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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영 Dec 16. 2016

명랑의 탄생

작품집 <아직, 해가 저무는 시간> 원고 #1




명랑의 탄생



아차산역 출구를 나와서 낯선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영화사 입구. 버스에서 내리니 형형색색의 등산객들이 아차산으로 향하고 있는 일요일 아침이다. 조금 긴장한 마음으로 절 앞에 다가가니 약속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영화사의 주지 스님이자 직장 이사장인 송월주 스님을 만나기 위해 나온 직원들, 아니 '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원'들이다. 창주 위원장은 큰 키에 검은색 코트와 검정 슈트를 걸쳤다. 형형색색 등산객보다 올 블랙의 그가 더 눈에 띄었다. 이사장을 만나게 될 때를 생각하여 정중한 형식을 차렸다. 다른 이들은 조합 이름이 등에 찍힌 연두색 조끼를 꺼내 입었다.


조끼 하나 맞추는데도 의견이 분분했었다. ‘노조’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었지만, 조끼는 낯선 이미지를 나에게 걸치는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아무리 색깔을 밝게 골라도 조끼는 익숙하지 않았다. 조끼를 입고 일하자는 ‘조끼 투쟁’부터가 긴장되는 날의 시작이었다. 나의 정체성을 색깔로 드러낸다는 일이며, 조끼를 입은 직원이 아닌 직원을 바라보는 시선, 조끼를 입지 않은 직원이 느낄 감정, 이것을 막아서려고 촉을 세우고 있는 총무팀 직원들과 사무국장이 다 표면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일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 같았다. 작은 행동 하나를 같이 해나가기에는 각자의 머뭇거림과 용기가 얽혀 있었다.


나의 계약 기간은 일 년. 이월에 있던 공개채용에서 떨어졌고, 국제협력팀에서 추가로 사람을 찾다가 채용되었다. 공채가 지났기 때문에 임시 '프로젝트 계약직'으로 계약하고, 추후 공채에 정규채용으로 전환하자는 사무국장의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공채로 들어온 이들도 모두 2년 계약직 형태였고 2년이 지나고 심사를 통해 전환한다는 내부 방침이었다. 모든 채용을 계약직으로 하는 상황과 '함께일하는재단'이라는 이름이 갸우뚱했지만, 그때는 관례상 그렇다고 하니 '성실히'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단은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모여진 성금이 '실업극복위원회'로 사용되고 남은 돈으로 만들어졌다. 실업이 사회문제가 되었고 '사회적기업'이란 연구와 화두도 '함께일하는재단'을 통해 처음으로 시작됐다. 금 모으기 운동에 앞장섰던 종교계 세 어른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송월주 스님이 재단의 위원장이었고, 지금은 송월주 스님만이 이사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2010년 전후로 내부갈등이 시작되었고, 한차례 직원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계약직' 채용이 사람을 검증하기 위한 명분으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모든 채용이 계약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일 년 계약 기간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자 했지만, 내 역할을 중요하게 인지하게끔 PT 슬라이드를 만들더라도 '티 나게' 했다. 소속된 국제협력팀의 일 자체도 해외원조나 사회적기업 간 국제포럼을 여는 등 티 나는 분야였기에 나는 계약연장을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처음 출근하던 2012년 삼월, 엘리베이터 옆에 '노동조합 창립총회' 글이 붙었다. 이러한 상황을 문제시하는 직장 내 여론이 노동조합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었다. 노동조합의 존재가 반가웠고 이곳이 건강한 직장이라는 순진한 생각도 했었다.


절 입구에서 1인 시위용 피켓을 들고 섰다. 주지 스님 실명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신도들이 다니는 입구에 선다. ‘송월주 이사장님, 겉으로는 일자리 창출. 내부 직원에게도 측은지심을.’ 같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행여나 1인 시위에 어긋날까 봐 서로 간의 거리를 예민히 신경 쓰며 섰다. 얼마 안 되어 총무팀에서 차를 끌고 나와 직원들과 현장을 촬영하며 지나갔다. 몇몇 신도들이 눈길을 주며 지나갔고 간혹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신도들에게 항의를 받거나, 어깨가 넓은 사람들에게 끌려가거나 하는 소동을 우려했지만, 우려는 우려로 끝나버렸다. 이곳을 매일 청소하는 청소부 아저씨가, ‘지금 주지 스님 없다’라며 전용 차량과 절의 큰 행사 등등의 정보를 알려주었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한 시간 남짓의 조마조마한 시간이었다. 절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마지막 단풍과 은행잎이 찬바람에 흩날렸다. 파랗고 말끔한 하늘이 참 예쁜 늦가을 사찰 풍경이었다. 그림에 재미를 붙인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던터라, 이 풍경이 하나의 소재로서 생생히 들어왔다.


