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와플, 8월 가재, 12월엔 샤프란빵...알아두면 쓸모있는 음식달력
엄마는 절기마다 먹는 음식을 빼놓지 않고 차려 주셨다.
생일마다 미역국, 설에는 떡국, 복날이면 삼계탕,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다. 정월 대보름에는 부럼을 깨물었다. 오곡밥과 나물 때문에 나는 설보다 정월대보름을 더 좋아했다. 명절이면 우리 집은 가내수공업장으로 변해 온 가족이 역할을 분담하고 모둠전을 부친다.
스웨덴에도 특별한 음식을 먹는 날이 있다. 절기가 되면 친구 또는 가족끼리 모여 해당 요리를 하며 파티를 즐긴다. 대부분은 수백 년씩 이어온 전통이다. 일찌감치 독립해 혼자 사는 친구들도 마치 선약을 해 놓은 것처럼 절기마다 음식을 만들며 전통을 꼬박꼬박 잘 지켰다.
혹시 스웨덴에 갈 일이 있다면 스웨덴식 음식 달력을 참고하시라!
자 여기서 퀴즈! 그럼 이 날은 무엇을 먹는 날일까요?
와…플?
영특하기도 하지, 와플데이에 와플먹는 거 어떻게 알았데?! 하지만 처음부터 와플을 먹는 날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기원이 재미있다. 성경에 따르면 본래 3월 25일은 수태고지의 날이다. 이름만으로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수태고지의 날은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찾아와 그리스도의 잉태를 알린 날이다. 말 그대로 수태(아이를 갖게 됨)를 고지한 날이다. 자연히 아기 예수가 탄생한 크리스마스보다 9개월 앞선다. 북유럽은 교회 가는 사람은 없어도 삶에 루터교의 전통이 배어 있는지라 기독교 절기를 꼬박꼬박 지켜왔다.
그럼 수태고지의 날에 왜 뜬금없이 와플을 먹는가?
수태고지의 날을 스웨덴어로 보르프루다겐Vårfrudagen(Our Lady’s Day)이라고 한다. 우리의 여인(결혼한 여인)의 날, 성모의 날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세 단어를 붙여서 빨리 읽으면 보펠 다겐 Våffeldagen(waffle day) 즉 와플의 날처럼 들린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나는 처음부터 당연히 와플의 날로 들었다. 해고 통지의 날도 알까말까인데 수태고지의 날이라니, 보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수태고지의 날’보다 와플의 날이 귀에 살포시 안착하는 것은 단지 스치는 낙엽처럼 워워~ 쓸쓸한 계절 때문은 아닐텐데.( 이거 이해하면 옛날 사람ㅎㅎ) 세상에는 나처럼 단순한 사람이 더 많은지라, 성경의 맥락과는 아무 상관없이 보르프루다겐은 보펠 다겐 즉 와플을 먹는 날이 되었다고 한다.
뚱뚱한 화요일은 참회의 월요일과 재의 수요일 사이의 화요일로 매년 달라진다. 이날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당한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금식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다. 이름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뚱뚱한 화요일에는 지방 듬뿍 셈라를 먹는다. 금식을 앞두고서 달달하고 기름기 많은 빵으로 마음을 달랜다고나 할까? 라마단 저녁에 폭식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셈라는 고운 밀가루로 만든 빵에 크림으로 속을 가득 채운 것이다. 모닝롤처럼 생긴 빵의 윗부분을 잘라 낸다. 아몬드 패이스트와 휩 크림으로 속을 채우고 뚜껑을 다시 덮는다. 위에는 흰 눈이 내린 것처럼 슈거파우더를 뿌린다. 때때로 셈라를 담은 접시에 따뜻한 우유를 부어 적셔 먹기도 한다.
스웨덴 뿐 아니라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와 발틱해 Baltic Sea 넘어 에스토니아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다. 나라별로 월요일에 먹기도 하고, 속에 크림 대신 잼을 넣기도 한다.
발보리는 다른 것 없다. 술을 진탕 마신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내가 지내던 웁살라에서 일 년 중 가장 시끌벅적한 날이 바로 발보리 Valborg라는 명칭의 축제날이다. 무슨 성녀 이름이라고 하는데 종교적인 의미는 거의 없다. 공식적으로 ‘봄’이 왔다는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일 년의 절반을 어둠 속에서 보내고 맞는 봄이니 얼마나 반가울까?
처음 웁살라에 왔을 때부터 발보리 얘기를 많이 들었다. 친구들은 1년 내내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발보리 일주일 전부터 “술 뭐뭐 사놨어?”, “그날 강가에 몇 시에 갈 거야?”, “바비큐는 어디서 할지 정했어?”, “아침은 샴페인과 딸기로 시작하는 거 잊지마.” 등등 들뜨기로 하면 크리스마스보다 더했다. ‘발보리를 위한 절대 가이드’를 다운로드해 정독해 보았다.
