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질문이 사라진 헬조선을 무엇이 만들었나?
노벨상 못 타는 헬 조선? 왜?
2015년 '우리는 왜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에 자랑스러운 한국의 언론들은 나름의 오래된 분석을 마치 새로운 분석인 양 내놓는다. 이렇게 쏟아내는 분석들은 사실 작년 이맘때쯤 저장해두었던 기사를 약간 손봐서 다시 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이 뉴스 분석의 대부분은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간의 투자’가 단골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기간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를 생각하면 이러한 분석도 그렇게 빗나간 분석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노벨상 선정과정이 그렇게 꼭 신뢰할 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노벨상 좀 못 타면 어때?'라는 초연한 자세도 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간판이나 명함에 환장하는 대한민국에 이런 진득함과 초연함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 무리한 요구란 생각이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근데 세종 (필자의 호;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의 섹시한 귀를 쫑긋하게 만든 한 가지 설득력 있는 분석이 이스라엘 출신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아론 시카노버의 입에서 나왔다: 한국인은 질문하지 않는다. 세종도 시카노버의 분석에 상당한 정도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서점에 나와 독자를 꼬시고 있는 수많은 책들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작가가 가졌던 한 물음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책을 쓰기 전 가졌던 질문에 대한 여러 답이 그 책의 내용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쓰는 일은 지식이나 정보를 가공해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일이다. 이러한 지식생산과정은 작가가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에 질문하기를 포기한 한국인에게서 좋은 책과 연구결과를 기대하는 건 누가 봐도 무리한 바람이다. 멋진 질문이 부재함은 멋진 연구 결과가 많지 않을 것이란 의미고, 이것은 다시 헬조선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더 현실적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카노버의 분석에 세종도 한 표 던진다.
모든 학문적 발견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질문이 사라진 헬조선의 학교에서
무슨 얼어 죽을 노벨상?
노벨상 머 못 타도 상관없지만 너무나 애타게 기다리니까 세종이 이 원인에 대해 분석해보면 한국인의 또 한 가지 특성이 드러난다. 사실 이 글을 필자가 쓰는 이유는 노벨상 수상 실패의 원인에 관한 분석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원인을 분석하면서 헬조선의 교육철학을 분석하기 위해서다. 쉽게 말해서 한국 교육이 지랄이고 이 교육이 헬조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세종의 분석을 떠들어서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벨상 못 타게 하면서, 동시에 헬조선으로 만드는 한국 교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질문 못하는, 저항정신이 거세된 내시로 만드는 교육이다. 저항정신을 말살하는 한국 교육이 만들어낸 헬조선의 풍경을 살짝 그려보자: 정부가 시민의 건강을 위해 마약 값 (담뱃값; 담배가 대마초보다도 중독성이 더 강함)을 두 배로 올려도 수백만 명이 넘는 흡연자 중의 다수는 보건복지부나 기획재정부 앞에 가서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 담뱃값 인상에 저항하는 흡연자보다는 올른 세금 내기 싫어서 작심삼일이 될 금연계획을 세우는 선에서 저항의 의지를 나름 강력히 드러낼 뿐이다; 북한군의 총에 뚫리는 방탄복을 입고 근무하는 병사들의 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전해진다. 군대에 자식을 보낸 적어도 몇십만 명의 부모들은 국방부 앞에서 책임자 처벌과 함께 방탄복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할 거 같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 혼자 하기 힘들면 진정한 '어버이 & 어머니 연합'을 만들면 된다. 하지만 뚫리는 방탄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식을 군대 보낸 것과는 무관한 어버이 어머니 연합이 뉴스면에 수시로 자주 등장할 뿐이다. 이 분들도 2만 원 일당에 고생이 참 많다; 가장의 암 치료와 관련한 천문학적인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가정이 존재한다. 대통령의 공약 즉, 4대 중증질환을 국가가 전액 부담한다는 공약 파기가 있었다. 근데 청와대 앞에서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종도 잘 안다! 푸른 집 근처는 시위 금지지역이다. 근혜 언니는 자신이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청와대 주변을 시위 금지구역으로 정했나? 역시 이 놈들은 선견지명이 있다.
하도 얻어 터져서 이제 아픔도 못 느끼는
헬조선의 시민
근데 저항은 무슨?
