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원 Dec 20. 2020

데모데이를 마치고 내려와서

초기 스타트업 데모데이 피칭 후일담


데모데이 당일 여섯 시에 발표자료를 마감하고 뻔뻔하게 발표하고 있는 나


처음 창업을 했을 때, 각종 데모데이 무대를 기웃거리던 것이 생각난다. 행사라는 행사는 다 쫓아다니면서 무대 위에서 각자의 사업을 설명하는 스타트업 대표님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늘 마음 한구석에 무대에 올라서 우리 회사와 동료들을 소개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언젠가 나도, 그리고 우리 조직도 저들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봐야지, 하고.


그로부터 2년 9개월이 지났다.

며칠 전 아마도 내 마지막(진짜 마지막이면 좋겠다…) 데모데이 행사를 치르고 내려왔다. 이제 더 이상 무대 위에 서기 위해서 준비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해방된 기분이 들면서도 동시에 서운하다. 아마도 나는 무대 위에 서는 것을 꽤 좋아했었나 보다.


마지막 행사는 동료들과 함께 무대를 조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마지막 데모데이 무대에 서기까지, 나는 네 번의 데모데이 행사를 치러냈다. 데모데이를 통해서 또 다른 사업 기회를 발견하기도 했고,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고,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데모데이 끝나면 어떠세요?


무대를 마무리하고 쉬고 있으니, 동료 스타트업 대표님께 메시지가 와있었다. "죽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른 스타트업 대표님들이 데모데이에 대해서 작성한 글을 딱히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데모데이 행사가 초기 스타트업의 꽃으로 알려진 것에 반해 알려진 것이 너무 적다. 초기 스타트업을 이끄는 대표의 입장에서 데모데이를 준비하고 치르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본다.


지금까지 제 데모데이 궤적은 이렇습니다:

· 2018년 3월 창업
· 2019년 1월 '서울창업디딤터' 데모데이 피칭
· 2019년 5월 'IBK창공' 데모데이 피칭
· 2019년 6월 '신용보증기금 NEST' 데모데이 피칭
· 2019년 9월 'U-Connect' 데모데이 피칭
· 2020년 12월 '우리은행 디노랩' 데모데이 인터뷰
· 2020년 12월 '롯데액셀러레이터' 데모데이 피칭


이런 사람들이 읽어볼 만합니다:

· 데모데이를 준비 중인 초기 스타트업 대표
· 발표평가를 준비 중인 예비창업자/초기 스타트업 대표
· 데모데이에 환상을 갖고 계신 누구나



발표는 대표의 미덕이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지만, 나는 창업하기 전에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발표 수업 같은 것이 없기도 했고(아아, 연식 인증이란...), 대학 또한 발표를 경험할만한 학과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라,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아직도 편하지 않다.


사람들이, 심지어는 나와 함께 하는 동료들까지 놀라는 이유는, 이런 자리에 나는 꽤 익숙하게 다니는 편이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부터 온갖 발표 평가, 공개 IR, 강연까지 꽤나 편한 모습으로 다녀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강단 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큰 숨을 들이켜고, 온몸을 스트레칭해야 겨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발표 연습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자료를 만드는 것도 처음, 발표를 하는 것도 처음. 자료를 만든 것은 좋았는데, 이를 원하는 대로 설명하는 것이 곤욕이었다. 고작 5분 발표를 준비하는데, 60시간이 넘는 연습을 했었다. 매일 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면, 나는 처음부터 같이 하는 개발자 동료와 남아 발표 연습을 했다.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가정용으로 나온 내 빔프로젝터는 내부 열을 이기지 못하고, 전원이 계속 내려갔었다. 매번 발표 자료를 만들고 있을 때면, 비닐 팩에 얼음을 담아 빔프로젝터에 올려놓고 발표 연습을 하던 그 해 겨울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내 휴대폰에는 200시간이 넘는 내 영상이 기록되어 있다.


