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오늘의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학동네, 2024
* 쪽수: 132쪽
간혹 어린이들이 모여서 뭐 하고 놀지 의논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 세계의 놀이 규칙이 어른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논리에 따라 굴러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세계엔 온갖 황당하고 짓궂고 비현실적인 아이디어가 난무하죠. 쉽게 <톰과 제리>, <나 홀로 집에>에서 보았던 술래잡기 포맷을 떠올리면 됩니다. 거기에선 술래가 구슬 더미와 바나나껍질을 밟고 미끄러지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지켜야 하는 규칙의 일부일 뿐이죠.
김태호의 『오늘의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는 그런 황당하고 짓궂은 아이디어를 재료로 삼아 빚어낸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놀이에 끼려면 이 세계의 황당함을 당연한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해요. 물론 놀이라는 게 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어린이의 놀이에 어른 참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한 인상을 줍니다. 보통 어른들은 동화 속 놀이터에 초대받지 못하거나 훼방꾼 노릇만 하다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은 대체로 어린이의 놀이 규칙을 이해도 못하고 적응할 생각도 없으니까요.
첫 번째 이야기 「오늘의 놀이, 시작!」은 한 편의 초대장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을 찾으러 온 동네 어른들이 놀이터 입구의 선을 밟는 순간 놀이는 시작됩니다. 영문도 모르고 놀이에 참가하게 된 어른들은 곧 미끄럼틀 본부 위 펄럭이는 깃발을 빼앗으면 된다는 걸 알고 작전을 짭니다. 어린이들은 물총과 물풍선, 콩알탄으로 기지를 사수하고, 어른들은 편의점에서 가져온 파라솔을 방패 삼고 밀가루 포대까지 동원해 가며 육탄공세를 퍼붓습니다. 물과 진흙과 밀가루로 놀이터는 금세 난장판이 되고, 그러는 동안 어떤 어른도 제 아이 팔뚝을 강제로 잡아끌고 가지 못합니다. 이곳에선 놀이의 시작과 끝을 결정할 권리도 오로지 어린이에게만 있지요.
「학교에 안 갔어」는 제목 그대로 학교에 가야 할 사람들이 학교에 안 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현수'네 반 친구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등교를 안 하는데,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그 이유들 역시 하나같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지만 이 안에선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엔 정말로 기발하고 유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동화의 지평을 한 뼘 넓혔다고 할 만큼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당고 할배와 시오 군」은 집안일에 무능한 남자들 이야기입니다. 한 달 전, 엄마가 유학을 간 뒤 시오는 아빠와 둘이 살게 되었습니다. 집은 썰렁하고 아빠의 수제비는 맛이 없지요. 이튿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당고 할배'가 찾아와 시오에게 집안일을 알려줍니다. 당고 할배는 아마도 한국 옛이야기에 나오는 우렁각시의 변형인 것 같은데, 우렁각시처럼 집안일을 척척 처리해 주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당고 할배의 포지션은 노련한 감독이고, 그래서 할 일은 전부 시오의 몫이 되지요. 시오는 당고 할배의 말대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고, 장을 보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저녁 밥상을 차립니다. 다 해놓고 보니 시오는 집안일에 제법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독자들 역시 그렇겠죠.
「술래를 찾아라」는 첫 작품 「오늘의 놀이, 시작!」과 여러모로 닮아 있는 작품입니다. 교실 문 앞 바닥에는 누군가 빨간 매직으로 그어놓은 X자 선이 있고, 이걸 밟으면 술래가 됩니다. 하지만 차례대로 등교하는 아이들 중 누구도 선을 밟지 않지요. 그러다 출근한 선생님이 처음으로 선을 밟아 술래가 됩니다. 하지만 아직 더 올 사람이 한 명 남아 있습니다. 휠체어에 탄 친구 '0'입니다. 0은 규칙을 알아도 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0의 휠체어 바퀴가 선을 밟자마자 친구들은 탄식을 뱉습니다. 이러면 놀이가 공평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으면 재미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놀이를 이어갈 수 있는 기발한 해법을 찾아냅니다. 그 해법은 본질적으로 약자와 소수자의 관점에서 재차 구현되어야 할 우리 시대 윤리의 대원칙을 말하고 있기도 하지요.
「재우는 재우」는 김태호 작가 특유의 언어유희가 재치 있게 들어간 작품입니다. 주인공 '재우'는 제 주변의 지친 사물들을 하나씩 재워줍니다. 늘 신고 다니는 운동화, 개통했을 때부터 한 번도 끈 적 없는 휴대전화, 컴퓨터와 모니터, 책과 교과서와 문제집들, 거실 TV와 놀이터의 미끄럼틀까지 차례대로 재운 재우는 그제야 비로소 진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일상에서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건, 반대로 내 주변 사물들에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동영배 씨, 고개를 넘다」는 스무고개 퀴즈 형식으로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준오'는 자신의 할아버지 '동영배 씨'에게 스무고개 문제의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문 뒤에 감추는 것', '집에 있으면 부자인 것', '늘 길을 막고 서 있는 것', '누구한테는 높고 누구한테는 낮은 것' 등의 힌트를 확인하면서 독자는 동영배 씨와 함께 한 고개씩 넘어가게 됩니다. 이건 그 자체로 아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인데, 이야기 끝에서 스무고개의 정답을 확인하고 나면 이런 스토리텔링이 단지 형식적으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주제나 메시지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이 가히 글로 쓰는 곡예 수준이라, 많이 감탄하며 봤습니다.
이번 동화집에 실린 작품들은 김태호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뛰어난 곡예를 그가 아니면 누가 보여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책의 제목과 내용과 형식이 모두 '놀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짜여 있어서 읽는 내내 꽉 차게 즐거운 경험을 했습니다. 언제고 재미있게 한 판 놀아보고 싶을 때 읽어보면 좋을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