위와 같은 헬조선의 풍경은 한 가지 질문을 유발한다: 왜 저항하지 않지? 위에 언급된 문제들은 시민들의 삶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은, 오히려 시민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다. 근데 '왜 침묵할까?' 란 물음에 대한 답이 궁금해서 필자도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헬 조선 (Hell Joseon)과 함께 흙수저 계급론이 등장할 정도로 불평등의 정도가 저는 한국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의 젊은 2, 30대는 죽창을 들고 일어서지 않는다. 죽창은 관두고 투표도 대략 두 명 중에 한 명은 안 한다. 정말 박노자 교수 (노르웨이 출신의 한국학 박사)의 분석처럼 아직도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부터 이어질 세종의 분석이 더 타당할까? 정리하면, 밑에 이어질 세종의 놀라운 통찰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만들어 냈다: 질문과 저항정신을 상실한 뇌 없는 대한민국을 만든 가장 큰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질문과 저항이 결핍된 이런 헬조선이 탄생했을까?
질문과 저항이 부재한 대한민국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란 물음은 세종으로 하여금 너무나 쉽게 교육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세종이어서 문제의 본질을 바로 꿰뚫는 직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가 가지는 공통의 특성은 이러한 문제의 해법이 한 영역이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해법만으로는 풀릴 수 없다는 점이다. 여러 최신의 학문적 발견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때로는 뜻하지 않게, 때로는 의도적으로 혁신적인 해법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융합 지식을 필요로 하고,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인 필자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종합지식에서 나온 통찰을 떠들어야 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다. 사실 떠드는 것을 좋아해서 떠들고, 더 나아가서 이 떠듬이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자기 체면을 걸며 세종은 산다. 이래야 의미 없는 인생이 약간의 의미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필자는 알기 때문이다.
헬조선 최고 (?) 지적 기술은 눈빛만 봐도 그분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이쯤 되면 본론으로 무엇을 얘기해야 하는지 잊을 듯한데 사실 이건 강의가 아니고 글이기 때문에 주제를 찾기가 매우 쉽다. 주제는 이 질문이었다. ‘교육의 주된 공간인 학교는 왜 질문과 저항정신을 말살하려 하는가? 그리고 이어서 학교에서 도대체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필자는 학교교육이 수많은 종류의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저항보다는 순응과 복종을 학생들에게 학습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과학의 발전과 민주적인 사회 건설을 위한 시민의 필수적인 자질인 질문과 의심하는 능력을 길러내기보다는 단순한 사실을 암기해서 시험성적을 올리는 데에만 학교 교육이 집중해왔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단지 지식을 넣어주려고 있는 게 아니다. 학생들 스스로 지식을 찾게 만들고, 그 찾은 지식을 여러 지식을 활용해 비판적으로 판단하면서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 학교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세종은 굳게 믿는다. 하지만 정답을 외우기만 한 애들이 보여줄 수 있는 지적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국내 스마트폰처럼 스티브 잡스 형이 만든 혁신 (아이폰)을 그저 빨리 따라가는 능력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빨리 따라가는 것 (fast following)은 중국이 쩐다. 조선산업에 이어 전기, 전자, 자동차, 반도체 산업도 중국 업체에 따라 잡힐 차례를 떨며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럼 한국은 머 먹고사나? 잡스형처럼 혁신적인 인재 (first mover)를 만드는 교육으로 하루빨리 교육철학을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중국의 거대한 파도에 삼켜지지 않고 그 거대한 파도를 탈 수 있게 될 것이다. 근데 교육부의 고위직에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하는 관리가 있는 상황에서 이런 대전환이 가능할까? 란 우울한 마음이 세종을 압도한다. 하지만 개, 돼지가 한번 마음먹으면 역사의 거대한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역사적인 교훈이 또 세종에게 희망을 준다. 이 정도면 거의 조울증이다.
