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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Apr 13. 2020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바쁜 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요즘은 아무리 바빠도, 가능하면 주말은 오롯이 나를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주말 반나절을 비워놓고 내가 하는 일은 햇볕을 받으며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해가 드는 시간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람이 들어오는 자리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꽤나 멋진 기분이 든다. 요 몇 주 주말에는 제법 시간을 들여 피아노를 쳤더니, 꽤 오랜 시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치고는 손이 많이 풀렸다. 오래전에 연습해두고는 잊고 있었던 많은 곡들을 다시 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새로운 곡을 연습해보고자, 예전에 모아두었던 악보들을 뒤지다가 눈에 밟히는 악보가 하나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그것이다. 제목만 보아도 가슴이 아려오는 이 곡의 멜로디를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 공간에 혼자 살기 시작한 지 벌써 네 달이 지났다. 


이 공간에서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주말이 되면 내 공간에 당신을 맞이하는 상상을 했었다.

당신과 함께 나란히 앉아 서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잔뜩 만들어둔 책장에, 서로 좋아하는 책을 한 권씩 채워나가고 싶었다. 소년 만화와 에세이와 그리고 기술 서적이 뒤엉킨 웃긴 책장이 될 거라며 혼자 상상하며 웃었더랬다. 기다란 소파에 서로 반쯤 기댄 채 하루 종일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었다. 영상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나는, 아마도 중간중간 휴대폰을 보거나 당신의 볼을 만지며 장난을 쳤을 거다. 까무룩 낮잠을 자고. 산책을 나가고.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먼저 잠든 당신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그런 상상이었다.


네 달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걸음을 걸었을까, 한 달에 평균적으로 15만 걸음 정도 걸으니, 그간 내딘 발걸음이 벌써 60만 걸음 정도 되었으리라. 함께 하기로 했던 많은 약속을 뒤로한 채, '올해가 가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작년에 걸어 놓은 채 멀리도 걸어왔다. 나는 이제 와서 깨닫는다. 그 날 이후 걸어왔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입안이 쓰다.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니 명심하라는 영화의 대사가 떠올라서 혹은 주말 이틀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


이제는 행복했던 시간보다, 서로 힘들었던 시간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고, 불안해하고, 불편해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난 네 달, 나는 혼자서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너무 많이 반복해온 것 같다. 이제 내 상상이 현실이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제 닿을 일도 없는 넋두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른 궤도를 가진 채 살아와, 한 번 교차한 우리는 이제 다시는 교차하지 않을 것임을, 앞으로 멀어질 뿐임을 알고 있다.



"이렇게 배려 많은 사람은 처음 봐요."


어려서부터 나는 타인을 향한 배려가 습관처럼 몸에 익숙한 사람이다. 아마도 내가 과거에 겪었던 많은 일들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불편한 기색을 살피는 것이 익숙해진 탓이겠다. 타인의 불편함이 내 불편함이 되는 삶을 살았기에, 나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한 때는 내 생존 전략이었던 이런 행동들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부터 나는 내 삶의 자랑거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또 내 행동에 별로 자신이 없어졌다.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저는 당신을, 여러분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하는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 질문을 통해서 나는 배려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나는 지난 관계에서 어딘가 고장나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려가 많은 사람이라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음을, 지친 당신에게 기꺼이 자신의 한켠을 내어줄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슬픔을 나누어 감내해줄 사람이 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안도할 수 있다. 감내할 수 있다. 그냥 이 관계이기에, 특별했기에 달랐음을 알고 있기에 내 모든 감정을 잘 갈무리할 수 있다.


나의 오만을, 당신을 온전히 내 삶에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내 오만을 용서하기를. 그리고 온전히 당신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고장나버린 내가 고쳐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기를.

이재원 소속 직업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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