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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도 육체 노동자의 독서

고단한 육체는 지성을 앗아갈까?

by 석탄


나는 언제부터 사는 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을까.

말 그대로 생각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이 따라 흘러가는 인간이었다.

나는 정말 생각이란 걸 하고 있었을까?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걸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하루 9시간, 호주 지붕 위에서 땀과 에너지를 전부 쏟고 집에 돌아왔다.

씻기도 전에 화장실 문턱 앞에 그대로 누워 며칠 전 구매한 자기 계발서 책 중 한 권을 펼쳐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의지는 분명 남아 있었지만 나는 책의 첫 페이지 두줄을 읽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단 두 줄을 읽었는데 글자는 심오한 그림처럼 뿌옇게 보였고 문장의 뜻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들어 올린 나무 무게만 몇 톤일 텐데 똑같이 나무로 만든 이 가벼운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머리에서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눈꺼풀은 자동적으로 샷다를 내렸다.


지붕 위에서의 고강도 육체노동은 내 몸만 가져간 게 아니었다.

어쩌면 선척적으로 발전과 창작을 좋아하던 사람인 나의 정신까지 함께 가져간 것 같았다.

그날은 무거운 눈꺼풀의 샷다를 다시 겨우 올리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책의 단어도 머리에 제대로 입력은 거의 안되니 혹시나 머리에서 생각이 출력이 되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메모장의 빈 페이지를 열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단 하나의 글자도 쓰지 못했다.

손가락은 멀쩡했다.

열 손가락 전부 인대가 늘어나고 붓긴 했지만 타자를 치는 데엔 아무 문제없었다.

그런데 화면 속, 빈 페이지처럼 내 머리도 텅 비어 있었고 어떤 키보드를 눌러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몇 분이 흐르고 내가 머리에서 겨우 쥐어 짜낸 한 문장.

"XX, X 같다."

하루 종일 거친 일을 하고 거친 말을 들으면 내 생각도 거칠어지는 걸까.
마치 내 속에 있는 화가 잔뜩 난 다른 누군가가 써놓은 문장 같았다.

나는 그 문장을 쓰고 있는 스스로가 싫었다.

그래서 빠르게 지웠다.


그리고 또다시 빈 페이지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머리도, 마음도, 다시 하얗게 돌아갔다.

“나는 지금 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걸까?”
“왜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걸까?”
“나라는 존재는 정말 사라진 걸까?”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다시 화장실 문턱에 엎드려 누워 그 책을 다시 들었다.


눈꺼풀을 감으면 내 하루가 감긴다는 생각으로 겨우 한 페이지를 넘겼다.

한국인인 내가 한글을 읽는데도 마치 다른 나라의 문자를 해독하듯, 페이지를 넘기는 데 30분이 걸렸고 한 문단을 이해하는 데 1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며칠 동안 퇴근하면 화장실 앞에 누워 하루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

나는 여전히 책 내용이 이해도 안 되고 기억도 나지 않고 그 페이지 안의 말들이 내 것이 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붕 현장에 책을 들고 가기로 했다.

출근하기 직전, 점심시간, 그리고 퇴근 시간에 매마른 정신에 물 한 모금 삼키듯 책 한 줄이라도 읽어보려고.

그게 내 하루의 유일한 한 문장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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