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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갇힌 ‘우리’


 지난 삼월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한 얼룩말 사진이 등장했다. 동물원 우리 속에 있어야 할 얼룩말이, 아니 아프리카 초원에서 뛰어 다녀야 마땅할 얼룩말이 중국집과 음악학원 등이 있는 주택가 거리에 이질적으로 멈춰있는 모습은 그 어느 현대 사진 보다도 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얼룩말은 어린이대공원 동물원에서 살고있는 ‘세로’ 란 이름의 세 살 박이 얼룩말이었다. 지난 가을에 부모를 잃고 반항기를 겪고 있다고 했다. 야생말이라 길들여지기 어려운데다가 무리지어 생활하는 얼룩말인데 혼자 있다 보니 돌출행동이 일어났다는 해석이다. 

한 시간 여 만에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가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부디 잡히지 말았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고 얼룩말이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을 많이 가졌다.

*1)심지어  AI 스타트업인 라이언로켓은 이미지 생성 워크플로 웹 플랫폼 '스포키' 이용자들이 세로 탈출 소동 하루 만에 1,250여 건의 관련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네티즌들은 '답답한 동물원을 탈출한 세로의 꿈을 이뤄주자'라며 패러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로’가 두 발로 우뚝 선 채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 UN 콘퍼런스에서 발언하는 모습, 왕좌의 게임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등 다양했다.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는 반응을 보니 경쟁사회라는 ‘우리’ 안에 갇힌 현대인인 ‘우리’가 다름 아닌 ‘세로’의 모습에 투영되어 그렇게 열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로’가 다시 돌아간 동물원 ‘우리’를 떠올리며 직장을 비롯해서 집, 가족, 친구, 커뮤니티라는 사람들의 ‘우리’를 떠올려 본다. ‘우리’는  안전과 보호, 그리고 쉼의 울타리일 수 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적응하는 사이에 ‘우리’는 자기 성장이나 다양성, 포용성을 방해하는 칸막이 일 수도 있다. 

재난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중대 재해 처벌법이 생겨났듯, 경쟁사회 속에 던져진 우리 는 살아남기 위해 ‘우리’라는 시스템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낯 선 공간보다는 ‘우리’같이 익숙한 공간 속으로 숨어들고 안식한다. 

아울러 ‘우리’와 동음이의어인 ‘우리가 남이가’ 식의 ‘우리’의 이면을 살펴본다.

흔히 ‘우리’ 속에 연대와 협력이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라는 말 속에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배제성과 편협함이 한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끼리에 안주하다보면 ‘나’ 개인의 성장이나 표현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어 ‘우리’는 쉼 없이 새로운 ‘우리’에게도 활짝 열린 태도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지역 내 생활문화공간을 비롯 자치 공간의 운영진도 ‘우리’ 혹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동운영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취지를 살리고 있지만 공동운영단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 중심이고, 새로운 분야의 이질적인 사람들이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새로운 운영진을 공모하는 안내가 나가곤 하지만 늘 하던 사람 중심이라는 한계에 봉착한다. 지역마다 너도나도 추진했던 마을공동체사업도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평가로 인해 십여 년 간의 성과가 평가 절하되기도 하고, 사업이 도중에 바뀌기도 하고 아예 일몰되기도 할 정도이다.

심사 및 평가 등 각종 위원회의 구성도 다르지 않다. 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 할 정도로 장르별 전문가로 꼽히는 사람들은 지역 무관하게, 기관 무관하게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여간해서는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여 검증하는 기회나 부담을 누구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쏠림현상이 큰 문화예술분야 또한 소수 스타 중심의 그들만의 리그가 여전하다. 

비엔날레를 비롯한 큰 예술제 등 축제를 비롯한 지원 사업 영역에서도 원로작가니 청년작가 등을 예우하는 지원 사업 등이 생겨나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조차도 그들만의 리그 현상은 여전하다. 예술은 본디 시대와 불화하고 저항하는 DNA를 가지고 있지만, 예술행정은 시대와 친화하고 순응해야 살아남는다. 

그래서 ‘우리’ 안에 갇힌 ‘우리’는 자성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변화하기는 더 어렵고 혁신은 멀고멀기만 하다. 



 반면 ‘우리’에서 벗어난 ‘우리’의 반가운 사례도 있다. 늘 잘나가는 제작사가 도맡아하고 연출부터 음악, 무대를 비롯한 제작진과 주인공 풀이 따로 있기 마련인데 

그 공식을 깬 사례가 있다. 바로 세종문화회관 서울시 뮤지컬단에서 제작한 두 번째 창작뮤지컬인 ‘다시 봄’이다.

지난 해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역창제작유통사업 지원을 통해 10월에 북서울 꿈의숲에서 초연을 올린 작품인데 50대 이상의 중년관객을 주요 타겟으로 삼아 기획되었다.

특히, 배우를 비롯 공연 참여자들이 극 구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공동창작방식인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tre)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신선하다. 

게다가 서울시뮤지컬단의 50대 이상 배우로 한때 리즈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스포트라이트 대신에 주역배우를 받쳐주는 보조역할에 충실한 7명의 배우들이 출연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는 매력에 관객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울시뮤지컬단의 창작 뮤지컬 ‘다시 봄’ 에서는 ‘우리’에서 벗어난 ‘우리’ 의 사례가 

세 가지나 발견된다. 하나는 20-40 중심의 MZ세대를 벗어난 50-60대 베이비부머층의 새로운 관객층이 등장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단체에서 정년을 바라보던 배우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준 점이다. 남은 하나는 디바이징 씨어터 시스템으로 배우는 연기만 하고, 대본은 작가만 쓰고 연출은 연출가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할을 넘나들며 경계를 허무는 공동의 과정을 통해 자기 역할 뿐 아니라 극 전체를 상상하게 하고 내가 맡은 몫만 잘하면 된다는 의식에서 전체에 기여한다는 동기부여가 작동되도록 했다.

물론 저마다 역할이 따로 있고, 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품으로 여겨지기보다 전체를 바라보게 하고, 그 안에서 자기 역할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잠재력이 발현하는 시간과 기회를 누렸다.



 상명하복의 문화가 중심이었던 산업사회 경우 컨베이어 벨트시스템이 효율적이었지만 매력사회인 요즘은 일사불란이나 일목요연이 아닌 다 다르고, 저마다 다른 자유로운 발상과 표현이 더 힘이 세다.

MZ세대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부속품처럼 소모되지 않고 스스로 존중받으며 인정받을 때 최선을 다하기 마련 아닐까?

그러니 이제 ‘우리’에 갇힌 ‘우리’에서 벗어나 챗GPT가 답변할 수 없는 날 것의 자기 자신을 회복할 때다.

현대미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던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한 세 살 박이 얼룩말 ‘세로’의 모습처럼, 

정통 대본이 아니라 웹튠에서도  창극을 만들어내는 국립창극단의 ‘정년이’처럼,

벚꽃도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는 윤대녕의 소설 

‘상춘곡’ 글귀처럼  







1)연합뉴스 조유현기자 (03272023) 기사 일부 인용 

* 위 본문은 월간 춤지 4월호에 실린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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