학교는 또 한 가지 독재사회를 위해 필요한 소중한 (?) 자질을 학생들에게 길러준다: 순응이다. 쉽게 말해서 학교 교육은 말 잘 듣는 애들을 너무 사랑하고 그 애들을 상주며 서울대에 입학시킨다. 그래서 이렇게 말 잘 듣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기업이나 정부로 가면 자기 윗사람의 감정과 지시를 정말이지 잘도 알아챈다. 헬조선의 인재들은 자신이 평생 동안 쌓아 온 지식과 양심에 반하는 명령도 잘 따른다. 이 정도면 한국 교육의 효율성은 OECD 어느 국가에도 뒤처지지 않을 듯하다. 정리하면 초등, 중등, 그리고 고등 교육으로 이어지는 16년 동안 훈련된 질문 없음과 순응의 특성이 노벨상을 못 타는, 저항정신이 거세된 헬 조선으로 만들었다는 세종의 분석은 박노자 교수의 분석보다 더 탁월해 보이지 않는가?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세종의 분석을 뒷받침할 대중교육 (mass education)의 출현 배경과 교육전문가들을 포함한 지구 천재들의 학교교육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안티 헬조선을 위한 대안적인 교육철학에 대한 내용이 그 뒤에 이어질 것이다. 궁금하지 않은가? 드라마 한 편 보는 시간보다 이 글을 끝까지 읽는 게 더 짧다. 정독을 권한다. '질문 없음과 순응'이라는 놀라운 (?) 능력을 개발하는 헬조선의 학교교육의 본성에 대해 이제는 좀 인식해야 한다.
교육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 아인슈타인 -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학교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있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유익한 지적은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점이다. 세종도 똑 같이 학교가 머 같다고 브런치에서 계속 외치지만 이렇게 길고 드립으로 가득 찬 글은 사람들이 잘 안 읽기 때문에 세종의 외침도 모기 소리처럼 작게 느껴진다. 학교교육에 관한 대표적인 여러 평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결코 학교 수업이 나의 교육과정을 방해하게 내 버려둔 적이 없다' (마크 트웨인); ‘나의 교육이 유일하게 방해받았던 때는 내가 학교를 다닐 때였다' (윈스톤 처칠); ‘교육은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잊어버릴 때 가능하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소설가, 수상, 그리고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학교에 왜 이런 독설을 마치 자신들이 저질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빙의한 것처럼 던졌을까? 필자는 공기반 소리반의 저질 심사평보다 위의 인물들이 내린 대중교육에 대한 평가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뢰한다. 역사적인 위인이라서?! 아니다. 공교육 등장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좀 알면 아인슈타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사실 칼 마르크스도 학교교육에 대해 더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사실 세종에겐 아인슈타인 형보다 칼 마르크스 형이 더 끌린다. 왜냐? 오해하지 마라! 세종은 성소수자가 아니다. 칼 형은 필자의 선배이기 때문이다. 독일 본 (Bonn) 대학 본관 건물 옆에 칼 선배가 살던 집 1층에 이치방 초밥집이 있다. 괜찮은 점심 메뉴를 제공해서 세종이 몇 번 들러주는 성은을 베푼 적이 있었다. 갑자기 자랑질해서 독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근데 간판을 하도 좋아하는 대한민국이어서 세종이 아무리 연구원이라 해도 간판을 얘기 안 하면 안 알아주는 머 같은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종인 나도 머 같은 문화가 싫지만 잠시 눈 꾹 감고 편승하려 한다. 변명이다. 자랑질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 그만하련다. 참아주셔서 감사하다.
학교는 무뇌의 노동자를 대량 생산하는 산업화 시대의 또 하나의 공장이었다
- 세종 -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대중 교육 (mass education)의 등장 배경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19세기 유럽의 대중 교육의 등장에 대해 칼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학교는 동시대의 지배적인 경제제도인 자본주의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학교는 자본주의의 하인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소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했다. 쉽게 말해 공장의 기계 매뉴얼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단순한 계산이 가능한 엄청난 수의 임금 노예가 산업화 시대에 요구되었다. 그래서 찍어냈다. 학교가 그 표준화된 노동력을 찍어내는 또 하나의 공장이었다. 물론 이때는 또 한 종류의 노동력이 더 필요했다. 군인이었다. 총기를 다루고 기본적인 총기 수리, 그리고 간단한 전술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엄청난 수의 군인도 필요했다. 왜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힘없는 국가들의 땅과 자원, 그리고 저가 또는 거저 얻을 수 있는 노동력을 무력으로 약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 유럽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독립을 지키려는 훌륭한 젊은이들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동시에 아무 생각 없는 수많은 군인들이 필요했다. 이 군인들은 자신이 죽이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훌륭한 젊은이들이 누군가의 아들이며 오빠이며 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어야 했다. 그래서 정말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다. 이 시기의 유럽은 제국주의라는 더럽고 피 튀기는 욕망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이 시대는 학교에게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노동자와 아무 생각 없이 사람 잡는 군인을 대량으로 생산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이런 인재들을 찍어내는 학교는 학교라는 이름만을 가진 또 다른 형태로 위장된 공장이었다. 산업화와 제국주의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채워준 수단이 학교였다. 자연스럽게 산업화의 또 다른 공장인 학교에서 생산되는 두 종류의 노동력은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 두 가지가 학교가 생산한 노동력에는 결여되어 있다.
