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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Mar 22. 2020

게을러지려고 일하면 안 되나요?

일을 시작한 이유에 대한 거짓말들

겨우 어제 일이었다. '게을러지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모임'이라는 슬로건으로 창업한 회사 '얼리슬로스'의 2주년을 기념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어느 먼 곳도 아닌 회사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함께 웃으며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회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당장 다음 달을 걱정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옳지 않은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걱정과 고민을 거쳐 맞이한 어제가 있다.


"이런 회사는 처음이에요."라는, 이미 여러 회사들을 걸쳐 온 동료들의 말에 힘을 얻는 회식이다. 지금까지의 걱정과 고민들이 한 번에 모두 위로받는 날이다.


이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계속 보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 것인가...


그나저나 그렇게나 힘든 일이 많았는데, 이제 고작 2년 꽉 채웠을 뿐이라니…. 앞으로 또 어떤 고난들이 있을지, 또 얼마나 많은 새벽을 눈뜬 채 맞이하게 될지, 그리고 도대체 나는 언제쯤 게을러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어엿한 3년 차 회사다.



"대표님은 왜 창업하셨어요?"


'게을러지기 위해서 일합니다.'

회사 입구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회사의 슬로건이다. 회사 입구뿐만 아니라, 명함 뒷장에도 회사 로고와 함께 박아 놓았다. 심지어 로고는 지구 상에서 가장 게으르다는 생물인 '나무늘보'를 형상화 해왔다. 회사 이름마저도 그렇다. 이토록 대놓고 홍보하고 있는데!

모든 동료들이 출근하면서 매일 보는 회사의 슬로건: "WORK HARD TO BE LAZY"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창업하셨어요?"라는 물음은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받은 질문이다. 사무실을 무료로 받기 위해서 발표한 자리에서부터, 투자자를 만났을 때, 기자님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리고 동료들과 편하게 밥을 먹는 자리에서까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내게 이 질문을 한 사람들에게 답한 내용과, 요즘의 내가 답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처음에 창업한 이유를 질문받았을 때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었다. 금전적으로 충분한 여유를 갖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노동의 목적이 당장 내일을 연명할 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노동자로서 일을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내 노동으로 창출한 가치의 최고 수혜자는 회사가 아니라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업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창업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다 보니, 내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다 보니 조금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불안했기에 창업을 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사회구조상 언젠가 사람은 창업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하기 시작했었다.

나는 과거 내 직업의 생애주기가 짧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퇴사로, 그리고 또 언젠가는 창업으로 내몰리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언제가 한 번 창업을 해야 한다면, 창업을 당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 시기를 고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는, 스스로 능력에 자신 있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창업의 적기라고 생각해서 창업했다고 이야기했다.



왜 일을 시작했냐는 질문에 답할 때마다,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게 진짜 100% 솔직한 나의 답인지, 아니면 이들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 순발력을 발휘에 만들어낸 답변인 것인지.


"왜 창업했어요?"

최근 친하게 지내는 스타트업 대표님과 함께하는 저녁 자리에서 불현듯 나온 말이다. 나와 똑같이 창업을 한 동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였던 내 답변은 신속하고 단순했다.


"일이 좋아서요."

아무런 불편함 없는 상태에서 편한 상태에서 나온 이야기다. 아마도 이게 내 진심이었을 거다. 지금까지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겪었던 많은 사건과 지금의 나를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일을 만들어서 해왔다.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좋았다. 그냥 순수하게 일을 즐겨왔던 것 같다. 그런 이유가 아니면 해석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최근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을 좋아합니다.' 대답했던 결과 = '일반인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일반인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그냥 일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정말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임 잘 드러나는 일이 있다.

10년 전 2010년, 나는 서울시 소재의 한 기관에서 공익 요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공익 요원답게 정말 단순한 일이었다. 사무소에서 나오는 서류를 시스템 상에서 스캔하는 것. 그리고 공익 요원 업무의 성격상, 그리고 단순 업무 성격상 내가 일을 잘하고 싶어도 딱히 잘할 것도 없고, 못하고 싶어도 딱히 못할 것도 없는 그런 업무였다.


스캔 업무는 정말 단순했다.

서류의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하고, 시스템에 스캔 서류의 고유번호를 입력하고, 스캔 버튼을 누르고, 20여 장 서류가 잘 스캔되었는지 확인하고 저장만 하면 되었다. 다만, 그 양이 정말 많았을 뿐. 하루에 1,000장에서 1,200장의 서류를 스캔해야 했다. 이 업무는 굉장히 지루한 편이었는데, 스캔 버튼을 누르고 스캐너가 문서를 한 장씩 스캔하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숙해져도 능률 개선의 여지는 희박해보였다. 장비가 노후된 것이니까.


하지만, 능률 개선의 여지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1인당 한 대의 컴퓨터만 사용해야 한다는 룰도 없었고, 사무소에 남는 컴퓨터와 스캐너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총무과에 스캔을 할 수 있는 컴퓨터 한 조를 더 요청해서, 컴퓨터 두 대와 스캐너 두 대를 이용해서 스캔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두 대를 동시에 사용하니, 업무 능률이 정확히 두 배로 늘어나는 기적. 지금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두 조의 컴퓨터와 스캐너를 동시에 정확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방법을 찾아서 이용했다.