60 시간을 연습하고 간 첫 발표는, 잔뜩 긴장해서 랩을 하고 내려왔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질의응답은 지금 떠올려봐도, 내가 왜 그렇게 답변했나 싶다. 그럼에도 결과는 좋았다. 그 덕에 우리는 1년 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공간과 천만 원의 사업지원금, 그리고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다음 50 시간으로는 칠천만 원 정도의 사업지원금을, 또 그다음으로는 다시 1년 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사무공간을 지원받았고, 추천을 받아 다양한 데모데이에 설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발표를 잘하면 무료로 사무실을 줍니다!


데모데이는 각 기관마다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누구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합격했다고 모든 기업이 데모데이 무대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간의 제약상, 시간의 제약상 후보를 선발하는 과정을 걸쳐 데모데이에 올라서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선발은 '발표'로 평가받는다.


"저는 발표를 잘못하는데, 어떻게 하죠…."

예비창업자분들 혹은 초기창업자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대표'이기 전에 '실무자'로서, 업무에 집중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볼 때가 있다. 발표는 체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실무에 집중하시는 분들을 굉장히 많이 보았다. 하지만, 스타트업 필드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면, 그 순간부터 정말 수많은 발표를 하고 다닐 것을 각오해야 한다. 다른 분들 다 받는다는 정부지원금, 기금 대출, 그리고 투자 유치까지, 모두 다 발표 능력이 부족하면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


발표 체질이 아니라면, 힘들겠지만 노력해서 스스로 발표 체질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데모데이를 끝내고 내려와서 나는 내 동료들에게 '저는 무대체질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불과 2년 9개월 전까지, 남들 앞에 서면 얼굴부터 빨개지던 사람이었다. 긴장해서 말부터 빨라지던 사람이었다. 

내 휴대폰에는 200시간의 영상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된 영상'만 200시간이 넘는다. 영상을 찍고, 돌려보고 다시 연습하고 한 시간은 그것보다 훨씬 길다. 찍지 않은 영상은 그것보다 더 길다. 그래도 500시간은 되지 않을 것이다.

발표 체질이 아니라면, 바꾸면 된다. 나는 겨우 이 정도 노력으로 이렇게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업과 사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없지만, 적어도 발표는 마음대로 되거든.


스타트업 대표는 마케터이기 전에, 개발자이기 전에, 혹은 디자이너이기 전에 경영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영자는 모든 일의 가치를 계산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해서 똑똑하게 일을 해야 스타트업이 스타트업으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스타트업 대표의 발표 연습은 조직의 성장에 가장 빠르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내가 각종 발표 준비로 밤을 새우고 있을 때,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내 동료들에게 했던 내 질문이다.

"만약 일주일 밤을 새우면 1억 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실 스타트업 입장에서 데모데이에 올라가는 것은 1-2억 원 문제가 아니다. 나는 주요 데모데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혹은 각종 스타트업 지원 사업에 합격하는 것이 초기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를 가장 빠르게 올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탄탄한 사업모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대표의 발표 능력도 필요하다.


대표의 발표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목록:

· 예비창업자/초기창업자 지원 프로그램
· 중진공, 신용보증, 기술보증 스타트업 대출 프로그램
· 각종 액셀러레이팅 기관을 통한 시드 머니 조달
· 서울창업허브 및 다양한 기관의 무료 혹은 염가의 사무실 임대
· 각종 지원 프로그램의 사업화지원금
· 각종 창업경진대회의 상금



데모데이가 가져다주는 것들


아직 데모데이 경험이 없는 동료 대표님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것 중 하나는, 무대가 끝난 후 조직이 어떻게 변하는 지다. 지금까지 나는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데모데이를 두 번, 100명 이상이 참여하는 데모데이를 두 번 치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데모데이 행사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첫 데모데이 행사가 끝난 후, 나는 꽤 많은 투자 기관의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정도는 정신없이 미팅을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데모데이가 끝나면 바로 큰 기회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드라마틱한 성과는 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데모데이를 준비했던 많은 동료 대표님들을 본 결과, 데모데이에서 바로 투자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우리 조직 역시 데모데이를 통해서 투자를 유치했으나, 데모데이 이후 5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계약서를 작성했다.