골라! 골라! 의심과 저항? 그게 먼지도 몰라!
말 졸라 잘 들어!
- 세종 -
이 두 가지 특성은 '의심과 저항'이다. 학교라는 생각 공장에서 의심하도록 길러진 인재들은 사장의 잉여가치 즉, 회사 사장의 이익 독점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가 사장의 이런 과도한 노동력 착취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기업 하기 힘든 나라가 된다. 근데 여기다가 사장이 노동자에게 입 닥치고 내가 주는 대로 받아! 너 말고도 일 할 놈들 많아! 이러는데 동료 노동자와 힘을 합쳐 파업을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저항한다면 이런 노동자가 가득 찬 나라는 사장들에게 분명 헬 조선이 될 것이다. 이런 헬조선이라면 필자는 환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의심과 저항이 탑재된 노동력은 눈 씻고 찾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가 한국에 비해 월등하게 향상되었던 이유는 세종의 선배인 칼 마르크스 형님이 또 큰 역할을 하셨던 점을 여러분도 아실 둣 하다. 참 세종은 행복하다. 이런 분을 선배님으로 두다니! 그래서 필자에게 칼 마르크스는 단지 수많은 철학자 중에 한 명이 아니다. 마르크스 선배이다. 또 자랑질이다. 진짜 자랑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왜 군인에게 생각하지 말라고 할까?
의심과 저항 정신이 학교에서 생산된 노동력에 탑재되면 19세기 마치 유행처럼 유럽이 벌였던 제국주의의 피범벅이고 더러운 식민주의 정책을 펼 수가 없었다. 군인은 아무 생각 없이 장교가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미셸 푸코의 말을 빌려보면 근대의 군인 훈련의 목적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관이 가르쳐 준 '매뉴얼을 외워서 그 매뉴얼 대로만 따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을 효과적으로 잘 죽이는 군인보다 교관이 가르쳐준,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그다지 효율이 떨어지는 매뉴얼대로 훈련된 군인을 원한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냥 거대한 식민주의 전략에서 쓰고 버려질, 그리고 언제나 대체 가능한 군인들을 권력자들은 원했기 때문이라고 푸코 형은 지적한다. 참 멋있는 형이다. 이 형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 형에 대한 연구서적이 수십 권이 나올 정도의 천재였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 학자였다. 근데 안타깝게도 성소수자였다. 아마 많이 고생했을 것이다. 푸코 형의 철학에 대해선 나중에 또 세종이 자세히 소개할 것을 약속하고 다시 하던 얘기로! 근데 어쨌든 이러한 군사 훈련 방식은 낯설지가 않다.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다. 그렇다.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혹은 다녔던 학교가 우리를 이렇게 길렀고 아직도 우리 소중한 자녀들을 이딴 식으로 기른다. 샘 말 잘 듣고 잘 외우면 상주고, 심지어는 그 애들에게 서울대 입학을 선물한다.
어딘가 닮은 군대와 학교?
