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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영 Jun 23. 2018

바나나, 망고, 파파야

- 희귀종시인강목#1 김복희 편

바나나 망고 파파야 순서대로 놓으며
그게 우리가 가는 곳이야 중얼거린다 바나나 망고 파파야
그런 과일들을 먹는 동안에는 어떤 슬픔도
없을 것 같고
- <녹조> 중



큰 제목만 보면 요리 브런치인 줄 아실 것 같다. 아니다.

멸종위기종, 시인들을 위한 브런치다.


어떤 시집을 읽을 때면, 난 늘 무슨 고고학자나 조류학자가 된 기분이 든다.

뭔가 잃어버린 감성을 발굴하는 기분.

그래서 '희귀종'이라고 했다. 내 안의 시적 감성도 희귀하고, 또 시인들이 이 시대에는 희귀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인으로 김복희 시인을 선택했다.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새'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난 조류학자니까. 진심이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 첫 시집을 낸 시인이고 언어의 결이 마시멜로처럼 푹신하다. 그렇다고 이해가 쉬운 시인은 아니다. 마시멜로의 끝 맛이 찌릿하다. 감전당한 듯이.


위기종 조류, 아니 시인 소개부터 하자. 이 분이다. 바로 아래 사진은 말랑말랑한 이 분 시집.



실물은 더 멋있다(리얼리?). 사실 이 시인을 노마는 조금 안다. 사석에서 몇 번 만났으니까.

사석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대학생 같이 어려 보인다(실제론 1986년생).

'오'나 '요' 발음할 때 입술이 새부리처럼 뾰족하게 모아지는 특징이 있다. 새가 맞나 보다.




인간친구, 새 인간


이 새 시인의 첫 번째 모이(<손발을 씻고>)를 읽으면서 처음 감동받은 구절.


전염병처럼
인간이 옮는 것이다
잘 안 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인간들이란 전염되는 존재다. 피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여기에 친구도 예외는 아니다. 끊임없이 친구가 등장한다. 친구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 친구의 흔적이 등장한다.


표제작인 <새 인간>의 일부를 보자.


새 인간을 하나 사 왔다 엊그제도 친구 하나가 산소 공급기 청소를 깜빡하는 바람에 죽어 버린 인어를 하수구에 흘려보내다가 (...) 새 인간을 사러 갈 것이라고 말하자 친구는 (...) 비웃었다


여러 친구가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친구인 것 같기도 하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똘기(?) 충만한 친구인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무룩한 그저 그런 친구이기도 한 것 같다.


'친구'가 제목에 들어가는 시가 있다. <그들은 거의 친구 같았고>. 여기에 나오는 친구는 다소 생뚱맞다. 화재가 난 집에 있던 두 여자를 시인은 '친구 같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제삼자 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가 옆에 서 있다.


"우산을 씌워 준다"


친절한 친구. 하지만 시인은 그 친구를 '검은 연기 같다'라고, 화재가 난 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연기 같다고 무심히 말한다. 과연 이 친구는 누구인가?


시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목구비나 성격을 알려고 하는 건 어리석다. 그래도 궁금하다.


혹, 첫 번째 시에서 말한 그 전염병 같은 인간에 친구가 속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시인의 상상력은 다소 섬찟하다. 하긴 검은 연기 같다고도 했다. 그 연기는 일산화탄소일 것이고 중독된다. 전염되는 것보다 민폐는 덜하지만 중독되면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죽고 싶으면 죽어도 좋아
그전에 이것만 다 써보자
친구의 맞은편에 앉아 연필을 깎는다
- <거리로> 중


절구다!

친구의 자살 시도를 앞에 두고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절실한 시적 우정을 나누는 관계임에 틀림없다. 기괴한 친구, 하나밖에 없는 친구, 절실하고 아름다운 친구, 새 시인의 시를 제일 좋아하는 친구.


한참을 궁싯대던 새 시인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산을 들고나가야 할까?"


친구는 말없이 "칼과 연필을 챙긴다."


칼과 연필, 이 두 도구는 곧 죽을 것 같은 친구와 그 친구를 자신이 '시'로 먹여 살리는 시인이 '거리로' 나서기 전에 챙겨야 할 호신용 무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칼과 연필 따위로 무서운 세상에 맞서다니!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시인의 다른 시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은 늘 시인과 친구를 '가라 앉힌다.' 밑으로, 밑으로 끝없이.


지옥을 기어가는 기분으로


그래서 노마는 새 시인의 상상력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방의 상상력


그리고 천상의 존재를 짐짓 모욕하기도 한다. 이렇게.