가이드에 따라 친구들과 아침 7시에 만나 뜨는 해를 맞으며 봄에 처음 열매를 맺은 딸기를 안주 삼아 샴페인을 한잔 하고 이어서 시간대별로 주종을 달리한 술과 함께 퓌리스Fyris 강가 뗏목 경기 관람, 언덕에서 모자 흔들기, 바비큐 파티, 피크닉, 모닥불 피우기 등 하루 종일 먹고 노느라 바쁘다.
인구 20만의 도시 웁살라에 발보리 날에는 도시 인구의 두 배가 넘는 수가 방문한다고 한다. 발보리 후의 흔적을 보면 스웨덴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다행히 다음날은 노동절인 5월 1일이다. 공휴일이라 전날 밤늦게 까지 놀아도 부담이 없다. 나 역시 웁살라에 있는 동안은 발보리를 기다렸지만 한국에는 굳이 들여올 필요가 없어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매일을 발보리처럼 살 수 있는 사회 아닌가?
하지 축제 이 주간을 기점으로 방학과 휴가가 시작된다. 공식적으로 스웨덴의 학기와 회기는 9월에 시작한다. 6월 말 하지 축제와 함께 1년을 마감하는 셈이다. 하지 축제에는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모여 피크닉을 한다. 들꽃으로 만든 화관은 필수다. 절인 청어, 딜과 크림을 넣어 만든 감자 샐러드, 크림과 앤초비를 넣은 감자 그라탱, 크림을 얹은 딸기 등을 죽 늘어놓고 배불리 먹는다.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의 반복이다.
하지 축제의 주제가가 있다. 작은 개구리 Små grodorna라는 명곡이다. 개구리를 포함한 범양서류 연맹의 공분을 살 만한 가사다.
작은 개구리, 작은 개구리 우습기도 하지
귀가 없어 귀가 없어 꼬리도 없다네
꽥꽥꽥꽥 꽥꽥꽥꽥
더 재밌는 것은 춤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꽃으로 장식한 높다란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강강술래 하듯 커다란 원을 그리고 서 두 손으로 귀와 꼬리를 만들며 깡충깡충 뛰면서 노래를 부른다.
백야의 하지에는 아무리 먹고 놀아도 해가 지지 않는다. 시원한 맥주와 스납스(감자 등으로 만든
독주)도 함께 마신다. 스웨덴 사람들이 술을 마시기 전에 갑자기 단체로 노래를 부르더라도 놀라지 마시라. 헬란 고르 Helan går로 시작하는 노래인데 ‘원샷’이라는 뜻이다.
북유럽에서 특히 인기가 많은 허브인 딜 Dill을 뿌려 삶은 가재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친구들과 함께 까먹는 전통이다. 딜은 코스모스 이파리 같이 생긴 허브다. 특유의 산뜻한 향이 있는데 감자 샐러드나 생선 요리에 두루 쓰인다.
스웨덴에서는 16세기부터 가재를 먹기 시작했다. 가재는 귀족의 음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중에게 퍼진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20세기 초반에는 가재의 개체 수 보호를 위해 6~7월 가재를 잡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이제는 제한이 풀렸다. 가재를 수입해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재의 수확 철인 늦은 여름 즐기는 가재 파티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다.
8월 초에는 집으로 날아오는 슈퍼마켓 전단에도, 잡지에도 온통 가재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마트에 가면 파티용으로 나온 가재가 그려진 고깔모자, 턱받이, 일회용 접시, 냅킨, 그리고 얼굴이 그려진 보름달 등이 쌓여있다. 가재가 지구를 정복이라도 했나 싶었을 정도로 요란스럽다. 보름달 장식은 이제 백야가 짧아지고 날이 어두워진다는 의미다. 가재요리의 반주로는 스냅스가 제격이다. 이때도 역시 줄기차게 헬란 고르 Helan går를 외치며 술을 마신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는 파티다.
8월 마지막 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냄새나는 음식으로 악명 높은 삭힌 청어, 쉬스트뢰밍 Surströmming을 먹는다. 푹 삭힌 홍어도 쉬스트뢰밍 앞에서는 명함을 못 내밀 정도라고 한다. 봄에 잡은 청어에 소금을 넣고 밀봉해 발효시키는데 8월31일에 처음 열게 되어 있다. 젓갈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썩은 발냄새같다는 평으로 스웨덴 사람 중에도 못 먹는 사람이 많다. 요즘은 캔에 넣어 파는데 쉬스트뢰밍을 먹을 수 있어야 진정 스웨덴인이라나?
계피빵은 카넬불레Kanelbulle라고 한다. 한국의 시루떡이나 단팥빵처럼 스웨덴 어느 가게나 빵집에 가도 다 있는 가장 보편적인 기본 빵이다.
나에게 스웨덴은 카넬불레의 냄새로 기억된다.
눈을 감고 스웨덴을 떠올리면 코 끝에 달콤하고 향긋한 카넬불레 향이 나는 것 같다. 아침 일찍 거리를 나서면 도시 전체에 희미하게 계피빵 냄새가 돈다. 스웨덴 계피빵 반죽에는 카다멈을 넣어 독특한 향이 있다.