만약 자금조달의 목적으로 데모데이 무대에 올랐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데모데이의 성과는 자금조달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데모데이는 스타트업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사업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


데모데이에 서기 위해서는 발표 자료가 필요하다. 좋은 발표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논리가 필요하다. 좋은 문제 정의, 좋은 해결 방안, 좋은 비즈니스 모델, 좋은 비전.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나열해놓고, 5분 내외의 하이라이트를 뽑아야 한다. 내 사업의 장점들을 나열해서 하이라이트를 뽑아보면, 우리가 정말 집중하고 있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것을 정말 잘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다음에 무엇을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도 한다.


작년 IBK 창공 데모데이에서. 영상으로 다시 봐도 진짜 사람 많았구나 싶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데모데이라면, 데모데이가 끝난 후 영상이 공개된다. 나는 이 영상을 편집하여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동료들과 우리의 위치와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


"우리가 말이 좋아서 스타트업이지, 우리 매출은 우리가 밥 먹으러 가는 이 가게보다 적어요."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는 것은 체력과 동시에 정신력까지 요구한다. 작은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는 불안감. 주변 어른들의 걱정.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아마 각자의 집에서 많은 걱정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가 갖고 있는 고민.


스타트업 대표가 개개인의 걱정을 모두 지워줄 수는 없지만, 데모데이 무대를 통해서 꽤 많은 것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데모데이에 올라서 회사의 위차와 비전을 공유하면,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이 내가 갖고 있는 비전을 통해서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된다. 내 동료 중 하나는, 부모님이 내 영상을 보시고 걱정이 많이 줄었다고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데모데이에 설 정도가 되면, 스타트업 대표는 조직의 현실적인 위치가 어디인지 피부로 체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타트업 대표자가 아닌 동료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데모데이에 올라서고 받는 환호성과 긍정적인 피드백을 동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보다 선명한 비전을 조직 전체와 함께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재 채용의 유리함


나는 사람을 채용할 때마다 내 데모데이 영상을 걸어 놓는다. 많은 글보다 영상 하나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직이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 우리 조직의 서비스, 가능성, 그리고 비전. 채용 후에 이러한 것들을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 데모데이 영상을 공유하는 것이 더 세련된 말로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데모데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잘 정제하고 압축해서 준비한 말들이니 틀림없다.


또한, 스타트업 필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명 액셀러레이터 출신이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고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스파크랩스, 프라이머, 롯데액셀러레이터와 같은 주요 액셀러레이터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면 필연적으로 데모데이 영상이 남게 되는데, 이들 프로그램은 워낙 유명해서 스타트업 필드로 넘어올까 고민하는 이들이 영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매 데모데이마다 담당 기관을 못살게 굴었던 것 같다. 무대 위에서는 별다른 실수를 하지 않고 할 말 다하고 내려왔으나, 항상 발표자료를 행사 당일까지 갈아엎어서 주변을 긴장하게 했다. 이번 데모데이는 행사 당일 새벽 여섯 시까지 발표자료를 만드는 기행을 저질러, 담당 심사님 뿐만 아니라 동료 대표님들의 걱정을 샀다. 음, 지난 데모데이 때는 행사 당일 오전 12시에 발표자료를 마감하고는 한 번 연습하고 다음 날 뻔뻔하게 발표를 했더랬다.


이번 데모데이를 마치고 나니, 그간 오래 붙여두었던 '초보운전', '초기기업' 딱지를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매번 데모데이 무대에 올라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꼭 해야 하나요….'라고 투덜투덜거렸지만, 내게 많은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꽤나 재미있게 즐겼다. 앞으로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심 아쉬운 것을 보니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마지막에서는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다음에 또 하라면 더 잘할 자신이 있지만, 데모데이 행사는 이제 여기에 흔적으로 남겨두고 더 큰 일을 준비하러 간다.


만약 데모데이 참여를 고민하고 있는 초기 스타트업 대표님들이 있다면, 혹은 데모데이 행사를 하는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지원을 고민하고 있는 스타트업 대표님들이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꼭 참여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만 잘할 수 있으면 좋은 기획서 아닌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