학교에서 샘이 가르쳐 준 내용이 20년 전에 생산된 지식이거나, 심지어는 한 세대 전의 낡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때 그 지식의 효용성과 유통기한에 대해 한 아이가 문제 제기하면 그 아이는 찍힌다. 생계 부도 엉망이 되고 교장한테 찍여서 추천을 받지 못할 수 도 있다. 그리고 필자가 운영하는 생각공장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보다 전 분야에서 골고루 더 많이 알면 학교의 일부 샘들은 그 아이들한테 화낸다. 심지어는 교과서에 있는 얘기만 하고 생각공장에서 배운 학자들의 이론과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수업시간에 말하지 말라고 한단다. 학교는 역설적으로 교육과 연구의 결과를 억압하는 학문의 장이 되었다. 이런 학교에서 살아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윗사람의 말을 잘 따르는 거다. 쉬운 예로, 샘이나 교장한테 개기지 말고 말 잘 들으면서 이게 혹은 저게 중요하니까 외워하면 그냥 잘 외우는 거다. 여기서 샘이 가르친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는 불경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학문 분야의 연구 결과는, 그리고 이로 인한 혁신은 '질문과 의심'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개에게나 줘라는 식의 교육이다. 중국에 여러 모로 따라 잡히는 경제 현실에서 헬조선을 그나마 이렇게라도 떠 받치고 있는 토대를 한국 교육이 야금야금 착실하게 허물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자꾸 지진이 일어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필자는 흔들리면서 허물어지고 있는 헬 조선을 느낀다. 세종이니까!
애플과 샤오미 사이에 낀 흔들리는 헬조선
- 세종 -
마르크스 선배의 분석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다소 충격적인 분석일 수 있지만 마르크스 선배의 분석을 뒷받침해 줄 많은 증거들이 있다. 1870년의 영국의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을 위한 토론의 사례가 마르크스의 교육에 대한 독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영국의 의무교육 법령은 영국의 10세까지의 모든 아이들에게 의무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입법 이전에 학교 교육은 선택 사항이었고 당시의 통계를 살펴보면, 오로지 인구의 반 정도만 학교에 출석하고 있었다. 학교 출석률은 시골지역으로 가면 훨씬 낮았다. 왜냐하면,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지역에서도 아이들의 노동력이 가족의 생계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의회에서 나왔던 이 법령에 관련한 몇 가지 논평들을 살펴보면 1870년의 의무교육 법안의 통과는 국민 다수의 정신의 함양과 교육에 대한 애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뿐 만 아니라 노동자의 의식에 고전과 전통에 대한 위대함이나 과학에 의해 밝혀진 자연의 경이로움을 가르치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대중 교육의 도입에 숭고한 의도는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중을 위한 의무교육의 도입은 영국이 기초 교육과정을 이수한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나 미국에 비해 경쟁력 측면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유래했다. 당시에 미국과 프러시아는 이미 초등 의무교육을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을 도입하게 된다. 영국은 유럽, 미국과 같은 자국의 경쟁자들이 이러한 의무교육의 도입에서 많은 혜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 상업과 산업, 심지어는 전투에서도 의무교육의 혜택을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누리고 있었다.
입 닥치고 말 잘 듣는 임금 노예와 군인이
졸라 많이 필요해!
영국의 수상인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당시에 에든버러 리뷰에서 프랑코-프러시안 전쟁에서 프러시안의 놀라운 승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고 한다: ‘분명히’, 독일 측의 승리는 체계적인 대중 교육의 덕분이었다. 영국의 의무교육의 도입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의무교육의 도입은 자국을 산업적이고 심지어는 군사적인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요약하면, 여러분도 이제 눈치를 채셨겠지만 대중교육의 시작은 '말 잘 듣는' 공장 노동자와 군인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왜 학교가 비판적인 사고력을 가진 학생들을 길러내지 못하지?’라고 비판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유가 다 여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학교의 존재 이유가 어떤 형태의 권위든지 의심이나 비판적인 판단 없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인간형을 대량 생산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 돼지처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윗사람이 명령하면 좀 내키지 않아도, 또는 의심이 들어도 입 닥치고 임무를 수행하는 그런 노동력이 대량으로 필요했을 뿐이었다. 의심하고 저항하는 인재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실에 대해, 그리고 이런 독점을 보호하는 제도와 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이고, 급기야는 그 독점된 권력을 나누자고 요구할 텐데 이러면 각 사회의 귀족들에게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학생은 현재의 대의민주제가 사기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바른 정의 (독점된 권력의 정의롭고 공정한 분배가 민주주의다!)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이런 인재들은 극혐의 인간형이면서 동시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학교는 절대 이런 인재를 생산해서는 안된다.
