la Vie sauvage]의 겉표지. 이 책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청소년을 위해 다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계적이고, 정확하며, 합리적인 시간, 그가 겨우 조성한 인위와 문화의 시간이 방드르디의 등장으로 교란에 빠지게 됩니다. 방드르디는 자유로운 야생동물과 같은 원주민이지요. 이성보다는 정념이, 논리보다는 직관이 발달한 인종이자, 로빈슨이 이루어 놓은 그 정합적인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어린 불량배와 같습니다. 방드르디와 조우할 때 즈음, 로빈슨은 스페란차라는 섬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섬을 끌어안고, 그것과 섹스를 나누고, 꽃들을 그의 자녀들이라고 여기고 있는 참이었지요. 다시 말해 스페란차는 '이미' 정복된 대상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런 때 등장한 방드르디는 이러한 지배-복종 관계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방드르디에게 스페란차와 그 안의 자연들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놀고, 대등한 관계에서 투쟁하고, 또 사랑하는 그런 관계였기 때문이었지요. 어쩌면 원주민으로 자란 그에게 그런 관계는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오히려 로빈슨의 행동들이 그에게는 이상하게 비쳤겠지요.


이런 방드르디에게 로빈슨은 마침내 혐오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 혐오감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인정받을 길 없었던 자에게 이상한 애증, 또는 자아의 분열 같은 것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이 둘의 관계를 읽고 있자면, 독자가 로빈슨에게 감정이 이입되는지, 방드르디에게 그렇게 되는지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 검둥이는 전혀 다른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어서 그의 주인의 대지적 세계와는 대립하며, 그를 이 세계 속에 복종시키려고만 하면 곧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곤 하는 듯했다(223쪽).


이 인용문 안에서 로빈슨이 겪고 있는 욕망의 좌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로빈슨은 스페란차를 정복했지만, 방드르디라는 타인을 정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다음 구절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드르디는 마귀에 씌었다. 아니, 어쩌면 이중으로 마귀에 씌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악마적인 폭소 이외에, 나의 자아가 송두리째 그의 마음속에서 움직이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 나의 유일한 동반자에게서 나는 마치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쳐 보이는 거울 속에서처럼 일종의 괴물 모양으로 변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189-190쪽).


로빈슨은 방드르디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은 그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스페란차 '문명'이 아니라 원시성 자체입니다. 자신의 본래면목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원시성이라는 것을 거부하며 살았다는 것을 로빈슨은 방드르디에게서 깨닫고는 수치심과 더불어 적대감을 느끼지만, 방드르디를 내치지도 못하는 것이지요. 그를 내치면 그의 존재는 다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곤두박질칠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내적 갈등이 단숨에 폭발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말 그대로 '폭발'이지 어떤 문제의 '해결'이 아니에요. 그건 바로 스페란차 동굴 폭발 사건입니다. 로빈슨은 난파된 버지니아호로부터 거두어들인 화약통들을 섬 깊숙한 동굴 안에 숨겨 놓았었지요. 그 동굴 내부는 로빈슨이 거주하는 동굴 입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빈슨이 외출한 사이 담배를 피우던 방드르디가 그 속으로 불붙은 담배를 던져 버린 겁니다. 대 폭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것이지요. 집과 정성스럽게 가꾼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그 아수라장 가운데에서 로빈슨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오히려 그것을 그가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라고 투르니에는 씁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에 로빈슨도 이러한 인위성이 부담스러웠지만, 그것을 못 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마침내 일이 터지자 로빈슨은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막 발생한 엄청난 재난은 그 자신이 은근히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 잘 다스려놓은 이 섬은 결국 그의 마음에 방드르디 못지않은 부담을 주고 있었다. 방드르디는 자신도 모르게 이 대지의 뿌리를 뽑아놓고 이제 와서는 로빈슨을 저 다른 것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대지가 지배하는 그 세계에 오직 그에게 고유한 세계를 대치시켜 놓으려는 것이었는데, 로빈슨은 그 세계가 어떤 것이 될지 알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새로운 로빈슨이 그의 낡은 살갗 속에서 꿈틀대면서 이 관리된 섬이 붕괴되는 것을 방치한 채 무책임한 선두를 따라 낯선 길로 들어가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233-234쪽).


방드르디와 그가 저지른 사고는 로빈슨에게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는 원초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제부터 방드르디는 더 이상 지배해야 할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이 흑인 원주민은 그에게 단일한 '무엇'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다성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여러 해를 두고 그는 방드르디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그는 그의 형제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형인지 동생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237쪽).


