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멋대로 더웠다 추워지길 반복한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자세로 누워도 불편하다. 누워있는시간은 긴데 한두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깬다. 나의 도피처가잘게 부서진다. 이젠 잠자는 것조차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걸까. 의기소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럴 땐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면 눈물을 멈출 수 있다.
앞으로 사는 동안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까. 알고 싶지 않아 글을 쓴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게 삶인지 죽음인지 모를 때 글을 쓴다. 무섭던 어둠이 잠시나마 고요하다.
어른이 되면 어둠이 무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저 어둠의 무서움을 더 잘 아는 사람이 된다.
하루 동안 쌓인 두려움을 이겨내면 숙면을 선물 받을 수 있는 걸까. 나도 끝내주는 잠을 자는 사람이 되고 싶다. 뭐든지 태연하게 해 버리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밤이 참 길다. 예쁜 무드등을 하나 장만하면 기분이 산뜻해질까.
- 23년 4월 2일
만일 내 머릿속 생각들을 대신 저장해주는 기계가 발명된다면, 내 기계는 오래전에 과열되어 터져버렸을 거다.
- 23년 11월 21일
다짐하고 무너지고 다짐하고 또 무너진 끝에 현재에 닿는다. 정말 많이도 울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연말이 다가오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지나간 계절을 되돌아본다. 바쁘다는 핑계로 훌훌 털어버리던 지금을 미련스럽게 잡아본다.
글을 쓰는 지금은 겨울의 늦은 해가 떠오르는 중이다. 일출을 보고 있자니 권태의 쳇바퀴처럼 느껴지던 일상이 사뭇 다르게 보인다. 낮잠을 많이 자서 그런가 약을 먹어도 좀처럼 일찍 일어나는 요즘이다.
아침부터 기록을 남기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몽롱하던 정신이 느리게 깨어난다.
아침에 글을 쓰는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각성을 구하는 일이다. 나를 살리는 행위이다. 나를 살리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수차례 진료를 받으면서 딱 한 번 울음이 터진 적이 있다. ‘00 씨는 00 씨가 힘든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었나 봐요.’ 근래 들어 그 말만큼 위로가 되는 말이 없었다.
힘든 이유를 몰라도, 힘든 와중에 나를 웃게 하는 것들을 지키는 게 삶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관성에 맞서는 일임을 기억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킨다’라는 단어를 품는 건 삶 그 자체이다. 내가 나를 지켜주어야 한다. 이유도 모른 채 아파하고, 겪지 않은 것들을 그리워하는 이 기묘한 게 삶이더라도 끝내 나를 안아주면 된다.
두 팔은 내 몸통을 감쌀 정도로 길다.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지 않다. 나는 스스로를 더 치열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와 내 주변을 하나같이 소중하다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23년 11월 23일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영상에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있었다. ‘만일 모든 감정적 고통이 사라지는 버튼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누를 것인가?’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것 같다. 나를 이루는 일부임이 분명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잃고 싶지 않다.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말이다. 왜? 대체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뭐길래? 그저 인간의 본능인가? 우매함? 혹은 고집? 사랑? 이 중에 답이 있다면, 사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23년 12월 17일
나는 시작보다 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먹고 있는 약도 어서 빨리 끊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복용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이 약이 그간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문득 궁금하다. 일상 속 우울감은 확연히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리 외로운 것일까. 나는 원래 이토록 외로운 존재였는지. 요즘은 외로움을 부쩍 견디기 힘든 것 같다. 이번 주에 병원을 방문하면 이 얘기를 꺼내야겠다.
- 24년 7월 31일
약을 먹지 않은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간다. 신기하게도 예전보다 우울감에 울어내는 밤이 적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성장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나와 분명 친해지고 있는 거겠지. 모처럼 긍정적인 생각들이 차오르는 날이다.
(중략)
지금까지 잘 해왔어. 앞으로도 널 지켜줄게. 그러니 나를 믿고 마음껏 너의 인생을 살아. 소중한 게 많아서 행복에 겨운 삶을 살아. 넌 그럴 만하니까.
연말이 되면 편지를 쓰고 싶어 집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편지란 본디 소중한 마음을 눌러 담아 받는 이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 아니던가요. 나의 진심이 공백 없이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에, 예쁜 말을 고르더라도 흔하디 흔한 문장은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은 문장들은 전부 내가 듣고 싶은 말이더군요. 이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스스로에게도 자주 편지를 씁니다.
보통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데요. 오늘은 문득 편지를 쓰기보다 받고 싶더라고요. 그러다 재미있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 어느 시점에 남겨 놓은 기록들은, 어쩌면 전부 현재의 내가 받을 수 있는 편지가 아닐까, 하고요.
작년은 제게 유독 힘든 한 해였는데요. 그래서인지 그 시절의 나로부터 편지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 년 전쯤 쓰인 기록부터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유독 심상이 선명한 부분만 발췌한 것이 바로 위의 글입니다. 기록의 전부도 아닐뿐더러 타인에게 보여줄 예정이 없었던 속내라, 맥락도 없고 유려한 글도 못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숨기고 싶던,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라 더더욱이 공개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와 보니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습니다. 아, 그때도 지금도 나는 천천히 이겨내는 사람이었구나.
이겨내는 순간이 쌓인 지금은 일 년 전보다 더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실에 못 견디게 먹먹하고 행복합니다. 연말은 한 해라는 토막을 가져와 장작을 때는 시기 같아요. 불을 피우는 데에는 작은 불씨 하나면 충분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위태로운 순간들을 이겨내고 끝내 불씨를 지켜 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겨내고 또 지켜내느라 올 한 해 수고한 자신을 힘껏 기특해하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