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짧아지는 사회

by Nous

‘언어는 어차피 불완전해.’ 이렇게 말할 자격은 언어를 끝까지 파헤쳐 본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런데 아무나 사용한다. 심지어는 언어 공부를 게을리 하고, 언어를 읽고 쓰고 가다듬을 노력을 하지 않기 위한 핑계로 사용되기도 한다. 엄청나게 깊고 무거운 철학적 명제가 한없이 가볍게 쓰인다. 명제 자체가 무겁기에 이를 사용하면 자신이 마치 심오한 철학적 발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도구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동물들도 이를 인간과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심지어 인간은 지식을 언어로 기록하여 대대로 물려준다. 그리하여 인간만이 문화적 진화(cultural evolution)를 이루어냈다. 그렇게 축적된 지식 중 일부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고(예: 피타고라스 정리), 이따금씩 태어나는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축적된 지식들을 발판삼아 인류 전체 지식 수준을 도약시키고는 한다(뉴튼,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파인만 등). 뉴튼이 말한 거인들의 어깨(shoulders of giants)란 바로 이 축적된 지식들이다(뉴튼의 말은 ‘거인의 어깨’가 아닌 ‘거인들의 어깨’라고 번역해야 맞다고 본다).


언어가 불완전하다고 심각하게 말할 자격을 지닌 사람들은 철학자들, 철학적 천재들이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아닐까 싶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란 자연어 뿐만이 아니라 수학적 기호를 포함한 모든 기호를 뜻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언어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가 말하는 불완전성은 완전으로 다가가기 이전의 불완전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만큼 언어의 가능성과 역량을 끝까지 파헤쳐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의 대표작인 ‘논리철학논고’를 펼쳐 본 사람이라면(읽어내기란 우리 같은 일반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얼마나 깊은 수준까지 도전했는지를-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적어도 느낄 수는 있다. 그가 말한 ‘말할 수 없는 것’과 일반인 생각하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그저 언어 능력이 부족할 뿐인 일반이들이 핑계를 대기 위해, 실수를 모면하기 위해 인용할 말이 아니다.


우리들은 언어를 열심히 사용하고, 검토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연습도 열심히 해야한다. ‘어차피 언어는 불완전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않는 편이 생각없이 내뱉는 편보다 훨씬 낫다. 언어는 일반인들에게 불완전하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하찮지 않다.


지구의 시간은 지구 공통으로 흐르지만 각 언어권이 이루어내는 언어적 발전 속도는 서로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슬픈 현실이지만 한국어는 발전이 매우 느리거나 심지어는 퇴행중인 경우에 해당한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한국어를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일상적인 한국어 문장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간다.


심지어는 신문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문장이 엉망이다. 문명 사회 속에서 언론 기관은 단순히 새 소식을 전달하는 일만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현상에 이름을 달기도 하고, 그들이 명명한 결과물은 사회 속에서 반강제적으로 유의미하게 사용된다. 그러니 그들이 쓰는 문장들은 섬세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언론기관이 내보내는 문장은 적어도 문법적으로나 언어 관습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표현이 맞는지 헷갈릴 때에는 언론기관에서 쓴 용례를 찾아서 그것이 정답이라고 여길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보니 참고할만한, 모범이 되는 문장을 일상 속에서 쉽게 찾아볼 방법이 거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 일상 언어는 필연적으로 엉망이 된다. 한국어를 제대로 가다듬지 못하다보니, 불분명한, 애매하고 모호한, ‘느낌적인 느낌’만 지닌 정체불명의 단어들이나 표현들이 수도없이 떠 다닌다. 본인이 얼마나 추한 한국어를 쓰는지 인지도 못한 채 일상적으로 추한 언어를 계속하여 쓰는 사람들도 많다.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을 졸업한 비율이 70% 정도가 되는 국가에서 나타날만한 현상은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역사적 필연성도 없지 않다. 식민 시대에 한반도는 문화 말살 정책의 피해자였고, 해방 직후에는 이념 정쟁에 휘말렸고, 6.25 후에는 전국토가 황폐해졌고, 그 후로 90년대까지는 우선은 먹고 사는 것, 생존이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고, 90년대가 되어서야 군인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와중에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그 후유증은 거의 10여년동안 이어졌다. 그 여파로 대한민국의 관심사는 다시금 온통 금전에 쏠리게 되었다. 그 후로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같은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불과 1년 전, 2024년 말엽에는 계엄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혼란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도 다 수습이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은 국가 GDP 규모와 1인당 국민소득만이 세계적으로 상당한 수준이 되었을 뿐, 사회 수준은 가다듬어질 틈이 없었다. 냉정히 말하면 돈만 많은 국가가 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교육과정을 다 마친, 사회에 나와 활동하는 국민들의 언어 독해력은 OECD 국가 중에서도 평균 이하로 떨어졌다. 비슷한 소득수준의 국가 중에서 담배를 가장 야만적으로 피우는 국가가 되었고, 독서 수준은 참담할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는 중에도 우리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 합의해야 할 문제, 가늠해봐야 할 문제, 계획해야 할 미래 등은 점점 더 복잡해져간다는 점이다. 이는 생각해야 할 과제들이 언어적으로 복잡해져간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보니 설명을 하는 데에 더 함축적인 개념어가 쓰이게 되고, 이에 대해 제대로 사고를 하려면 예전보다 더 긴 문장을 다뤄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 자체의 파악부터가 불가능해진다. 쉽게 알려달라고 하지만 쉽게 알려 줄 수가 없다. 언어적으로 문제 파악이 불가능해진 사람들은 사안을 무조건 단순하게만 인식하고자 한다. 70대, 80대가 되어서나 일어날만한 일들이 20대, 30대에서 일어난다.


이 상황이 어떻게 개선 될 수가 있을까. 민주주의 사회는 언어 능력 없이 유지가 될 수가 없다. 언어 능력이 없어도 되는 사회는 북한처럼 모든 언어가 검열당하고 강제당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이 전반적으로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사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쪽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은 아직까지는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기에, 그 염원 하나로 이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글에서 언급한 상황이 계속되고 심지어는 퇴행하게 된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당히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