이렇게 방드르디와의 관계는 로빈슨에게 대단한 혼란을 안겨주면서 지속됩니다. 그러나 그 혼란은 타인 없는 세상에 던져졌던 로빈슨이 자신의 신체와 영혼에 대한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정체성'이라는 것이 '자아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이 '정체성'은 바로 '원소들' 또는 '자연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알 수 있는 장면은 방드르디가 거대한 숫염소인 앙도아르를 죽여서, 그 뼈로는 악기를 만들고 가죽으로는 연을 만들어 연주하고 날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장면도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 중 하나지요. 한 번 읽어 보지요.


앙도아르로 만든 그 악기는 그 자신이 직접 탈 수도 있는 리르나 키타라가 아니라 원소의 악기, 바람이 유일한 탄주자가 될 그런 악기였던 것이다. (...) 공중을 나는 앙도아르가 노래하는 앙도아르 속에 출몰하면서 그를 보살피는 동시에 위협하는 듯했다. (...) 비인간적이고 그야말로 원초적인 음악, 그것은 대지의 어두운 목소리요 동시에 천상계의 하모니요 또한 제물이 된 큰 숫염소의 목쉰 탄식이었다.  

   

(좌) 같은 출판사(Poche)에서 1997년에 다시 나온 [Vendredi ou la Vie sauvage]의 겉표지, (우) 문학과 지성사 2014년 번역판

앙도아르의 창자를 꼬아 말린 줄을 두개골에 엮어 만든 그 악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미세한 음향을 공기 중에 흩뿌립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불면 미친 듯이 울리지요. 한 마디로 이 악기는 인간의 신체에 부속되어 조종당하는 악기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악기는 '인간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람의 하프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순간 속에 새겨지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이기도 하다.


'송두리째 순간 속에 새겨지는 음악'이라는 것, 그런 음악이 인간 세계에서 가능할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음악은 순차적으로 흐르는 선형적 시간, 즉 크로노스입니다. 하지만 자연의 시간은 그러한 순차성을 모르지요. 그것을 철학자들은 '아이온'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이' 순간 속에 현재와 미래와 과거 전체가 접혀 있는 시간입니다. (철학 개념은 늘 어렵지요? 뒤에 설명할 기회가 또 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의 숨겨진 주제가 '시간'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의 끝에서 설명해 볼게요.


어쨌든, 마침내 로빈슨은 방드르디의 존재 전체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앙도아르 악기와 연 사건'은 그만큼 그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가져다준 것이지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앙도아르는 바로 나였다.


로빈슨은 자신이 앙도아르라는 것, 방드르디가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챕니다. 물론 방드르디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요. '조종'은 방드르디라는 한 인격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방드르디 안에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원초적 힘이 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좀 전의 동굴 폭발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빈슨은 이러한 주객전도의 사태에 대해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방드르디가 로빈슨에 대해 '기이한 우정에 사로잡혔다'라고 투르니에는 씁니다.


이 우정은 한편으로는 로빈슨의 문화를 파괴하고 유린하는 잔혹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빈슨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게 해주는 일종의 음악적 유희를 선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만큼 기이한 것이 있을까요? 이런 관계는 사실상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좀체 찾기 힘들지요. 이것은 절대 고독이라는 아주 특유한 상황에서 타인과 조우하고 살아갈 때 생겨날 수 있는 파토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만큼 이 우정이야말로 가장 시초의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지요.


이 정도로 읽고 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진취적인'(?) 로빈슨, 장난꾸러기 프라이데이의 모습은 온 데 간데 없어집니다. 그리고 어떤 심오한 철학적 깨달음, 기이한 관계성, 개념적 인물들 만이 오롯이 남게 됩니다.


과연 투르니에는 이 소설을 통해 '타인 없는 세상' 또는 '타자를 통한 정체성 찾기'라는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 것일까요? 처음에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았습니다. 또 그것이 타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 외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이 소설에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화이트버드'호가 스페란차에 도착하여, 로빈슨, 방드르디와 접촉했을 때를 잘 보면, 이 소설이 다시 한번, 다른 각도에서 음미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이트버드 호의 선장 윌리엄 헌터가 내민 손을 바라보며 로빈슨은 다음과 같은 불안에 휩싸입니다(로빈슨은 전혀 기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는 이제 로빈슨을 그의 언어와 몸짓의 그물로 감싸고, 다시금 그를 거대한 조직 속으로 이끌어 들이게 될 인간 사회 최초의 인물이 될 참이었다. 손이 인류 전체의 특사인 그 사내의 손과 닿는 바로 그 순간, 그 고독한 인물이 참을성 있게 다듬고 짜 놓은 이 세계가 송두리째, 어떤 무시무시한 시련을 겪게 되려는 것이었다(292쪽).


