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을 알았어도 내일부터는 남이야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 신뢰

by 라성

초등학교 때부터 알아온 오랜 친구가 있었다.

지금 내 나이가 마흔이니 30년을 알아온 샘이다.


학창 시절의 추억들

성인이 되어 대학생 때의 추억들

직장인이 되어서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


그동안 같이 마신 술의 양만큼이나

오랜 친구였지만 결혼식을 안 갔다.

지금껏 친구로 지내며 때때로 서운함은 있었지만

그날에 서운함은 분노에 가까웠다.


가장 친하고, 대학졸업도 전에 공사에 입사한

스마트하고 외모도 준수한 자랑스러운 내 친구.

내 결혼식의 사회는 당연 그 친구였다.


그러나, 항상 생각하던 게 있었다.

친구가 결혼하게 된다면 나에게 사회를 맡길까?

사실 나는 직업도 외모도 친구에 비해 뛰어난 게 없었고

누구 앞에 나설 수 있는 언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가 결혼할 때 나에게 부탁하지 않는다면

서운할 것도 같았지만 또 이해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부탁하더라도 부담스럽겠지만 의미가 있기에

사회를 봐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서로 직장으로 다른 지역에 있다가

결혼을 앞둔 몇 개월 전 커피숍에서 만남.

"내 결혼식 사회는 네가 봐줘야 된다. 너 결혼식 사회도 내가 봐줬으니"

무심코 친구가 내뱉은 말에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래,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결혼식 사회자가 된단 건

믿음이 가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다는 생각.

그래서 그 사실을 속으론 자랑스러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내에게도 직장동료에게도 얘기했다.


그리고, 사회를 잘 보기 위해 옷도 사야 하고, 남의 결혼식도 많이

가봐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아내랑 아이와 주말 나들이 하러 가던 차 안

전화가 왔다.

"뭐 해? 오늘 놀러 왔는데 잠깐 볼 수 있어?"

나는 갑작스러운 친구 연락에 가족과 있어 아쉽지만

다음에 보자고 했다.

"다름 아니라.. 내 결혼식에 노래 부를래?

스피커폰이라 아내도 듣고 있었다.

머리가 띵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무슨 소리냐고 사회 보라고 하더니'라고 받아쳤다.

"너 노래 잘 부르잖아, 사회는 여자친구가 아는 사람이 있어서.."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건 최소한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을 때 다시 친구에게 따지듯이 전화했다.

이런 건 최소한 만나서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네가 오늘 안된다 해서.."라고 친구가 말했다.

네가 오늘 갑자기 전화하니 안 된다 한거지..

그리고 통화로 말하더라도 '노래 부를래'가 아니라

자초지종을 얘기해야지 않냐며

나랑 지금 장난하느냐고.. 술도 먹은 상태라 화를 쏟아버리고 끊어버렸다.


최대한 객관적이어지려고 우리와 친한 친구에게도 얘기했고, 아내에게도 얘기했다. 다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여러 번 이해해보려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가벼운 사이었다면 이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다. 30년 된 친구가 나를 가벼이 대하는 마음이 송곳처럼 마음을 찔러왔다.


그 친구의 성격이 원래 감정이 무딘 편이란 걸 감안해도

그 무딤이 기본적인 것까지 못 지킬 정도라면

단지 오래된 친구라 할지라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랜 시간을 알았어도 내일부터는 남이야

신뢰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아

전해지는 마음이 없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