독점된 권력을 시민이 공정하고 정의롭게
나누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
민주주의라 가르치는 생각공장
왜냐하면 생각공장에서 필자에게 교육받은 아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독점된 권력을 시민 다수에게 정의롭고 공정하게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면, 380조의 예산계획과 그 사용에 관한 결정권, 사법부가 독점한 법의 해석 권한, 입법부가 독점한 입법권을 시민에게 공정하고 정의롭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고 모든 대한민국의 시민에게 귀청 터지게 물으라고 재촉하는 함의를 민주주의란 용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공장의 아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크 트웨인, 윈스톤 처칠,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이어 사회사학자 트리벨리언 (G.M. Trevelyan, 1978)의 교육에 관련한 입장을 하나 더 들어보자: ‘대중교육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엄청난 수의 대중을 생산했다. 하지만 무엇이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인지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즉, 판단력이 결핍된 엄청난 다수의 대중들만 현재의 학교교육이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거대하면서 사나운, 하지만 뇌가 없는 짐승이 되었다. 개, 돼지가 되었다. 어차피 우리를 뇌가 없는 거대한 짐승이라고 부르는 인간도 우리 사회의 귀족을 위해 짖어 대는 개이기 때문에 피장파장이다. 그러고 보니 대중교육의 공간인 학교는 개 사육장이 된 것처럼 보인다. 개만 날뛰는 헬조선이 된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똥과 된장의 불분명한 경계??
잠깐 똥과 된장은 구별하기가 쉽다. 인문학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비판적인 사고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 똥과 된장 얘기를 꺼내 들었다. 비판적인 사고력이란 여러 기준에 따라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비판적인 사고력이 필요한 예를 조금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며 vs. 지양되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아름답고 vs. 추한지, 정말 영화나 드라마의 작품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력인지 vs. 통념과 상식에 저항하는 목소리 혹은 대중문화 영역의 규범과 기준을 파괴하는 시도여야 하는지, 경쟁을 통한 경제 성장의 원칙이 우선순위인지 vs. 환경과 노동자의 권리를 배려하는 경제 노동 정책이 더 바람직한지 등등의 영역에서 비판적 사고력 즉, 판단력이 요구된다. 이런 능력이 결핍된 채 대량 생산된 인재들이 바로 현재의 학교가 만들어낸 인간형이다. 그래서 노동자를 대량 생산하는 학교를 통과한 대한민국의 인재들은 고등교육인 대학을 졸업해도,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섹션으로, 영화를 고를 땐 되도록 천만이 본 영화로, 예술 작품을 보면 평론가들의 주둥이에 자신들의 귀를 고정시킨다. 심지어 맛집을 선택할 때에도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을 선택한다. 정말 이 정도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는 거다. 우리는 바보를 대량 생산하는 학교에서 이렇게 작품을, 여러 제도와 법을, 예술 작품을, 경제제도를 비평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린 판단이 필요할 때, 항상 전문가에게 의존하거나 머릿 수에 의존한다. 이쯤 되면 똥, 된장을 자신 있게 구별할 수 있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을까?
온통 돈과 권력에 환장한 전문개(?)들만
미디어에??
