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는 연대의 필요충분조건
지난 11월 초에 어쩌다 보니 기초문화재단의 장이 되었다. 목표하거나 계획한 일이 아니었다. 2020.6월 서울문화재단을 정년퇴임하고 남들은 또 다른 직을 향해 점핑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나는 어떤 직에 오르지 않아도 발랄무쌍하게 삶을 즐기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지내고 싶었다. MZ세대들이 부모세대보다 고달픈 삶을 버텨내느라 각종 알바에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N잡러였다면 내 경우는 낙산 언덕의 책읽는 고양이 카페의 일일 매니저로, 또 평가위원이나 심의위원 등 경험을 나누는 일로, 젊은이들과 연대와 협력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하는 워킹보트의 일원으로, 스튜디오 낙원에서 만인의 독무대를 설계하는 기획자로, 간간이 글을 남기는 친구로 살아가는 60대 N잡러였다. 수입은 줄었지만 활동 반경은 넓어지고 젊은 친구들과의 교류도 다행히 이어졌다. 씀씀이는 줄어들고 관계는 더 늘어났다.
반면 후배들의 볼멘 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혼자 룰루랄라 할 것인가? 전국에 광역, 기초 포함하여 129개의 문화재단이 있는데 여성 대표이사 비율은 9명으로 7%에 불과했고, 서울 경우 25개 자치구 중 용산구, 서대문구, 강서구 빼고 22개 기초문화재단이 있는데 그 가운데 여성대표는 중랑구, 구로구, 양천구 정도로 13%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물론 여성 동료나 후배들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퇴직하고 나서 일 년을 넘으면 나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문화예술계 경우 여성들이 7:3 비율로 훨씬 많지만 의사결정권자는 반대로 3:7 비율도 안되는 현실에 용기를 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사무실에 많은 동료들의 축하 화분이 즐비하다. 결혼식장에나 갈 법한 대형 화환은 사무실엔 들어갈 수도 없는 크기라 복도 끝에 놓이기도 하고, 관련된 기관에서 너나없이 축하한다며 보내왔다. 그 중에서도 마음에 유난히 남는 화분들이 있으니 옛 직장 동료들이 보내준 메시지들이다. 마침, 오징어게임 드라마를 패러디해 ‘오진이게임’을 시작하라고 나를 에너자이저로 명명하며 격려한다. 문화재단에서만큼은 살벌한 경쟁의 게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성장을 도와주는 상생의 게임을 만들어 보라는 주문일 터이다.
한편 동종 문화예술분야에서 일한 경험으로 그저 알고 지낸 타 기관의 후배로부터도 난을 받았다. 뜻밖이기도 하고 기만원을 쓸 만큼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던지라 감사한 마음으로 연락을 했다. 무슨 난까지 보냈느냐? 고 하니 그저 자기 일처럼 좋아서 축하해 주고 싶었단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환대인가? 축하 전화 인사를 나누는데도 여성 동료들 가운데는 너무 좋다고 잘 됐다고 덕담해주는데 서로 울컥한 마음이 넘나들 정도였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들 기뻐해 주는지? 남의 일에도 이렇게 마음을 나눠주는지?
싱어게인에서 30호 이승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컬어 주류가 아닌 방구석 음악인에 대한 ‘환대’라고 표현을 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환대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2015년 무렵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라는 책을 통해 사회적 우정과 환대를 강조해왔지만 그저 말 뿐이거나 활자화된 글에 머물렀었는데 처음으로 실감하는 환대에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기초문화재단의 장이 되는 것은 내 개인만의 일이 아니구나, 남의 일이 아니구나, 공공문화기관에 공채로 입사해 소리없이 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비로소 연대감을 체감한다. 동료들의 뜨거운, 그리고 절대적인 환대가 나에게 연대감을 이끌어 낸다.
반면, 각종 기관의 대표이사 공모시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업무수행 계획서’는 허무맹랑하다.
과연 대표이사를 지원한 한 사람이 짧은 기간동안에 작성하는 업무수행계획서에 그 조직의 비전이 그려져 있으며 계획 또한 실효성이 있는지 말이다.
대부분 타 기관의 내용의 이나 연구보고서에 있는 내용을 옮겨 적기 마련인데 과연
기존에 해오는 일에 대한 존중 없이 일방적으로 작성해도 되는 것 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가장 존중받아야 할 것은 오래전부터 해 오고 있던 당초 기관의 비전과 미션에 따른 일들이고 연대해 온 조직의 방향일진대 한 사람이 자리바꿈으로 기관의 존재 목적부터 사업의 방향, 그리고 내용, 파트너들까지 송두리째 바뀐다는 것이 최선인지?
만약 일방적인 ‘업무수행계획서’ 로 작성한 것이 나중에 그대로 조직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기존 기관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경영혁신을 적으라는 질문에 지원자인 나보다 그 조직에 대해선 직원들이 더 많이 잘 알고 있으므로 일방적인 혁신 대신에 직원들의 기존 조직문화를 존중하고 관찰하고 서로 토론하고 연대하며 경영혁신을 해나가겠다고 적었다
그동안 재단에서 일하면서 새로 오는 대표이사의 철학과 관심, 전문분야에 따라 기관의 정체성이 휘청거리는 걸 보아온 터라 중요한 것은 지원자의 포부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조직을 직원들과 함께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연대해 나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임명장을 받은 지 40일째 되는 날이다. 광역문화재단에서 일하다가 기초문화재단에 오니 지역문화의 현주소가 보인다. 과거, 광역문화재단에서 직접 사업을 하면
단체나 기초에서 광역은 직접 사업을 하지 말고 민간이나 기초에 기회를 주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 현장의 수요로부터 서울문화재단 안에 지역문화팀이 생기고 N개의 서울이라는 기초문화재단 지원사업도 신설됐다. 서울문예회관연합회는 서울문화재단협의체로 바뀌고 기초문화재단의 뉴딜인력이나 지역특성화 콘텐츠사업 등을 지원하는 사업도 설계되었다. 정작 기초에 오니 똑같은 소리가 들린다. 기초문화재단에서 직접 사업을 하기보다 지역 내 문화예술단체와 지역민들이 주체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거들고 지원하고 연결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이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기초를 통해 N개의 서울문화예술콘텐츠를 만들어 간다면 기초문화재단은 금천구 경우 N개의 금천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리라. 그제서야 비로소 대도시 서울 안에서도 지역문화예술생태계가 살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이든 지역이든 문화예술계든 생태계의 원리가 엇비슷하다는 걸 실감한다.
지시하고 복종하는 관계에서는 아무것도 자생할 수 없다.
절대적으로 환대하고 기꺼이 연대할 때 스멀스멀 변화가 작동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인정받은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돕고, 살필 때 성장하는 일이 가능하다.
조직에서는 직원들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해서 잠재력을 발휘해 일을 하도록 돕고,
지역에서는 지역민과 관련 단체들이 내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고, 문화예술계 또한 스스로 창작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 작동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책으로 펴낸
영국의 ‘더 케어 콜렉티브’(The care collective)의 주장이 요긴하게 다가온다.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앞서야 하며 협력적인 상호지원 네트워크가
사회적 역량이 되어 ‘돌봄’이 삶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선언이다.
나는 이렇게 또 바꿔본다. 환대의 힘이 연대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 본 원고는 월간 춤지 12월호 오진이의 문화광장에에 실린 'N개의 서울, N개의 금천' 글을 원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