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사람들이 워라밸을 누릴 수 있는 이유

by 김노하 Norway

어릴 적 아빠는 저에게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시집갈 때 다 갚고 가라."


남동생에게는 "장가갈 때 다 갚고 가라"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었죠. 때로는 아빠 말을 심각하게 듣고 "어떻게, 얼마나 갚아야 하지?"라는 생각도 구체적으로 했어요. 어릴 땐 그 말이 흘러가는 말로 들리지 않않죠. (지금은 장가간 아들보다는 시집간 딸이 낫다고 하시더라고요.)


올해 엄마와 아빠가 결혼하신 지 45주년이 되었어요. 두 분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요. 서로 얼굴은 알고 있지만 결혼 적령기가 될 때까지 가깝게 지낸 적은 없었다고 하셨어요. 외가와 친가의 거리가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요. 저는 외가와 친가가 가까이 있는 것이 좋았어요. 친가에서 놀다가 지겨우면 외가로 가서 놀면 되니까요. 두 집이 서로 가까우니까 어른들이 데려다줄 필요도 없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외가댁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더라고요. 아주 잠깐 들렀다가 오는 것도 조심스러워했어요. 어린 나이지만 저는 그걸 눈치채고 있었죠. 그래서 가끔은 엄마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어요.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을 것 같았거든요.


이 말도 기억나요. 친가에서는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가서 힘들다고요. 큰 볼일을 못 본다는 사실을 저에게 털어놨거든요. 그렇게 엄마를 통해서 친가와 외가 사이에는 심리적인 거리가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부모님은 물심양면 저를 아껴주셨지만 저에게는 삼십 년 동안 쌓이고 쌓인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어요.


'나는 '여자라서, 여자니까' 앞으로 남자와는 다른 어떤 삶을 살 수도 있겠다.'





저는 노르웨이에서 두 아이를 출산했어요. 노르웨이에 사는 한국인 엄마들과 인연이 되어 같이 육아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곤 했어요.


"노르웨이와 한국 중에 어느 나라에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글쎄, 딸이니까 노르웨이가 낫지 않을까?"


군대 문제가 걸린 것도 아닌데 '딸이기 때문에' 노르웨이가 살기 더 나을 것 같다는 말에 서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노르웨이에서 며느리들은 시댁에서 손님처럼 있으면 된대."


노르웨이에서 며느리들은 처갓집에 간 한국 사위와 같다는 거예요. 처갓집의 사위와 시댁의 며느리가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 사회, 꽤 멋져 보였어요.


그런데 이와 별개로 제가 생각했을 때 여자로서 노르웨이에 살면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결혼 후에도 '삶의 밸런스'를 지키며 수 있다는 거예요. 노르웨이에서는 성별을 떠나 모두가 삶의 밸런스를 지키며 살고 싶어 해요.


개인, 가족, 일. 이 세 가지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사회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들의 균형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죠.


결혼을 하고 삶의 밸런스가 흔들리는 시기는 아무래도 아이가 태어난 이후일 거예요. 노르웨이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동안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부모'로 인식을 해요. 직장에서 엄마와 아빠를 구분하지 않고 생각해 주기 때문에 아빠들이 아이들 병원, 학교 모임 등에 절반은 책임을 질 수 있어요. 덕분에 엄마들이 중간에 경력을 단절해야만 하는 상황이 줄어들어요.


그래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면 일하는 비율을 줄이면 돼요. 60프로 일하기, 80프로 일하기. 이 제도는 육아하는 동안만 그런 게 아니라 삶의 밸런스를 찾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돼요. 일하는 비율을 개인적으로 조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죠. 노르웨이에서는 "몇 프로 일해요?"라는 질문이 어색하지 않아요.


물론 제도가 100킬로의 속도로 달려도 사람들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제가 한국에서 근무할 때 유연근무제 제도가 시작됐어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서 그 제도를 사용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죠. 그런데 노르웨이 학교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더라고요. 50프로만 일하는 선생님, 80프로만 일하는 선생님. 처음엔 어색했는데 지금은 익숙해요.


노르웨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담임 선생님은 80%만 일하시는 분이라 금요일마다 다른 선생님이 담임 역할을 해주세요. 딸아이 말로는 나이가 많아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고 하셨대요. 60세가 넘은 선생님이 5학년 아이들의 에너지를 매일 감당하는 것이 힘들 수 있잖아요. 월급은 20%만큼 적게 받겠지만 일에 대한 스트레스 관리와 건강 관리, 여가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퇴임 이후를 위해서 뭔가 준비할 수도 있고요.


100% 일하는 선생님들도 정해진 수업 시간 외에는 재택근무가 가능해요. 수업이 끝난 후에 집에서 수업 준비를 한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거죠. 따로 승인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요. (한국보다 훨씬 나아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노르웨이에서는 유연하지 못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종 중 대표적인 것이 교사라서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예요.)





저는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예요.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는 상상을 하면 사회 제도와 문화적인 면을 모두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죠. 대다수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과 뭔가 유별나게 보인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정말 크다고 생각해요.


"아이 있는 게 벼슬이야?"

"아픈 게 자랑이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속내에는 ‘내가 못 하니까 네가 하는 건 거슬려’라는 뜻이 있는 거잖아요. 이런 말 대신 서로 삶의 밸런스를 존중해 주는 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좋겠어요.





겨우 매달려 있지는 않나요?


It is the people
who turn a good system
into a great culture.
(좋은 제도를 멋진 문화로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글 쓴 후의 메모.


오늘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건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었기 때문인데요. 글을 쓰다 보니 모두가 누려야할 삶의 밸런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어졌어요.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이 또 생겼어요.


요즘 몸이 아파서 아플 때 어떻게 삶의 밸런스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거든요. 노르웨이 사람들이 삶의 밸런스를 찾는 법, 두 번째 글도 써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