SNS로 익숙하게 봐왔던 1인 시위임에도, 자신의 이슈로 피켓 하나 드는 행동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도둑질도 아닌데 금기된 선을 넘는 사람처럼 이렇게 긴장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노조’라는 언어에 씌워진 이미지였다. 처절함, 폭력, 머리띠, 구호, 종북, 빨갱이, 파업, 교통 불편 유발자, 경찰과 대치하여 충돌하는 사람들, 싸우다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이미지들, 미디어를 통해 내 의식에 딱딱하게 누적되어 있었고 ‘겁’으로 나타났다. 조끼를 입을 때도, 피켓을 들 때도 각자의 겁은 계속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는 노조 운영진을 자처한 팀장급 직원들이 먼저 앞에 서며 사람들의 겁을 누그러뜨렸다. 절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가을 하늘 풍경과 어울려 생경하고 아름다웠다. 긴장이 풀리고 보인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앞으로 노조에서의 일들을 다르게 표현하고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집에 돌아가서 바로 스케치를 했다. 선이 서툴렀지만, 색감이 화사했다.  파란 하늘 절의 기와지붕, 노랑과 주황색 단풍이 건물에 묻어나게 채색을 올렸고, 창주 위원장에게도 색이 닿도록 그렸다. 다음날 조합원 카톡 창에 그림을 찍어 올렸고, 카톡 창은 환호했다. 아름다움은 안도감을 주었다. 우리가 정의의 편,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당위만으로 떨쳐내기 어려운 불안감과 걱정이 잦았다. 그림을 그려내고 함께 감상하는 과정은, 긴장된 순간들을 넘어가며 우리가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했음을 확인하는 확신 같았다. 창주 위원장은 그 후에도 이 그림을 참 좋아했다.


그림을 함께 감상한 계기로 조합 내에서 난 ‘박 화백’으로 불리었고, 스스로도 현장의 여백을 꾸미는 예술가로 정체성을 띄려 하였다. 이후의 시간은 수위가 높아지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직장 앞 출근길 1인 시위, 점심시간 집회, 주차장 천막 농성, 촛불문화제, 파업, 추위가 거세어지는 12월부터 긴 겨울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수위를 높여야 하는 순간마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천막’이라는 단어가 조합과 재단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할 시기에 ‘천막 농성’을 처음 해보는 조합원들도, 사측도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총무팀은 천막이 계획된 전날, 남자 직원들을 모아서 천막 설치를 저지하자는 별도의 지시를 내렸고, 옥상 문을 폐쇄하였다. 행정과 사무만 조용히 해오던 직장이라 생각하면 큰 사건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재능교육 노조가 혜화동 성당 종탑 위에 올라섰고, 현대자동차 노조가 철탑 위에서 겨울을 넘기고 있었다. 이 추위에 극한의 경계에 올라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그래도 꿈꿔야 하는 날은 있어야 버틸 수 있지 않겠나. 철탑과 재단 건물을 그려 넣고 아래에서 싸움이 끝나고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림 제목은 ‘명랑 파업’이었다. ‘명랑’은 조합의 공식 컨셉이 되었다. 조합은 파업까지 감행하게 되었고, 김제남 의원의 도움으로 국회에서 기자회견도 열었다. 겨울은 이사진으로부터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림도 계속해서 그려나갔다. 나의 1년 계약 만기일은 빠르게 찾아왔고, 2013년 3월 4일부로 책상을 정리하게 되었다. 창주 위원장은 민주노총을 통해 법적인 검토도 해보았지만, 법적으로 사측에게 문제 될 소지가 없는 계약 만료였다. 노조와 관련한 그림도 거기까지였다.


계약만료는 내가 사회에서 언제든지 소외될 수 있다는 슬픈 아픔이었다. 이후 ‘함께일하는재단’ 처럼 선하거나 대안적 의미를 표방하는 큰 단어들에 냉소적이 되었다. 대신 묵묵히 노동을 하는, 해야만 하는 삶에 대한 경외심과 애잔함이 자리를 잡았다.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  어딘가 소외된 삶이 있다면, 여기에 삶이 있다고 조명을 비춰주며 함께 들여다보는 작품을 계속 그리고 싶었다. 이후 함께 한 예술팀의 이름이 ‘명랑마주꾼’이 되었다. 밝을 명, 밝은 랑, 환한 빛을 의미했다. 지하철에서 주소 적힌 명품 쇼핑백을 한 아름 짊어지고 앉아있는 아저씨, 패스트푸드 매점 쓰레기통에서 온종일 분리수거를 하는 할머니. 우리가 느껴야 할 불편함마저 표백해 버린 도시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에게 오늘도 시선이 머문다.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명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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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 8-9 페이지
작품집 10-11 페이지




작품집출간 후원 모금을 진행중입니다


저의 첫번째 작품집 사전구매자이자 출간을 지지해 줄 후원자 분들을 모집합니다.

제작은 현재 교열작업 중에 있으며, 1월초에는 인쇄소를 다니며 인쇄공정을 진행하려 합니다.

예상 출간일자 및 배송일자는 2017년 1월 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책 배송이 완료 된 이후에는, 관계가 이어지는 동네서점에서도 만나 보실 수 있도록 유통할 예정입니다.

추후 2017년 상반기에 전시회 및 출간기념회 등으로,

모금에 참여해 주신 분들과 함께 ‘책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려 정중히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작품집 설명은 https://brunch.co.kr/@noranseed/61 이곳에서 확인해주세요.


*우리은행 1002-248-892186 박우영

*모금기간 2016.12.19(월) - 2017.1.4(수) 자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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