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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돋이 Aug 04. 2017

연필

유년기의 관대함

 

 작은 플라스틱 책상 앞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서 처음 연필을 잡았던 순간 그 묵직함이 생경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 미취학 아동이었던 나에게 연필로 무엇을 그리고 쓴다는 것은 자랑이었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뿌듯함이었다. 초등학교 나무 책상 앞에 앉을때가 되어서는 연필의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걸핏하면 툭툭 부러지고, 조금만 써도 끝이 뭉툭해지는 투박함에 공부가 재미없는 건 다 연필 때문이라고 절대적으로 믿었던 시기도 있었다. 조금 뒤, 샤프연필을 쓰게 해달라고 우기고 우겨서 얻어낸 것은 연필심이 플라스틱에 하나씩 꽂혀있어서 다 쓰면 뽑아서 뒤에 열린 동그란 구멍에다 합체를 시켜 다음 연필심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플라스틱 연필이었다. 지금도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리송하기만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고학년들의 전유물! 샤프를 원했다. 언니 것을 훔쳐다가 엄마 몰래 쓰다가 걸리기도 자주였다. 엄마는 작은 손에 무거운 샤프를 잡으면 글씨 쓰는 버릇이 나쁘게 든다고 혼내고 달래고 애를 썼다. 글 쓰는 버릇이 잘못들어서 그런가. 아직도 공책을 사선으로 올려야만 예쁜 글씨가 써지고, 펜을 쥔 손의 새끼손가락은 꼭 튀어나와야 안정감이 생긴다.


 고학년이 된 기념으로 내 손에 처음 들린 샤프는 요란한 색으로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플라스틱 샤프였다. 뒤 꼭지를 누르면 톡톡 나오는 샤프심이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그 샤프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연예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욕망의 맨 얼굴은 항상 상상 그대로가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도 글씨는 왜 그렇게 쓰기 힘들던지 샤프심은 매 순간 부러지고, 샤프심이 나오는 구멍에 자꾸 샤프심 찌꺼기가 걸려서 수업 중간에 고장이 나서 곤란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샤프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연필은 아이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어이 샤프를 고집했고, 자꾸 부러지고 걸리고 샤프심이 떨어지고 손봐줄게 한 둘이 아니었던 샤프는 자연스럽게 소근육들이 발달하면서 익숙해졌다. 샤프와 함께 수학 문제집을 풀고, 샤프로 글짓기를 하고, 샤프와 함께 커가던 어느 날, 노트 필기를 할 때는 여러 가지 색을 쓰는 게 더 눈에 확 띈 다는 것을 깨달은 중학생이 되어, 형광펜을 쓰고, 향기 나는 볼펜을 쓰고, 지워지는 펜을 쓰고, 모나미가 최고였다가, 역시 플러스 펜이 클래식하다가, 얇고 비싼 하이테크를 모으는 게 취미였다가. 청소년기를 졸업하고, 질풍노도의 대학교 신입생 시기에는 그냥 아무 펜이나 가방 밑바닥에 하나 넣어서 잡히는 대로 들고 쓰는 것이 '쓰는 것'이 되었다.     



 


 펜을 처음 잡을 때의 두려움을 기억한다. 틀리면 어쩌나. 이게 공책과 답을 망치면 어쩌나. 그리고 글을 써 내려가다가 한 글자를 틀리게 썼을 때의 그 절망감이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던 날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인가를 쓰는 일은 틀리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글자를 틀리게 쓰는 일은 정말 내가 맞춤법을 잘 몰라서 틀리지 않는 이상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펜을 쓰는 일은 더 이상 무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게도 실수는 발생한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인생의 발달 과정과 함께하는 필기구의 변화는 실수의 빈도수와 관계를 맺는다. 성인이 되어 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글을 쓰다가 틀리면 가차 없이 종이를 구겨서 버린다. 그리고 새로 쓰기 시작한다. 상황이 좀 나으면 화이트라는 마법의 물질로 그것을 덮어 버리고 새롭게 쓴다. 흥미롭게도 형광등 아래에 종이를 뒤집어 비춰보면 그 뒷면에 지우기 전에 글씨가 남아있는 것을 찾아낼 수도 있다. 펜은 실수를 폐기 처분하거나 덮고 넘어간다.    

  

 요즘도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은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어야 하는지라,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취향이 고착되는 지라, 내 손에 익은 펜들이 생기고, 리필 잉크를 넣어서 쓰는 일에 익숙해져 간다. 대부분 손에 잡고 있는 것은 펜이고, 펜만큼 익숙한게 없지만, 필통엔 꼬박꼬박 날렵하게 깎아진 연필과 지우개가 들어있다.  

  

 연필은 다정하다. 실수를 처분하거나 눈감고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 글을 쓰다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 글과 계속 함께 갈 수 있다. ‘이 글은 글렀어’ 라며 새 종이를 찾지 않아도 되고, 평생 하얗게 상처가 남아 그곳을 계속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 지우면 종이는 새것으로,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글은 계속된다.

    

 어렸을 때는 소리를 지르고 울고 때리고 싸워도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사과해’라는 한마디에 삐죽거리며 사과를 하고 일분 뒤 아무렇지도 않게 헤실거리며 둘도 없는 사이로 돌아가곤 했다. 연필로 글을 쓰던 시절은 그랬던 것 같다. 세상은,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의 실수에 관대했고, 그것을 고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펜으로 글을 쓴다. 고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쉽다. 가끔 수정테이프로 쓱쓱 고쳐내지만 그 자국이 거슬리기만 하다. 한 마디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실수를 당하고. 관계가 지속돼도 그 실수는 그대로 거기 있다가 또 다른 실수가 나타나면 불에 비추어 그래 그때도 그랬었지 하고. 별 대수롭지 않은 실수에 종이를 구기고 다른 종이를 꺼내고.    



 그래서 연필은 항상 필통에 함께한다. 그것이 전하는 온기는 그저 나무와 흑연이 주는 아날로그 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관대함에 있어서. 이제는 더 이상 연필에 익숙하지 않은 필기 습관이지만 연필과 같았던 소박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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