당시 내가 컴퓨터 두 대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서 했던 업무 리스트는 이랬다:

1. 응용 소프트웨어 "시너지(Synergy)" 설정

시너지는 한 조의 키보드, 마우스와 네트워크 통신을 통해서 다수의 컴퓨터를 제어할 수 있는 응용소프트웨어다. Mac OS와 Windows를 동시에 지원한다. 두 대 이상의 컴퓨터를 동시에 활용할 때, 각기 다른 키보드, 마우스를 활용하면 업무 복잡도가 높아져서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2. 업무 보조툴 제작을 이용한 반복 업무 축소

이때 느낀 것이, 실문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스캔하기 위해서 거쳐야 되는 과정이 파편화되어있어서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간소화된 UI를 만들어서 이용했다.
내가 만든 UI에서 작업하면, 동시에 실제 시스템 프로세스 클래스를 뒷단에서 조작하여 스캔 작업을 기록하는 형태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사용했다.

3. OCR 방법 탐구

지금은 다양한 매체에서 OCR(문자열 인식)을 지원해주지만, 2010년까지만 해도 막 기술이 도입되던 시기였다. 서류에는 담당 공무원들이 자필로 작성한 서류 번호가 있어서, 이를 시스템에 입력하고 스캔해야 하는데, 단순하지만 실수가 자주 반복되는 일이어서, 가능하면 컴퓨터에 맡기고 싶었다. 비록 인식률이 너무 떨어져서 테스트만 하고 말았지만.



이렇게 업무 능률이 오르자 전임자가 잔뜩 쌓아두었던 스캔 숙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고나니, 스캔 외에 다른 일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게 공익 요원으로 배치된 지 2개월 즈음되던 시점이었다. (전임자 나쁜놈은 한 달 이상 그냥 놀다 갔음이 틀림없다...) 이 당시 사무실에서 내가 발견한 문제는:

관공서의 성격상 스캔한 서류는 반드시 원본으로 보관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30년이나.

그리고 가끔 이 원본을 찾을 일이 있다는 것. 하지만, 아무도 원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원본 서류를 찾아야 할 일이 생기면,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 다수가 고생한다는 것.

그리고 나도 종종 스캔 원본을 찾기 위해서 창고를 뒤지게 된다는 것.

하루에 3만 장 이상의 서류를 저장하는 사무소에서, 특정 일자에 스캔된 한 장의 서류를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느낌이라는 것.

나한테 이런 일 시키면 귀찮고 화가 난다는 것.


스캔 후 코드를 짜던 내 자리와 보드로 사용했던 전지, 그리고 잠이 와서 그린 물고기. 10년 전의 나는 꽤나 귀여운 취향이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나는 직접 별도의 보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오전에는 스캔을 하고, 오후에는 코드를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그램의 역할은 단순했지만 효과적이었다:

메모리에 상주하며 시스템의 상태를 계속 체크해서, 누군가 스캔 업무를 진행 중일 때 스캔된 종이 매수와 어떤 서류를 스캔했는지를 기록한다. (이건 거의 해킹에 가까웠지만... 음..)

한 상자가 꽉 찰만큼의 분량을 스캔하면, 스캔한 문서를 상자에 넣으라는 메시지를 출력하고 엑셀 파일을 생성해준다.

엑셀 파일은 임의로 만든 규칙으로 작성된'서류 상자 번호'와 이 상자에 들어있는 서류들의 목록  및 순서가 기록되어있다.

스캔 작업자는 엑셀 파일을 종이로 출력하여 상자에 함께 넣고, 상자에는 엑셀에 적혀있는 '서류 상자 번호'를 별도로 표기한다.

엑셀 파일들은 한 컴퓨터로 전송해서 함께 보관·관리한다

이후 서류를 찾을 일이 생기면, 엑셀에서 서류 이름만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탐색 범위를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으며, 일일이 서류 상자를 열어보지 않아도 오케이.

행방불명된 서류를 찾기 위해서 나까지 불려 가지 않아도 된다.

행복!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공익 요원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월 20만 원의 교통비를 지급받는. 그런데 그냥 해보고 싶었다. 문제가 있어 보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보상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일이 좋았다. 10년도 전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써놓으니 회사 현관에 빛나는 "WORK HARD TO BE LAZY" 문구가 괜히 부끄럽다. 나는 정말 우리 회사 이름과 슬로건 앞에서 당당한 사람인가? 이렇게 일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나는 이제 사회적으로 통념되는 게으른 사람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이 회사의 슬로건이 내가 아닌 내 동료들에게는 순수하게 열심히 일하면 (여유가 많아서) 게으르게 살 수 있다는 문구로 읽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이미 사회적 통념에서는 틀려먹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열심히 일해서 게을러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또 다른 일을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이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벌써 더 많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염원을 담아 회사 이름과 게을러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일이 좋다. 내 능력이 닿는 한 더 많은 일을 해보고 싶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껏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시작했나 보다.





내일이 되면 정말로 3년차 기업이다. 여기까지 잘 살아남은 것도 기쁘지만, 아직도 내가 바쁘게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이 좋다. 그리고 이 일들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이 기쁘다. 또다른 고난을 겪을 것을 알지만, 그 고난 끝에 함께 웃을 수 있을 이들이 있음에 든든하다. 내 일을 시작하기를 잘했다.


명함 뒷장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고 싶다. 워크 하드 해야지.


이재원 소속 직업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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