이 '무시무시한 시련'이 무엇인지는 그 다음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나타납니다. 로빈슨은 선장과 선원들이 "열에 들뜬 듯이" 이리저리 활보하고, 뭔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이 모두 "악의 바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목적이란 어떤 획득, 어떤 부, 어떤 만족 따위였"기 때문입니다(303쪽). 이 목적들은 사실 로빈슨이 스페란차에 처음 도착했을 때, 추구했던 문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폭발'과 '앙도아르 악기-연' 사건을 겪으면서 로빈슨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지요. 그 이후의 로빈슨은 문명인이 아니라 원주민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주민의 상태가 가지는 정체성은 문명세계로부터 온 왁자지껄한 '타인들'을 통해 재확인됩니다. 로빈슨은 이미 이들과는 화해할 길 없는 방향으로 너무 멀리 와 있었던 것이지요. 이 먼 거리에서 '타인들'은 재정립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타인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지 않게 되지요. 로빈슨은 '인간'보다 더 '자연'에 가까워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들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가치, 관심점과 싫어하는 점, 중력의 중심을 지닌, 상당히 논리 정연한 하나씩의 가능적 세계였다. (...) 그 가능적 세계들의 하나하나는 순진하게도 자기의 현실성을 선언하고 있었다.   (...) 타인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 현실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가능태 말이다. (...) 그는 이 인간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권위를 부여했다가는 그 바람에 스페란차를 무화시키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97-298쪽).
방드르디가 화이트버드 호에 오르는 모습입니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페란차를 떠나버립니다.


'타인이란 현실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가능태'라는 이 말속에 완연한 본질을 획득한 한 인간의 독립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제 '타인'이 필요 없는 것일까요? 자유로운 방드르디는 벌써 로빈슨을 버리고, 화이트버드호에 오르는 참입니다. 방드르디는 이전의 방드르디일까요? 로빈슨은 고개를 젓습니다. 방드르디는 화이트버드호를 보며 기뻐 날뛰던 그 순간에 스페란차로부터 멀어져 간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의 시간이란 어떻게 흘러간 것일까요? 스페란차에 화이트버드호가 정박하는 그 순간 어떤 시간의 고리가 심대한 충격을 받으며 깨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 생각에 여기에 이 소설의 숨은 주제가 있습니다. 분주하게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윌리엄 헌터에게 로빈슨은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그러자 선장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787년 12월 19일 수요일입니다." 순간 로빈슨의 머리 속에서 지난 시간들이 순식간에 지나가기 시작하고, 스페란차에 온 이후 처음으로 날짜(크로노스의 시간)를 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뇌까리지요.


28년 2개월 19일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이 숫자 앞에서 망연자실 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28년이라니.... 어떻게 이 긴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내가 느끼기에는 단 한순간 같은데...' 그리고 페이지를 되돌아 가서 앞부분을 넘겨 보게 되지요. 왜 이런 것일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개의 시선이, 즉 빛의 시선과 암흑의 시선이 서로 마주친 것이었다.
태양의 화살 하나가 스페란차의 대지적 혼을 꿰뚫은 것이다.
다음 날에도 그와 똑같은 섬광이 스쳐 갔다.


이 구절은 로빈슨이 스페란차의 중심부로 나 있는 동굴을 탐험하면서 겪은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섬광'이라는 단어가 보이시지요. 스페란차의 중심부에서 번쩍이는 그 섬광은 외부세계의 빛은 '일순간' 품에 들이는 그 순간의 빛입니다. 섬광과 같은 순간은 그렇게 단속적으로 스페란차에 임재하는 어떤 신비한 시간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로빈슨은 새벽녘에 스페란차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둥치를 안고 몽상에 잠긴 채 다음과 같은 환몽 상태를 경험합니다. 이 구절을 참으로 아름다운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뜨거운 물결이 그를 휩쌌다. 인색한 새벽이 지난 후 저 황갈색의 빛이 모든 사물들을 당당하게 태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반쯤 떴다. 속눈썹 사이로 한 줌의 반짝이는 금속 조각들이 빛을 발했다. 따뜻한 바람에 나뭇잎들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생각했다. 나뭇잎은 나무의 허파, 허파 그 자체인 나무, 그러니까 바람은 나무의 숨결. 그는 바깥으로 활짝 펼쳐진 자기 자신의 여러 허파들로 꿈을 꾸었다. 자홍색 살로 된 숲이요 장밋빛 잔가지들과 점액성의 스펀지가 달린 살아 있는 산호초의 군생체, 이것이 바로 그의 허파들이었다....... 그는 이 기묘한 원기를 허공 속에 뒤흔들리라, 이 살로 된 꽃다발을, 그리하여 자홍색 기쁨이 빨간 피로 터질 듯 가득 찬 나무 둥치의 통로를 따라 그의 내부로 깊이 스며들리라......  (253쪽)


