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부터 스페인 비자 발급까지
2024년 8월 말, 스페인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로부터 오퍼레터를 받았다. 'First of all, congratulations~'로 시작하는 메일을 보고 기분이 묘했다. 기쁘긴 했지만 날아갈 것처럼 들뜨진 않았다. 현실의 무게가 나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7월 초, 링크드인을 통해 스페인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게 됐다. 원격으로 근무하는 조건인 줄 알았더니 마드리드로 이주해야 한단다. 초기 정착을 위한 비용이나 도움은 어느 정도 지원한다며.
해외 회사에 취업하는 것 자체는 아주 어렵지 않다. 링크드인에 상주하다면 나의 전문분야에 맞는 채용공고가 드문드문 올라오게 마련이다. 어려운 건 현지에 거주할 수 있는 비자까지 제공하는 회사를 만나는 거다.
사실 지난 5월까지 2년간 다닌 회사도 해외의 마케팅 에이전시였다. 구체적으로는 영국의 '요크(York)'라는 도시에 있었는데, 나는 아시아 지역 담당으로 서울에서 원격으로 근무하는 형태였다. 유럽인 동료들과 일하는 건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커리어적으로 괄목할 정도의 성장을 한 것 같진 않다.
마드리드 오피스로 출퇴근할 아시안 마케터를 구한다는 글에 지원한다는 건 그래서다. 될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돼도 꼭 가야겠다는 단단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일한 태도일 수도 있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고민하는 건 도전에 대한 추진력을 잃게 한다. 어느 정도의 충동성은 인생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부스터를 달아준다.
내 손으로 이력서를 보낸 다음부터는 회사의 안내에 따라 다섯 차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사팀과 가볍게 한 번, 나의 매니저가 될 크리에이티브팀 리드와 PT면접 포함 세 번, 부서장(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과 마지막으로 한 번. 중간에 직원들의 여름휴가를 이유로 3주 정도의 텀이 생겼고, 이때 나는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인터뷰 외에도 온라인 적성 테스트나 제안서를 만드는 과제 전형 등이 있었기에 총 두 달의 채용 프로세스는 고됐다.
지난했던 과정 끝의 합격 소식이 반갑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이유가 뭘까. 평생을 한국에서 살며 나도 모르게 나이별 기준점을 인식하고 있던 것. 30대 초반은 도전보다 안정을 추구해야 하는 나이라는 생각.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가나 자차 등 내(自) 소유의 무언가가 쌓이기 시작해야 하는 때. 이러한 사회적 시선을 외면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날아간다는 건 아무래도 망설여졌다. 스스로 지원해 놓고 왜 이러냐고요? 저도 모르겠어요...
사실 8월 말의 나에겐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스페인으로 이직하는 게 1번, 이전처럼 해외 회사에 취업해서 원격으로 일하는 게 2~3번. 후자의 경우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이 없기에 원하는 만큼 여행하며 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1번을 선택한 건 지금이 커리어적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원격으로 일하는 것보단 환경도 사람도 일도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 나아가는 게 여러모로 성장하기에 더 좋겠지.
어차피 갈 거 긍정적인 면만 보자고 생각했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불만족스러운 것도 많다. 대표적으로는 월급. 스페인은 유럽 중에서도 임금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다. 생활비도 그에 맞춰 적게 쓰면 될 문제지만, 다른 건 몰라도 집세가 정말 비싸다. 100년 된 집의 원룸이 월 150만원 정도라면 말 다했지. 큰돈을 벌 목적으로 해외 생활을 택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저축은 가능해야 직장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봉은 납득할 수 있는 범위의 낮은 선으로 겨우 맞추게 됐다. 원래 연봉은 이직할 때 높여야 되는데, 그걸 알면서도...
이러나저러나 나는 스페인에 가기로 했고, 9월부터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비자 발급은 회사의 가이드를 따랐다. 나는 '고숙련 전문직 비자(Visa for highly qualified workers and for intra-company transfers)'를 발급받았는데, 학생 비자나 워킹 홀리데이 비자와는 필요한 서류도 진행 과정도 달랐다. 우선은 근로/거주 허가를 받기 위해 여권, 졸업증명서, 범죄경력회보서 등의 서류를 모아 회사에 제출해야 했다. 일부는 온라인으로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일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공증과 아포스티유 과정을 거쳐 스페인 번역본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10월 중순까지는 공증센터와 재외동포청 등의 기관을 들락거렸다. 직장인 신분으로 스페인에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지 고숙련 전문직 비자에 대한 정보는 온라인에 거의 없었다. 회사와 각종 기관의 직원분들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서류 준비를 마쳤다.
