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폭발하던 날
호주에서 지붕목수 일을 시작한 뒤로 나는 감정이나 생각 없이 땀 흘리고 욕먹으며 일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냥 뻗는 삶을 반복했다.
그게 내 하루의 전부였다.
"10분 줄 테니 이거 못하면 그냥 너 집 가!"
"씨 X, 너한테 주는 돈이 아깝다."
그날도 호주인 사장 스티브는 특유의 거친 말투로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방식으로 내가 일하길 바랐다.
나는 밭을 가는 소처럼 아무 말 없이 밑에서는 무거운 나무를 옮기고 지붕 위에서는 못을 박고 톱질을 했다.
스티브는 뒤에서 운전대를 잡은 주인처럼 언어라는 채찍을 휘둘렀다.
나는 그 말들이 내 감정을 때리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묵묵히 내 몸을 갈아 지붕을 세웠다.
지붕 위에서는 감정은 사치였고 생각은 독이었다.
그 모욕적인 말 몇 마디쯤은 그냥 아무 감정이나 생각 없이 흘려들어야 내 몸과 마음이 덜 다칠 수 있었다.
그렇게 믿으며 버텼다.
사실 계속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책을 읽기 시작한 뒤로 무언가 내 안에서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날은 유독 달랐다.
지붕 위, 스티브의 거친 말 한마디가 마치 아드레날린이 든 주사기를 내 심장에 꽂는 것 같았다.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빨라졌고 피가 뒤통수를 타고 머리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건가.
그날, 수많은 감정 중에서 내 안 깊은 곳에서 제일 먼저 고개를 든 건 분노였다.
결국 그 분노는 욕 한 마디가 되어 튀어나왔다.
"씨.. X"
시야가 좁아진 건가.
내 눈에는 분노의 대상 스티브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는 호주의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보다, 내 표정을 숨기기 위한 가림막이 되었다.
나는 그를 향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분노를 끝까지 입 밖으로 계속 토해내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한국어로 욕해도 알아듣는 건 나 자신뿐이니까.
그렇다고 이 감정을 가만히 삼킬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다른 방향으로 이 분노라는 감정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코에서 피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자 6미터 발아래, 회색 콘크리트 바닥만 보였다.
그리고 발을 디뎌야 할 지붕 프레임은 흐릿해졌다.
"점심 먹고 와서 하자."
다행히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지붕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아무 말없이 사다리로 향해 걸었다.
사장 스티브보다 먼저 지붕에서 내려왔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툴벨트와 망치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두고 답답한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다.
숨을 쉬고 싶었다.
정확히는 마음이 숨을 쉬고 싶었다.
도시락 가방을 열어 도시락보다 책을 먼저 꺼냈다.
신체를 위한 음식보다 정신을 위한 활자가 더 절실했다.
그냥 당장 이 염전 같은 현장에서 정신이라도 벗어나고 싶다.
내 좁아진 시야엔 글자만 들어왔다.
한 줄, 또 한 줄.
그저 자음과 모음이 이어진 활자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내 안의 분노는 다른 무언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끓는 감정은 오히려, 내 안에 오랫동안 굳어있던 질문들을 하나씩 끌어올렸다.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이런 삶이었나?’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
'나는 어떤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머리가 완전히 맑아진 것도 아니었고 모든 게 또렷하게 보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다른 감정과 생각들도 깨우는 듯했다.
유튜브 쇼츠라는 마취제를 머리에 꽂던 시간보다 문장을 머리에 꽂는 시간은 신기하게 깊고 느리게 흘렀다.
짧지만 긴 점심시간 동안 내 마음의 시야가 조금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분노라는 에너지를 책으로 흘려보내면서 내 안에서는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내 생각.
그리고 오랜만이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