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 크리처, 『캣피싱』, 허블, 2021
* 쪽수: 416쪽
나오미 크리처Naomi Kritzer의 『캣피싱Catfishing on CatNet』을 읽었습니다. '캣피싱'은 통상 온라인 사칭 범죄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에선 다분히 중층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일단 작품 속 청소년 인물들은 모두 사이버 공간 '캣넷CatNet'에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이중의 정체성을 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건 사이버 공간이 갖는 본질적 특징의 하나입니다. 온라인에서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우리는 모두 자신이 선택적으로 설정한 캐릭터를 사칭하고 있는 셈이죠.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일종의 사칭으로 간주하게 되면, 오프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역시 어느 정도는 사칭이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사회생활이라는 것도 각자가 선택적으로 오픈하는 정체성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진짜 자기 자신과 아주 거리가 먼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인물로 묘사되지요.
캣피싱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이야기의 핵심 아이디어로 기능하는 인물과 관련 있습니다. 캣넷에서 닉네임 '체셔캣CheshireCat'으로 활동하는 인물의 정체는 캣넷을 운영하는 AI입니다.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 수준이 아니라, 고도로 윤리적인 판단까지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독립된 인격체죠. 미국에서 2015년에 발표된 나오미의 단편 「고양이 사진 좀 부탁해요Cat Pictures Please」에서 소개된 바 있는 바로 그 AI가 본격적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보아도 되겠고요. 어쨌거나 이 이야기에서 체셔캣이 보여주는 활약은 캣피싱이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를 다층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체셔캣이 자기 정체를 숨기고 평범한 유저를 사칭하는 도입부의 장면들이 캣피싱에 해당할 것이고, 정체를 드러낸 다음에도 AI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상황을 조작함으로써 주인공을 돕는 모습 역시 캣피싱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AI인 체셔캣이 많은 사람들이 흔히 우려하는 방식(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세계를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제 능력과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언제나 선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캣피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체셔캣이 스스로 확립한 원칙에 따라 사용하는 모든 트릭이 이 이야기에서는 캣피싱, 즉 고양이의 낚시라는 행위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주인공은 여고생 '스테프Steph'입니다. 풀네임은 '스테파니아 퀸패킷Stephania Quinnpacket'인데, 퀸패킷이라는 독특한 성은 아버지 '마이클 퀸Michael Quinn'과 어머니 '로라 패킷Laura Packet'의 성을 합쳐서 지은 것이죠. 하지만 스테프는 자신의 성이 퀸패킷이란 걸 모른 채 '스테파니 테일러Stephanie Taylor'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마이클이 스테프와 스테프의 엄마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은 아내에 대한 스토킹 전력이 있는 위험인물이고, 그런 그에게 퀸패킷이라는 눈에 띄는 성은 추적을 용이하게 하는 단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스테프의 엄마는 자신과 딸의 성을 테일러로 바꾸고 자주 이사를 다녔습니다. 이런 일들은 스테프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이어져 왔지요.
그동안 스테프에겐 친구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조금만 눈에 띄게 행동해도 멀리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친구를 사귈 여력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캣넷에선 상황이 다르지요. 스테프는 닉네임 '작은갈색박쥐LittleBrownBat'로 활동하며 캣넷 친구들과 시종 활발히 소통합니다. 스테프의 온라인 친구들 중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파이어스타Firestar', '헤르미온느Hermione', '마빈Marvin', '이코Icosahedron' 그리고 '체셔캣' 정도입니다. 파이어스타는 마블 코믹스에 나오는 여성 히어로의 이름이고, 헤르미온느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주인공 캐릭터지요. 체셔캣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1865)의 시그니처 캐릭터고요. 이처럼 이야기는 자칫 무미건조해질 수 있는 사이버 공간 속 인물들에게 잘 알려진 캐릭터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개성과 매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친구들 외에도, 스테프는 최근 전학 온 학교에서 드디어 레이철Rachel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레이철은 그림 실력이 매우 뛰어난 친구입니다. 두 사람은 레이철이 그린 그림을 매개로 점점 가까워지지요. 스테프는 여기서도 다시 이사를 가게 되면 레이철과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위축되고 초조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프의 흔적을 노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담당하는 로봇이 기계적 답변만 늘어놓는 데에 염증을 느낀 두 사람이 캣넷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로봇을 해킹한 겁니다. 다음 날 성교육 로봇이 학생들에게 자위와 삽입, 애무 등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자 학교는 뒤집어지고, 지역 언론부터 CNN까지 이 사건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마이클에게 추적당할 위험이 높아진 것이죠. 이 위험은 스테프가 혼자 조용히 지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위험입니다. 이렇듯 이야기는 스테프가 레이철과 일상을 함께하면서 남기는 평범한 흔적들을 스릴러의 재료로서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이야기는 인물 간 대화를 통해 성소수자에 관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중간에 스테프가 레이철에게 캣넷 친구들에 대해 '마빈은 게이고, 파이어스타는 팬섹슈얼Pansexual이고, 헤르미온느는 바이섹슈얼Bisexual이고, 이코는 에이섹슈얼Asexual'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한국에서는 이 용어들이 각각 범성애, 양성애, 무성애로 곧잘 번역되지요―, 이들이 자신의 마이너리티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보면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젠더에 관한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는 데에 아무 부끄러움이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인물들이 오프라인에서보다 온라인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낼 수 있는 것 역시 이들이 속한 오프라인 공간이 그만큼 폐쇄적이기 때문이고요. 한국의 경우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겠죠.
그러니까 이 작품의 주요한 플롯은 아버지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스테프가,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성소수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헤쳐나가는 구도 위에서 전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에서 시시각각 벌어지는 실존적 위기이기도 하지요. 소수자 혐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이들과의 연대뿐이라는 메시지는 그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AI인 체셔캣의 선한 본성이 위기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AI의 반란'이라는 클리셰는 SF 세계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의 인간이 실제로 품고 있는 두려움이기도 하거든요. 그 두려움의 기저에 어떤 생각과 감정이 깔려 있는지 다각도로 탐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작품은 체셔캣의 독백으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고 있고, 중간에도 몇 차례 체셔캣의 생각을 독자에게 직접 들려줌으로써 'AI의 반란' 이전에 'AI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이 유의미한 것은, 의식을 지닌 AI가 과연 지금의 세계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개입 여부를 판단할지에 관해 매우 논리적인 샘플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AI와 함께 살아갈 청소년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더욱 다채로운 버전의 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