10일 정도 기다리니 근로/거주 허가서가 나왔다. 그다음은 스페인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는 것. 온라인으로 방문 신청을 하고 필요한 서류를 모두 제출했다. 2주 정도 기다리니 결과가 나왔다는 메일을 받았다. 대사관에 가서 비자가 부착된 여권을 찾아왔다. 이 종이 한 장 붙이려고 두 달을 고생했구나.
11월 16일, 인천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가긴 가는구나. 비자가 나온 다음에도 처리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자취방을 정리하고, 정부24에서 해외 체류 신고를 하고, 4대 보험을 정지하고... 뭘 하나 처리하다 보면 다른 게 떠올라 투두리스트는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그 사이에 당분간 못 볼 친구들도 열심히 만났다. 회사 다닐 때보다 체력적으로 두세 배는 힘들었고, 중간중간 이렇게까지 해서 해외를 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하라면 못 한다 정말.
15시간의 비행은 반복하기 싫을 정도로 지루했지만 무섭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비행공포증이 생겨 4시간 이상의 비행을 앞두고는 생각만으로 손에 땀이 줄줄 난다. 여행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시작점인 비행기 안에서는 설렘보다 긴장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난기류가 무서워 장기 비행에서도 거의 잠을 못 잤다.
이번에도 내내 말똥말똥했지만 웬일인지 평소보단 공포가 덜했다. 운 좋게 옆자리가 비어 몸이 편해서인지, 친구가 수호신이라며 챙겨준 그로밋 인형 때문인지, 비행기 안에서보다 스페인에 내려서 걱정해야 할 게 많아서인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큰 문제없이 마드리드에 랜딩했다는 데에 감사했다.
마드리드 바하라스 공항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입국 심사부터 짐 찾는 데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미리 예약해 둔 한인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저녁 8시 반이 넘은 시각이라 밖은 깜깜했고, 일상에서나 여행에서나 해 지면 안 돌아다니는 나는 바짝 긴장했다.
숙소는 '스페인짱'이라는 네이버 카페를 통해 구했다.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상태에서 온라인으로 집을 구하기엔 위험 부담이 컸다. 아무래도 첫 집은 한인 커뮤니티로 구하는 게 나을 것 같았고, 그렇게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 한 칸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집주인 분을 만나 무사히 체크인까지 하고 나니 긴장이 풀려 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압축 파우치에 넣어둔 옷만 대충 풀어놓고 세수랑 양치만 하고 누워버렸다. 침대에 누워 눈만 요리조리 돌려보니 낡디 낡은 방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벽, 여기저기 금이 간 창틀과 문, 청소가 쉽지 않아 보이는 나무 바닥까지. 내가 주먹질하면 벽 무너지겠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랬다, 이 낡은 방도 곧 익숙해지겠지.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마드리드에 온 지 일주일이 됐다. 짐 정리하느라, 방 청소하느라, 회사 온보딩에 필요한 서류 준비하느라 관광은 거의 못했다. 그래도 도보 1시간 이내의 거리는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츄러스의 원조라는 '산 히네스(San Ginés)'에서 아침 일찍 초콜릿에 츄러스도 찍어먹어 보고, 스페인의 요아정이라 불리는 '야오야오(llaollao)'도 두 번이나 갔다.
일주일간 가장 좋았던 순간은 처음 러닝했던 날이다. 해가 질 무렵에 강을 따라 8km 정도 뛰었는데, 비로소 내가 여행이 아닌 살러 온 목적으로 마드리드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11월의 마드리드는 한국의 초가을 날씨라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구글맵 없이 몸이 가는 대로 돌아다니고, 발이 아프다 싶으면 공원 벤치에 냅다 누워버리고. 아직은 온통 낯선 풍경 투성이지만, 일주일 동안 나의 생활리듬을 조금이나마 찾았다.
이제 내일이면 회사 첫 출근이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인사를 나누자는데, 긴장 반 설렘 반이다. 사회생활에서 낯가림을 티 내는 건 좋을 게 없기에 자기 전에 자기 세뇌를 좀 해야겠다. 나는 밝고 활기찬 성격에,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다. 그동안은 이 요법이 곧잘 통했는데, 여기선 또 어떨지 궁금하네.
이 글을 시작으로 나의 마드리드 생활을 매주 기록할 생각이다. 새 회사와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아가는 과정, 추천하고 싶은 맛집이나 카페, 스페인은 물론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는 여행기 등.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을 촘촘하게 글로 남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