천사 주제에 말을 좀 합니까
- <만원> 중


시인에게 천상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 다만 가슴에 뭔가를 품고 사는 것으로 만족, 아니 불만족 속에 있다. 그것이 좋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지만 비명은 지르지 않는다. 가끔 저렇게 뒤틀린 저주를 아주 나직이 내뱉는다. 다소 빙퉁그러진 건 아닐까? 뭐 아무려면 어떠랴. 여전히 친구가 있다.


나를 위해서 날지 않기로 마음먹고 죽고 싶지만 죽지 않기로 결심한 나만의 새 인간이 긴 얼굴을 돌리고 내가 잠든 동안에만 날개를 펼쳐 보이는 나는
얼음 속에는 물과 빛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이
- < 새 인간> 중


새 인간은 친구다. 늘 죽고 싶은 친구. 날 전염시키고 중독시키는 얼굴이 긴 친구.



친구는 그렇고, 다른 타인들은 어떤가?


시인은 새 인간인 친구 외에 다른 사람을 사귀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모임> 중)

그리고, 다음 구절, 단숨에 명토 박는다.


친구는 사귀지 않는다


이 시를 보면 새 인간은 아마도 '매'인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새 인간>의 새와는 많이 다르다. 왜 그럴까? 이 매는 높이 날며, 사납다. "할퀴고 갈가리 뜯는다 발버둥 친다."


이 매는 "내 품에서 깨어난 매"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 새가 높이 날면 "그것을 볼 수 없다." 매는 멀리 '위'에서 "이런 딱한 친구"라고 하면서 시인을 모욕한다. 뭔가 다르다. <새 인간>의 새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가슴으로 떨어지는 시체
매가
내 매인 것을 안다
그것이 매다


죽어 가슴으로 되떨어진 그 시체를 두고 시인은 '내 매다'라고 말한다. 저 '위'가 아니라 '아래'로 떨어진 그 시체가 자신의 새다. 다시 새겨 보자. 이 시인의 이미지는 위로 상승하지 않는다. 부단히 자맥질하지만 결코 '바닥'을 떠나지 않는다. '하방의 상상력'인 이유다.


힘차게(?) 솟구치는 이미지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긴 하다.


뚜껑을 두들겨 올리는 하얗게 뭉쳐진 주먹
밑이 다 타도록 주먹질만 해야 하나 사모바르여
- <테마파크> 중


'사모바르'는 러시아식 주전자다. 여기 묘사된 장면은 물이 끓어오르는 사모바르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시 전체에 이 상승의 이미지를 가차 없이 끌어내리는 언어들구절 앞뒤로 줄 지어 있다.


"기울어질 때마다 흐를 것이다. (...) 먼지 무겁게 내려앉은 망토 (...) 구겨지고 떨어지는 것에 몰두하고 있으므로 (...) 망토가 창 아래로 떨어진다"


등등...


한 시에 이토록 많은 하강의 이미지가 난사되는 경우도 드물다.


시인은 하강하고 기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그 '결'이 심상치 않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사랑의 정체는 뭘까? 분명한 것은 시인은 세상을 별로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고한 페시미즘 따위는 아니다. 새 시인에게 그것은 너무 무겁다.  


가끔 심술궂게 되어버리는 페시미즘?


아무래도 이 시인의 페시미즘을 뭐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어떤 '전언'을 듣지만, 그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또는 한 번은 믿지만 두 번째는 비웃는다. 그러니 늘 반복되는 풍문은 지겹게 '또'라는 접속어를 달고 나타난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들.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어떻게 될까?


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
 실험용 쥐는 저 같은 사람도 살 수 있나요?
(...)
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
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
이야기 좀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는 친구,
그러니까 그거 니가 쓴 시 이야기지.
이야기.
이야기.
(...)
친구가 무서우니까 이야기 좀 계속 해 보라고 말한다
- <성>


친구가 무서워한다. 그러니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 시를 써야 한다. 친구, 친구, 친구.


"친구는 내려오라는 말에도 서 있는 공터의 친구다" - <사유지> 중


그러나 "공터를 밀어낸다". 


기어이 이 시인은 친구의 공간마저 없는 곳을 꿈꾸는 것일까? 거기서 하루 종일 뒹굴고 기어 다니며, 이미지들을 줍고 있을까?


여기 아주 아름다운 다른 시가 있다. <빈방>이라는 시다.


"빈방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화기 없는 몸이 가성비가 좋다면서 연구비를 안 주겠다는 거에요."


