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여행’은 떠나길 갈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드는, 그 순간부터 여행인 것이다.
목적지를 정하고,
떠나는 날짜를 고르고,
티켓팅을 하는 그 모든 과정,
거기부터 여행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거였다.
오랜만에 멀리 떠나볼, 유럽행을 결정했다.
한 동안 여행을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아 신기한 참이었다.
여행에 대한 갈망이 없는 어떤 이를 드물게 마주할 때마다 나는 의아했다.
여행을 가고 싶지 않을 수 있구나.
그러니까, 스무 살 그 즈음 부터,
독립에 대한 갈망과 함께 나에겐 늘 여행의 갈망이 함께 했다.
전 세계 모든 곳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나와 얼마나 다르게 살지, 면밀히 관찰하고 싶은 욕구.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는 늘 지루했고, 힘들게 만들었지만,
다른 세계는 아름다울 것만 같았다. 호기심이 왕성했다. 세계를 떠돌며 살고 싶었던, 그럴 때가 있었다.
왜 그렇게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걸까?
내가 아주 작은 생활 반경 안에서 살고 있단 걸 막연히 느끼며, 나는 인지했던 것 같다.
다른 세계의 생활 방식을,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그 차이들을 통해 스스로를 알 수 있으리란 걸.
에디터가 될 땐 막연했지만, 되고 나니 확실해졌다.
이 직업이라면 그런 나의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 거란 직감.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오는 일이 없었다. 첫 직장에서 다음 매체로 이직을 할 때, 나는 여행 잡지에 입사했다. 패션에디터의 행보로는 야망 없는 선택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야심 찼던 결정이었다.
첫 유럽여행을 한 여행사의 단체 패키지 프로그램으로 다녀온 뒤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였다. 더 참을 수 없었다. 해외 출장이 가고 싶었다.
예상대로 여행 잡지에서 출장을 통해 꽤 여러 곳으로 나갈 볼 수 있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돌아오는 해외 출장이 점차 당연하게 반복됐다.
체력적으론 힘이 들었지만, 출장이란 기회만큼은 당시에도 늘 경이로웠고, 지금도 그 경험들에 감사하다.
이번 여행을 오랜만에 준비하면서, 좀 다른 여행의 목적을 알게 됐다.
이젠 어느 곳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생각하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하단 걸 알게 된 나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특별히 다를 거란 기대가 크지 않다.
그런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콘텐츠로 쉽게 접할 수 있게 세상도 변했고.
해외에서 구해온 물품이 특별한 세상도 많이 바뀌어, 한국에서도 웬만한 해외 물품을 살 수 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 중 어느 곳으로 정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제주에서 서울을 거치지 않고 올 수 있었던 남프랑스행 티켓을 끊었다(그 사이 로마 티켓은 1인 50만 원도 안 하는 특가로 발견해서 티켓팅을 했다가 취소했다).
작은 도시들로 옮겨 다닐 루트도 짜고, 숙소도 대부분 정해 예약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부터였다.
'꼭 여행을 가야 할까?'라는 뜬금없는 의문이 반복해서 찾아왔다.
다 즐긴 것 같았다. 계획은 너무 즐거웠지만,
카드결제요금에 누적된 금액이 뜰 때마다 저 액수면, 필름을 더 사들일 텐데, 저 액수면, 디자이너를 써서, 저 액수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업 자금은 늘 빠듯한 법이니.
이미 경험한 즐거움에 지급한 돈을 다른 데에 치환했을 때의 값어치로 환산해 가늠해 보길 반복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같은 생각을 말하곤 남편과 둘이 어이없는 웃음을 짓다가 "취소해?" 장난스러운 말에 되돌릴 수 없단 걸 새삼 느낀다.
이제 여행은 갈망이 아닌 가야만 하는 의무가 된 것이다.
그만큼 설렘은 옅어지고 더 완벽한 여행을 위한 준비의 압박이 즐거움을 앞지르기 시작한다.
여행을 위해 희생되는 많은 것들.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처리해야 하는 것들.
긴 시간의 공백을 위해 물리적으로 정리할 것들.
여행으로 인해 전에 없던, 해야 할 일들이 주어졌다.
그것들이 전환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그 이후다.
환기,
마주한 양 쪽의 창을 한꺼번에 모두 열고 안에 있던 공기를 밖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공기로 완전히, 전환시키는 행위. 묵은 그간의 생태를 돌보고 정리하고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 자라도록 돕는 과정.
지금 필요했던 건, 그것이고,
아마도 그것을 여행이라는 의도적 목표를 세운 후
목표를 완수하기 위한 에너지를 받으려는 것이구나.
예전엔, 출장이라 출국 전에 항상 정신이 없고 바쁘구나 생각했었는데,
모든 떠나는 순간, 일상을 벗어나려는 지점은
그래서 당연히 바빠진다.
오래 비울 공간에 멈춘 공기로 숨 쉴 많은 식물들 걱정이 가장 컸다.
몇 주 전부터 날짜를 따져가며 물을 주는 주기를 조정해
떠나기 전날 물을 듬뿍 주곤 창가로 한 데 모아 서큘레이터를 돌려두었다.
여행을 빌미로 이 참에 해 낸 것들 :
사다둔 식재료를 남은 끼니에 잘 배분해 열심히 먹고,
금세 그리워질 김치찌개와 떡볶이도 먹어둔다.
가게와 집의 식기들을 모두 닦고
싱크대의 묵은 때도 이 참에 벗기고,
냉장고도 몇 번이나 여닫는다, 돌아와서 폭탄으로 마주할 재료가 남아있진 않은지.
이 참에 대청소,
옷 정리,
이불정리,
이 참에 쇼핑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 하며 시간을 보낼까',를 정말 오랜만에 고민하게 만들어 준 장시간 비행 준비!
볼 영화를 고심해서 골라 다운로드하고
이 참에 묵혀둔 글도 쓰고, 묵혀둔 책도 읽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되찾는다.
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첫째 날엔 무얼 입고, 신발에 양말까지
여행 일정에 맞게 착장을 고민해 본다(얼마만인지!).
해가 지면 얼른 숙소에 들어가야지, 숙소에서 저녁 시간에는 어떻게 보낼까(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니까 저녁에 시간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저녁도 먹지 않고 늘 잠이 들었다)?
마트에서 늘 구입하던 식재료들 대신, 장보기는 얼마나 신날까!
늘 정해진 일들을 해내고, 남는 시간엔 고민 없이 유튜브에 새로 뜬 영상을 터치하던 일상 대신,
얼마나 더 깨어 있을 수 있겠는가! 신날 일이다.
휴가,라는 단어가 좋아서(베케이션vacation도!)
몇 번이나 입 안에서 굴려보며,
휴가를 보내고 와야지,
나와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알아차림 속에서 지켜봐야지,
내가 어느 순간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또 언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지 지켜봐야지,
현존과 알아차림을 배우고, 처음 떠나는 먼 여행이다.
*출국 직후, 푸동 공항에서 5시간의 환승 대기 중에 쓴 글, 오랜만에 유럽 시차를 겪은 후 다시 보니, 야무진 계획이 참 많았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