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2

아드레날린

by 야근의 요정
본 글은 필자가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그 대응과 결과를 정리한 실화를 바탕하였습니다.
신고인의 2차 가해 보호 및 사실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하여 인물 및 배경 등 일부는 필자가 지어내었음을 알립니다.

신고를 받고 나서 같이 신고를 당한 두 명과 상황을 공유하였다.

신고사실을 들을 때 해당 내용에 대해서 주변에 공유하지 말라는 주의는 받았으나,

첫 번째로 어차피 모두들 당사자이기 때문에 서로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비밀이 없었고

두 번째로는 회사에서 제대로 누가 어떠한 내용으로 신고를 했는지 알려주지 않았을뿐더러, 아직까지 비밀유지각서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앞선 두 이유가 아니더라도, 회사의 엄포와 나 자신의 보호를 저울질한다면 볼 것도 없이 나의 보신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들은 것이 많지 않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할 이야기가 없었다. 각종 푸념과 넋두리, 그리고 신고자에 대한 험담 사이에서 혹시라도, 조사 중 나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 통화내용의 전부였다.


간단하게 상황을 공유하고는 그날은 직장동료들과 약속이 있어 술자리로 바로 향했다.

늦은 상황에 대하여 괴롭힘 신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각자, 나보다 몇 배 많은 사회경력이 있는 그들이었고, 사회경력만큼이나 이런저런 감사를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날 술자리에는 감사실이라는 안주가 추가되었다.

첫날 충분히 분비된 아드레날린의 영향 때문일지, 첫날의 나는 기운이 넘쳤고 술은 달았다. 그렇게 첫날이 지났다.


둘째 날 회사에 출근했을 때 나는 차분해짐을 느꼈다. 대응을 위해서 자료를 모으고, 법률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첫 번째로 한 것은 자료를 모은 것이었다. 일단, 관련된 카톡 내용을 모두 살펴보기 시작했다. 당시 업무 관련 단톡이 있었는데, 부서이동 후 혹시라도 필요한 파일이 있을까 싶어 그대로 두었다. 사실 그저 잊어버린 것에 가까웠으리라. 나의 건망증을 마음속으로 칭찬하며, 전체 대화내용을 다운로드하였다, 그리고 신고자(로 추정되는) 박 차장과 나의 개인 카톡도 모두 다운로드하였다. 마지막으로 같이 신고당한 A팀장과 B차장의 개인톡도 한번 들여다봤다. 박 차장과의 카톡내용은 사무적인 내용뿐이었다. 어디서 전화 왔었다. 어떤 자료를 달라 정도의 드라이한 대화였다. 정말로 그녀와 나 사이는 그것이 전부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A팀장과 B차장과의 개인톡을 본 이유는 혹시라도 나도 모르는 새 그들과 '공모'를 했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박 차장은 남의 PC에서 카톡을 빼돌리는 일을 종종 하곤 했다. 과거 그녀의 팀원은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에 다른 이들과의 카톡에서 박 차장의 험담을 나눈 것이 본부장과 인사팀장의 책상에 A4용지로 정갈하게 올라가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었다.(여기서 보듯 박 차장은 한 명의 훌륭한 오피스빌런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녀에 대한 내용은 차후에 회사 내 오피스빌런에 대하여 정리하면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다지 보안에 철저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 카톡을 훔쳐갔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다행히도, A팀장과의 대화에서는 그녀의 생각(그녀의 상상 속에서 나는 A팀장과 공모하여 본인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후배였을 것이다)과는 달리 그녀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었다. 단 3번 정도의 언급만 있었을 뿐이며, 그나마 업무와 관련된 내용일 뿐이었다.

B차장과의 대화에서는 그녀에 대한 언급이 조금 더 있었다. 그러나 B차장이 그저 일방적으로 박 차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내용이었으며, 나는 보통 통상적인 수준에서 답변을 했다.(물론 나 또한 그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직장인의 레벨에서 있을 법한 상사에 대한 푸념의 수준이었을 뿐이다.)


이후 전문가를 매칭해 준다는 한 플랫폼에 접속하여 상담요청을 의뢰했고, 4~5명의 노무사에게서 응답이 왔다. 가격과 경력을 비교해 봤다. 베르트랑의 역설에 따라 결과적으로 가격비교와 정보의 비대칭이 해소된 시장에서 노무사들의 상담비용은 평준화되었으나 그 방향은 언제까지나 아래쪽을 향할 뿐이었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베르트랑을 찬양하며, 노무사들의 프로필을 살펴보았고, 근로감독관 출신 노무사 한 명을 선택하여 상담 요청을 하였다. 퇴근시간즈음 관련인물들의 관계, 사건내용, 신고내용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리하고, 각종 카톡자료들을 5만 5천 원과 함께 송부하였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퇴근하고 집으로 복귀한 나에게 지금 통화 가능하냐고 연락이 왔다.

노무사에게 시간은 곧 돈이다. 그 돈이란 곧 상담자에게 청구되는 금액이다. 같은 돈으로 충분한 상담을 받지 못한다면 내가 자료를 잘 정리하여 노무사에게 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고민해봐야 한다. 내가 사전에 관련 자료를 잘 정리하고, 정확한 정보를 줘야 같은 금액으로 더 정확하고 값어치 있는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노무사의 조언은 처음 조사를 받는 나에게 제법 도움이 되었다. 약 45분에 걸쳐 상담이 진행되었고,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1) 상대가 어떠한 증거를 갖고 있는지 확인할 것 2) 굳이 내가 가진 패를 먼저 꺼낼필요는 없음 3) 내가 신고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조사자가 판단할 수 있는 표현은 피할 것 4)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굳이 답변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들을 것 5) 답변에 시간이 걸리거나, 추후 별도로 답변을 해도 되기 때문에 굳이 그 자리에서 조사를 끝내지 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무 걱정하지 말 것. 일반적인 신고가 아니며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면 인정받기 쉽지 않기 때문에 너무 조바심 내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노무사는 친절하게 조언하였다.


변호사와 상담을 모두 마쳤을 때, 그간 몰아 쓴 아드레날린이 바닥나서일까? 나는 침대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회사일도, 신고대응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지쳤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생활 6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정신적 피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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