대화 상대자는 누구일까? 아마도 '익명'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새 인간이 아닌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렇고 그렇다. 시인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자기 의견이랍시고 몇 마디씩 툭툭 던질 뿐이다. '꽤나 이상한 상상을 하는 친구군'이라는 듯이 말이다. 아무튼 시인은 계속 말한다.


"아름다운 건 얼마간 조금 무섭지 않나요 창문도 없고 조명도 없는 빈방이 환한 것 같이요 그런 방을 본 적 있으세요"


그리고 느닷없이 독백한다.


"빈방이 없어진 상태를 상상하느라 그 사람이 이미 내렸고 버스 안에 나만 남았다는 것을 몰랐다. (...) 나도 도둑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방이 사라졌다"


다시 대화.


"뭐든 해 봐야죠 빈방을 갖고 있다는 것만 안 들키면 될 거에요 (...) 그보다 지금 여기 창문 있나요 저거 창문 아닌가요 아닌데요 피곤하신가 봐요 아무도 안 살걸요 확실한가요 확실해요"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여기에 이 시인의 모든 미학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방이에요 그것 무서울 것 같네요 아름다울 거에요"



빈 방은 무섭다. 그리고 아름답다. 들키면 안 되는 내면, 스스로에게도 친구에게도 그것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울 것이다.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세상의 기어 다니는 모든 이미지들을 채집하면서 그것이 오로지 텅 빈 기표일 뿐이라는 것, '빈방'을 채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남루하고 '낡은'(이 시어도 자주 사용한다) 또는 '낡아가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물론 아름답기는 하다.








바나나, 망고, 파파야

이쁜 이름들, 그러나 그것들을 '순서대로' 놓아야 한다. 그 순서는 물론 새 시인의 입맛대로다.


새 시인은 그것을 '발음'하고, 쓰기보다 '먹으면서' 행복할 것이다.


결국 친구는 "원하는 곳으로 갔다 나도 내가 원하는 곳에 있다"(<녹조> 중) 남은 '나'는 가버린 친구의 기분이 되어 익숙한 땅에서 "현지인처럼" 행세한다. 이방인이라는 말이다.


바나나, 망고, 파파야

친구는 "과일 껍질을 버리며 절벽같다고도 했다"


과일껍질과 같은 언어들은 버려질 것이고, 절벽 같은 절망감이 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절벽.





구원이란 무엇일까?


시집을 읽으면서 노마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믿지 못할 세상과 떠나버릴 친구와 빈방의 고립만 남은 시절에 무엇이 구원일까? 시인은 그것이 '힘을 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손바닥에 물고기를 올리고 가만히 쥐어 보았다
차갑고 미끌거리는 힘을 냈다
따뜻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
계속 서 있었다
대궐같이
궁전같이
동물원 대관람차같이
환상 같은 것도 못 보고
환상을 만나지도 못하고
양동이에서 튀어나온 물고리를 집어 들었다가
그게 꿈틀거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뒷걸음쳤다가 아가미가 움직였다
힘을 빼는 데도 힘이 필요해
물이 물고기를 털어 내듯이
물풀이 모래를 빗물을 만지고 버리듯이
다음 날
주번이 그것을 화단에 묻었다고 말했다
그 애는 땅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이야기를
문집에 실었다
나는 환상 같은 것도 못 보고
화단을 등지고 서 있었다
보라
완전히 이용당한 자
신의 선지자같이
무엇이 되려고
나는 그게 되었다가 아니게 되어 가는 중일까
- <구원하는 힘> 전문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방의 이미지'들. 그리고 시인은 뭔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구원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시인이 되는 것이? 하지만 친구가 먼저 선수를 쳤다.


미끌 거리는 물고기는 분명 '시'일 것이다. 새 시인이 처음 꿈꾼 것은 물고기다. 새 시인이 아니라 물고기 시인. 하지만 '땅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환상적 이미지는 친구가 먼저 가져갔다. 환상 따위는 못 보고 과거에 물고기 시인이 되고 싶었던 새 시인은 지금도 '화단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일까? 


물고기를 찾으려면 깊이깊이 파 들어가야 한다. 시인은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용당하는 것일 테니까. 구원은 거기 있지 않다. 물고기 따위는 잊자.


영원히 소녀일 수는 없으니까. 다만 어른이 되기 전까지 빈 방을 들키지 않고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그것들을 친구'들'에게 선물하자. 가끔만 날다가 다시 깨느른하게 엎드리는 새 시인은 그래도 된다. 힘을 빼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빈방, 거기 깃들 '새'의 빛깔은 무엇일까?


다음 시집에는 어떤 친구들이 등장할까?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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