하지만 오늘날의 전문가 집단의 행태를 보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믿었다가는 큰 코 다칠 가능성이 높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의 경제서적을 왜곡하면서 불평등이 경제 성장을 촉발시킨다고 했다가 원저자에게 개쪽 당하고, 가습기 살균제의 유독성에 관한 데이터를 국립대의 한 화학교수가 삭제해서 법원에 제출해 살인 기업의 지킴이 역할을 하고, 무슨 된장하고 이름이 비슷한 법률 회사는 이 냄새나는 연구자료를 판사 보라고 법정에 제출하고, 신문사들이 운영하는 쓰레기 방송에 나와서 복지는 포퓰리즘 (인기 영합주의)이라고 거품 물고 재벌과 권력자들을 위해 짖는 이런 개들이 바로 헬조선에 기생하는 전문가 집단의 생얼이다. 복지제도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이렇게 해서 유럽의 국가들이 망했다고 떠든다. 망할 족속들에게는 망한 것만 보이나 보다. 자신의 양심을 슬그머니 빼서 집 냉장고에 두고 방송국에 출근한 소위 전문가들은 지랄을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왜 회장님의 손자에게 무상급식을 해야 되느냐며 서민 코스프레한다. X맨 연기 정말 쩐다. 왜냐하면 재벌들은 우리 손자 밥을 학교에서 공짜로 안 줘도 되니까 제발 세금만 올리지 말라고 이 개들에게 신신당부한다. 그러면 이 전문가들은 회장님이 세금 별로 내고 싶은 생각이 없데라고 우리에게 솔직히 말 안 하고 지들이 마치 우리 편인 양 떠들며 지랄한다. 그리고 이렇게 떠든다: 보편적 복지보다 선별적인 복지 즉, 가장 필요한 소외계층에 복지 혜택을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게거품 물고 우리 편 인척 한다. 거품 무는 거 보면 개가 맞긴 맞는 거 같다. 한 교육부 차관은 자신의 학자적인 양심을 구부려 가며 역사교과서를 단 한 종류로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다 학문적 변절이 드러나 차관직에서 잘리기도 한다. 세종이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역사학 교수는 자신도 돈 받고 역사를 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역사가의 의무는 자신이 쓴 역사가 유일한 역사가 아니고, 그저 한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일이라고 하는데........ 위와 같은 헬조선의 지식 전문가들의 변절은 정말 쩐다. 세종이 언급한 전문가들의 이런 머 같은 행동들은 빙산의 일각이며 삼척동자도 다 알게 들통난 사실들만 열거한 거다.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종도 마찬가지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을
누가 우리 입에 넣어 줬을까??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의 인터뷰를 보도하는 언론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이 전문가 나부랭이들의 의견을 듣고 거의 자동적으로 외웠다가 자신이 인터뷰할 때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지? 하며 스스로의 식견에 감동하는 사람들 보면 세종의 복장이 터진다. 이런 분들에게 똥과 된장의 구분은 상대성 이론과 자본론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가 보다. 이런 자랑스러운 인재들을 우리 학교가 길러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길러낼 예정이다. 쭉~! 필자처럼 떠들지 않으면 이런 훌륭한 노예교육은 계속된다. 다시 19세기의 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정리해보면 당시에 도시지역의 수많은 공장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하지만 고분고분한' 노동자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공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기업가들의 필요를 정치인들이 재빠르게 파악해서 노동자와 군인을 전문적으로 대량 생산하게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는' 노동자와 군인을 대량 생산했던 공장이 학교였다.
그럼 종합 지식인인 존 듀이와 세종의 대안은?
이제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인 필자가 현재의 대중교육제도를 머 같이 보고 있는지, 그리고 아인슈타인, 칼 마르크스, 트리벨리언 등의 의견에 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지 이해하셨을 거다. 헬조선의 시민은 정부와 기업이 온갖 갑질을 해도,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쳐도 저항하지 못하는지, 우리는 스티브 잡스, 저커버그, 엘론 머스크 등등의 혁신적인 기업가 (first-movers)를 왜 만들지 못하고 중국에 곧 추월당할 제품과 서비스만 만드는 인재와 기업들 (fast followers)을 가지고 있는지, 노벨상 수상은 헬조선에게 왜 너무나 먼 꿈같은 일이어야 하는지도 아셨으리라 믿는다. 생각공장의 수석 연구원이자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 (세종; 웃어도 된다!)인 필자는 교육에 관한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말 잘 듣는 노동자와 군인을 대량 생산하는 현 교육제도를 '저항하는 민주시민과 혁신적인 기업가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종의 교육 철학이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해 죽겠나? 그래도 할 수 없다. 진득함을 가지고 세종의 교육 편 2부와 최종회를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세종의 교육철학에 대한 글을 정리해서 교육학 논문처럼 보이지 않고 이런 잡글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에는 세종에게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종도 먹고사는 일에 목매는 일반 시민이다. 먹고사는 일하면서 이런 잡글을 쓰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렇게 길고 지적인 글을? ㅎㅎ 어쨌든 궁금하셔도 좀 기다려 주시길 간곡히 요청한다. 이렇게 요청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세종의 글을 기다리고 있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봤으면 좋겠다. 근데 너무 길어서 사실 읽어주리라 크게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런 글을 시간 내서 읽어주는 분들에게 정말 고마운 건 세종의 진심이다.
Bibliography
Thomas, G. (2013), ‘Educ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