나무를 '허파'로 은유하고, 바람을 나무의 숨결로 보는 이 환몽의 경험은 급기야 허파들이 평화로운 꿈을 꾸는 기이한 동화적 세계로 독자를 이끌고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무의 허파가 '살로 된 꽃다발'이 되고, 나무와 동체를 이루는 상상으로 나아가지요. 이것은 일종의 '신화적 상상력' 즉 '변형'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설의 주제와 연관해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이 몽상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관련 있습니다. 로빈슨이 나무둥치를 안고 동화 속으로 빠져드는 그 시간은 새벽이지요. 그리고 그때 빛은 황갈색으로 내려앉습니다. 하지만 이 새벽의 '순간'은 로빈슨의 몽상의 시간만큼 길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무궁무진한 '질감'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아이온'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사실 이 신기한 시간은 우리들도 가끔 경험합니다. 어지간히 현실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두뇌의 모든 계산과 의식의 명료함이 사라진 밤의 시간, 꿈을 꾸며 이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오랜 세월을 경험하는 꿈이라 할지라도, 실제 시간(크로노스)은 잠 깨기 몇 분, 몇 초에 불과하지요. 또는 바쁜 일상 가운데, 가끔 멍하게 있는 그 순간도 그런 시간일 수 있습니다. 로빈슨은 이러한 시간을 스페란차에 머문 시간 전체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무죄의 시간'(번역에 따라 이를 '순수 시간'이라 할 수 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순수 시간'이라는 말이 더 좋네요.)이라고 명명하지요.


그러므로 로빈슨이 문득 발견해 낸 크로노스의 시간, 28년 2개월 19일은 '순간'이라는 순정한 결정체를 품고 있는 것이지요. 로빈슨은 물시계를 늘 체크하면서도 이 세월이 흐르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순간'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순수 시간', 아이온이지요. 그래서 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에서 투르니에가 적어 놓은 말들은 이 아이온의 시간이 스페란차에 영원히 흐른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행복한 순간을 떠난다는 것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좌)스페란차 상상 삽화, (우) 2011년 판 [Vendredi ou la Vie sauvage](Flammarion) 겉표지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다. 하나님이신 태양 아래서 스페란차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진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어떤 완벽의 극한점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영원한 순간으로부터 몸을 빼내어 피폐와 먼지와 폐허의 세계 속으로 추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307쪽)


이렇게 해서 '과거도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 속에 진동하'는 스페란차는 '피폐와 먼지와 폐허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 됩니다.  그것을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비시간적이며 죄 없는 존재들로 가득 찬 고성소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단어 '고성소'(Limbes,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의 제목은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입니다. 그대로 제목을 번역하면 '방드르디, 또는 태평양의 고성소'가 되는데요, 좀 이상하지요? 아마도 번역자가 이를 감안해서 'limbes'의 나머지 의미 중 하나인 '가장자리'를 전용해서 '끝'으로 한 것 같습니다. 가독력을 살리기 위한 것이겠지요?)가 등장하는군요. 스페란차라는 공간을 어떤 '애매모호한 지대'(limbes에는 '모호한'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로 보는 것이 여기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 공간은 비시간적이고, 순수한 존재들이 살며, 따라서 이 비시간성은 순수한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 사는 것들에 자연과 인간의 구분은 없지요. 그리고 더 낮은 단계에서 원소들(물, 불, 바람, 공기)도 인간이나 동물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와 종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존재가 하나의 평면에 존재하는 평등성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이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문장들을 보도록 하지요.


마침내 태양신이 폭발하는 심벌즈 소리와 쩌르렁거리는 트럼펫 소리를 내면서
붉은 머리털의 왕관을 활짝 펼쳤다.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서 광물성 그림자들이 빛을 발했다.   


화이트버드호가 교란한 스페란차의 '질서'를 되찾기로 결심한 로빈슨이 해변가에 서서 일출을 맞는 장면입니다. 이때에는 새 동료가 생긴 상태입니다. 바로 '죄디'라고 이름붙인 소년, 화이트버드호 선원들의 폭력을 피해 스페란차에 남은 소년이 있었지요. 해변에는 이 두 사람이 서 있고, 태양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린아이'는 누구일까요? 겉으로 봐서는 '죄디'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바로 로빈슨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아침이 그에게는 최초의 시작이었으며 세계사의 절대적인 시작"이었기 때문이지요(307쪽).


자, 그럼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어떤 교훈이나 의미를 캐낼 수 있을까요?  대개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타인의 중요성' 또는 '고독한 자의 명상'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철학' 정도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전 이런 견해들이 틀리진 않지만 정확한 핵심을 꿰뚫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자 합니다.


'절대고독의 상태에서만 인간은 새로운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새로운 시간을 아이온이라고 부르자.

아이온을 사는 삶이 바로 스페란차의 삶이다'



<참고문헌>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1995

질 들뢰즈 지음, 이정우 옮김,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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