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물건은 제가 옮길게요.
워킹맘생존법 #9 한계를 넘어서기
“물 두 컵에 서너 숟갈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 된다.”
얼마 전 시어머님께서 누룽지 끓이는 법을 가르쳐주셨어요. 아침을 자주 거르는 아들 내외가 걱정되어하시는 말씀인 줄 알지만 기분이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저희 어머님, 요리나 빨래 같은 살림 관련 팁은 항상 남편이 아니라 제게 말씀하시거든요.
저희 부부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맞벌이인 데다 남편은 현재 육아휴직 중입니다. 남자가 어떻게 아이를 키우냐며 아들의 육아휴직 결정에 펄쩍 뛰셨던 어머님께서는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자가 돈을 벌고 남자가 가사를 맡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에요. 친정엄마라고 다를 건 없습니다. 제가 야근하는 날이면 얼른 집에 가 아이를 재워야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시니까요.
경제활동을 남편과 동등하게 책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아와 가사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여성인 제게 속한 것으로 대하는 시선들이 저로서는 억울하답니다.
회사에서는 입장이 또 다릅니다. 최근 저희 회사 신입사원들은 남녀 성비가 균등해 성별로 인한 취업에서의 차별은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교적 단순한 사무업무는 여직원에게 편중되는 경향이 있고, 야근과 출장이 잦은 부서 구성원 중에는 남직원의 비율이 높아요.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여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과일을 깎게 하는 상황은 부쩍 줄어든 반면, 전구 교체나 벌레 잡는 일, 생수병을 운반하거나 프린트기를 설치하는 일에는 남직원들이 호출되지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도 왜곡된 남녀평등 인식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남성들의 호소가 자주 등장합니다.
직장에서의 성취 또한 제 행복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여기는 저로서는 우리 사회에 뿌리 박힌 이러한 성역할 고정관념이 불편합니다.
- 2020년 기준 우리나라 고위공직자 성비는 92.7 : 7.3(2020, 연합뉴스)
- 상장기업 여성 임원 비율 100명 중 4.5명(2020, 중앙일보)
과거에는 여성에게 교육이나 사회진출의 기회가 적었지만 이제는 양성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어요. 오히려 여성할당제와 같은 형태로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제도들이 생기고 있고요. 이런 제도들이 운동장의 기울기를 일시적으로 낮출 수는 있겠지만, 결국 성장의 기회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따를 겁니다.
일만 잘하는 사람 vs 일도 잘하면서 전구도 교체하고 무거운 짐도 옮기고 장거리 운전도 척척 잘 해내는 사람.
동일한 업무능력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면 누구와 함께 일하고 싶을까요?
저는 제 남편과 동등한 성장의 기회를 꿈꿉니다. 남편이 아빠가 되었지만 여전히 직장에서의 성장을 꿈꾸듯이 저도 엄마가 되었지만 사회적인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들 인식에 깊이 박힌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남편이 아니라 엄마인 내가 휴가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직장에서 남편과 같은 대우를 받기 바라는 건 어느 누군가에게는 분명 불합리한 처사로 받아들여지겠지요.
직장에서의 평등은 가정에서부터, 양육과 가사의 평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가정에서 며느리가 밥상을 차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장님이라면 직장에서도 다과를 준비할 일이 생길 때 은연중에 여직원을 찾게 되겠지요. 아마도 그 부장님은 아이가 아파서 휴가를 내는 남직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남녀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합니다. 남성의 평균 신체조건과 여성의 평균 신체조건을 비교하면 키, 몸무게,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양 등 남성이 여성에 비해 유리한 영역이 있겠지요.
하지만 여성보다 힘이 센 남성이라고 해서 2L 생수병 여섯 개가 무겁지 않을까요? 전구를 교체하거나 고장 난 프린트기를 고치는 일은 여성들이 할 수 없는 일일까요?
할 수 없다면, 그건 아마 아직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제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제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보다 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길 바랍니다. 여성을 약자로 간주해 부여하는 배려 차원의 기회가 아니라 진정한 평등이 실현되는 형태로요.
그런 세상을 위해서 제가 지금 할 일은 제 머릿속에 그어둔 한계부터 넘어서는 거라고 생각해요. 오랜 기간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을 요구받으며 살아온 탓에 저도 모르는 사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정해두었던 한계를요.
워킹맘인 저는 워킹대디인 남편에게 가정에서 저와 동등한 책임을 느낄 것을 기대합니다. 집안일과 육아에 대한 부담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기를 바라요.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경제활동의 책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짊어지고 사시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을 남편과 동등하게 나눠지려고 해요.
직장에서는 또한 저희 남편과 같은 남직원들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동등하게 갖추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업무는 물론이고 전구를 교체하거나 이삿짐을 옮기는 것처럼 직장에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저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출산이라는 큰 고비를 넘기고 직장으로 돌아온 워킹맘, 어느 것 하나 대충 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압니다.
최선을 다해 두 가지 삶을 모두 지켜내고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할인된 가치를 적용받기에는 억울하지 않나요? 그 할인의 이유가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고장 난 전구 갈기, 생수병 옮기기 같은 것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서서 하는 게 어떨까요? 아이와 함께일 때면 그깟 생수병쯤이야, 더 큰 힘도 거뜬히 발휘하는 우리잖아요.
이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우리가 직장에서 이루고 싶은 성장의 출발점이 되어줄 겁니다.
성별에 따라 치마와 바지로 구분되던 고착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승객의 안전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에어로케이 유니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