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
불과 150페이지, 그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그림인 이 동화책이 인생 책으로 남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장의 삽화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힘겹게 애벌레 탑을 기어간 호랑 애벌레가 마주친 꼭대기의 전망이다. 아무것도 없는 탑의 끝. 게다가 지천에 널린 것은 올라왔던 그것과 똑같은 수많은 애벌레 탑이다. 허무함을 느끼는 호랑 애벌레에게 다가온 나비 하나, 모습은 바뀌었지만 호랑 애벌레는 정체를 단번에 알아챈다. 단짝 친구였던 노랑 애벌레다. 탑에 오르는 대신 번데기의 세월을 견뎌 낸 노랑이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나비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를 했고, 대학을 가고, 직장에 들어갔다. 뭔가 이상하다. 책임은 무거워지고, 오르기는 커녕 버티기도 힘들어지는데, 나비가 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아파서 떨어지고 나서야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번데기가 되는 게 아닌 애벌레의 탑을 오르고 있었음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스스로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잠시 멈춰 주위를 둘러본다. 누군가는 탑을 오르고 있다. 또 다른 이는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문득, 동아리에서 이 책을 싫어했던 친구가 떠오른다. 나는 나비가 되기를 강권하는 이 책이 싫다고. 그 끝이 궁금해서 탑을 올라간 애벌레가 무얼 그리 잘못했냐고.
한줄기 깨달음이 뇌리를 스친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옳고 그름이 아니었음을.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진정한 나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을. 다시 올라가는 선택도, 나비로 변태 할만한 장소를 찾아갈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여기에 머무는 방법도 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진정한 선택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인고의 과정을 거쳐 훨훨 날아가는 나비들에게 희망을. 그리고 저마다의 이유로 탑에 오르며, 혹은 위치를 지키려 애쓰는 애벌레에게도 희망을. 모두에게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