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상사 우리를 저기압으로 만드는 상황은 많고, 그럴 때 맛있는 고기를 뱃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 괜찮은 대책일 수 있겠죠.
하지만 지갑 사정에 따라 언제나 고기 앞으로 향할 수만은 없는 인간과는 달리, 밥시간이 되면 언제나 고기 앞으로 향하는 우리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바로 식육목 고양잇과 친구들입니다.
고양잇과 이외에도 자연 생태계에서 악어나 올빼미, 독수리와 같이 주로 육식을 하는 동물들 가운데 식이 영양소의 70% 이상을 고기로부터 섭취하는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Hypercarnivore'로 분류되는데요.
적절한 우리말 번역이 없어서 임의대로 해석하자면, 대략 '고도의 육식 동물'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양이처럼 고기만 먹고 살면 기분이 저기압일 일은 없을까요? 저는 아직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고양이와 대화가 가능하신 분은 꼭 물어보시고 대답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
고양이들이 육식으로 인해 갖게 된 단점은 알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람에게서 흔히 쓰이는 의약품 중 특정한 몇 종류에 대해, 상대적으로 낮은 용량에서도 독성이 나타날 만큼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반려동물 건강에 관심 많으신 집사님들이라면, 고양이에게 아스피린을 먹여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이유에 대해서는 흔히 '간 독성 때문에' 그렇다는 정도로 간단히 넘어가는 정도가 많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양잇과 동물들 사이에서 아스피린에 '간 독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UDP-glucuronosyltransferase 1A6'(UGT1A6) 이라는 유전자의 결손 때문인데요.
이 유전자는 주로 식물에 들어 있는 여러 화합물 가운데 독소를 처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고양이과 동물들 사이에서 이 유전자가 결손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오랜 기간 육식을 지속한 결과, 주로 식물에 들어 있는 독소를 처리하는 UGT1A6 유전자가 생존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결함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개나 사람처럼 비교적 잡식성을 띠는 동물들은 평소에도 식물을 먹어왔기 때문에 이 유전자의 기능이 계속 유지되었으나, 엄격한 육식동물들은 자연 상태에서 식물 속 독소를 처리하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유전자에 변형이 생긴 것이라는 설명이죠.
그 결과 아스피린처럼 식물에서 유래되거나 특정한 화학구조를 가진 약품들을 복용하는 경우 독성이 나타나게 되고요.
단, 식물 유래 성분이 무조건 고양이에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히 수의사 선생님들은 치료 목적으로 약물을 처방할 때 같은 약이더라도 개와 고양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차이를 항상 고려하게 됩니다.
고양잇과 동물들이 오랫동안 육식을 유지해온 결과, 혹은 대가라고나 할까요. 고기 앞으로 갈 때 가끔 이런 부분을 떠올리곤 합니다.
※ 본 콘텐츠는 양이삭 수의사(yes973@naver.com)가 노트펫에 기고한 칼럼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에디터 김승연 <ksy616@inb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