계피빵의 날은 1999년에 시작됐다. 밀가루, 이스트, 설탕, 마가린 제조업자의 모임에서 홈베이킹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한 것이 그 기원이다. (빼빼로 데이 냄새가 나는데?) 수백 년에서 천년 가까이 되는 역사를 가진 다른 날에 비하면 전통이라 보기도 어렵지만 자칭 계피빵의 종주국이다 보니 자리매김은 확실히 됐다.
스웨덴의 국가 홍보 자료에 따르면 스웨덴인은 평균적으로 연간 316개의 계피빵을 먹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여섯 개를 먹는 셈이다. 처음 자료를 봤을 때, “이상하다. 분명 여섯 개는 더 먹을 텐데.”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는 판매량만으로 집계한 것이고 집에서 구워 먹는 수치는 빠진 것이라고 한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하지의 반대쪽에 있는 날이다. 한국의 동지에 해당한다. 이날에는 #샤프란 빵 Saffransbullar과 페파 카코 Pepparkakor, 글뢱glögg의 삼종 세트가 준비되어 있다.
샤프란빵은 반죽 물에 샤프란을 우려 황금빛이 난다. 내 눈에는 높은음자리표처럼 생겼는데 꼬리를 말고 있는 고양이 같다고 루시아 고양이라고도 한다. 페파카코는 일 년 내내 인기 많은 생강과자다. 페퍼카코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도 있을 정도다. 하트 모양 또는 별 모양의 얇은 쿠키로 바삭하다. 초콜릿 색인데 생강을 넣어 독특한 맛이 난다. 12월에 거리를 걷다보면 여기저기 페퍼카코 굽는 냄새가 난다. 상자나 큰 통에 넣어 파는데 일 년 내내 수퍼에서 볼 수 있다. 글뢱은 뱅쇼의 북유럽 버전이다. 와인에 건포도와 과일, 향신료 등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것이다. 감기 예방에 좋다고 한다. 루시아 절기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마신다. 손잡이가 달린 유리잔에 담아낸다.
어둠이 깔린 루시아 절기에는 유령같이 흰옷을 입고 초를 든 아이들이 노래를 하면서 돌아다닌다. 아이들이 무언가 갈망하는 눈 빛으로 바라보거든 페퍼카코 한 주먹 주면 된다.
크리스마스에는 Julbord라는 뷔페가 차려진다. 예의 독주인 슈납스와 함께 먹는 전통 스웨덴식 상차림이라고 보면 된다. 찬 음식부터 더운 음식까지 갖가지 종류의 스웨덴 전통메뉴로 가득차 있다. 바이킹 뷔페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북유럽에 간다면 율보드라고 쓰여있는 호텔이나 레스토랑을 놓치지 마시길!
특정한 날 특정한 음식을 먹고 노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내 전공은 지속가능 발전이다. 많은 이가 ‘지속가능’이라는 것이 자연과의 조화, 또는 경제적 자립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속가능에는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한 사회가 지속가능한지를 측정하는 데는 여러 지표가 있다. 그중에 전통과 역사를 공유하는가에 대한 항목이 있다. 오랜 기간 내려오는 전통을 지키고 참여할 때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과 동질감이 강화된다. 전통을 계승하고 퍼뜨려 발전시키는 것은 사회통합을 강화하는 좋은 방법이다. 사람들이 절기마다 함께 모여 늘 먹던 음식을 찾아먹게되면 일부러 전통산업을 보호하기 전에 시장이 원하는 아이템이 되니 자연히 육성된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은 더 이상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바이킹의 나라가 아니다. 전체 인구의 20%가 이민자 또는 이민 2세다. 원칙적으로 경제적 이민은 받지 않고 분쟁지역의 난민 중심으로 이민을 받는다. 줄어드는 인구와 노령화를 극복하기 위해 20세기 들어 적극적인 이민자 수용 정책을 펼쳤다. 2030년이면 스웨덴 인구의 10퍼센트가 무슬림일 것이라고 한다. 이들 모두가 이제는 스웨덴 인이다.
신참 스웨덴인이 ‘스웨덴다움’을 배우는 방법이 바로 음식 달력에 나오는 전통과 문화를 함께 하는 것이다. 비단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꼬마부터 꼬부랑 노인까지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춤을 추며,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세대 간의 소통이 자유로와 진다.
스웨덴에서 몇 해 살지 않았는데도 커피 향을 맡으면 카넬불라 생각이 난다. 겨울이 오면 친구들과 초 켜놓고 글뤽을 마시며 피카를 하고 싶다. 친구들과 함께 했던 몸에 익은 기억, 음식, 문화가 결국 내가 그리워하는 스웨덴이다. 때마다 철에 맞는 음식을 만들고 함께 즐기다 보면 자연히 그 공동체에 속한 느낌이 든다.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래서인지 나라 사랑이 유별난 스웨덴 사람들은 해외에 나가도 음식 달력의 절기를 지킨다.
사진보고 배고파져도 책임 못짐ㅡ.ㅡ;;
북유럽연구소 소장 @북극여우 입니다.
노르웨이, 한국, 스웨덴에서 공부했습니다. 저서로는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 『지도자들』, 『퇴근길 인문학:관계』, 『라곰』(번역)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