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에 조종되는 좀비가 붉은 심장이 뛰는 인간이 되려면??
돈만을 쫓는 좀비의 세계?
21세기 대한민국은 역사 이래로 그 어느 때 보다 다원화된 사회다. 수많은 유형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인 공동체 속에서 대한민국 시민은 어느 한 조직이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민들은 각기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도시화를 겪기 전의 시민들의 삶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지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이 일어난 일들의 파장이 어떤 강도로 누구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속의 수많은 집단과 조직의 지향점이 각기 다를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유형의 집단과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결국 단 하나의 가치 즉, 돈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이 추구하는 유일한, 혹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돈이 될 때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좀비를 대량 생산하는 문화 (생각)공장?
현대인들은 여러 종류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사소하게는 시민들이 여가 시간에 나누는 대화의 종류나 주제를 정해 주는 것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여러 현상이나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견해의 대부분을 형성해주기까지 한다. 참 친절하게 우리의 생각을 조종한다. 우리의 시선도 미디어가 비추는 곳만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미디어는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이며, 심지어는 이 주제의 어떤 측면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지까지도 결정해 준다. 또 다른 한편으로, 텔레비전, 인터넷, 신문 등을 펼 때마다 상품이나 서비스의 광고에 시민들은 노출된다. 무늬만 기사 형태인 광고 (advertorial; advertisement + editorial의 합성어)들은 심지어 우리가 무엇을 소비해야 하는지, 동시에 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왜 소비해야 하는지를 교육 (?)시킨다. 동영상 보그 (Vogue; 안티 아방가르드적인 패션잡지)인 드라마뿐 만이 아니다. 요즘은 9시 뉴스를 봐도 간접광고나 기사 형태의 광고를 우리는 쉽게 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실상은 광고인 것을 기사로 인식한다. 한 예로, 최근에 캐나다 구스라는 소위 명품 패딩이 스마트폰 뉴스뿐만 아니라 9시 뉴스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 글은 2013년 12월 6일에 필자가 쓴 글을 2016년 10월 30일에 편집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뉴스 보도의 방향은 국산 유명 브랜드마저도 이 명품 패딩의 디자인을 따라 한다는 취지의 뉴스였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뉴스 보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뉴스일 뿐 실제로는 캐나다 구스라는 현재까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명품 브랜드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주는 대표적인 광고성 기사다. 새로운 아이폰이라든지, 신형 자동차 같은 소비재가 나올 때마다 기사의 형태로 뉴스는 보도한다. 급 궁금해진다. 이렇게 기사로 광고를 해주면 방송사는 광고주인 기업들로부터 얼마를 받을까? 동영상 보그인 드라마는 대놓고 광고한다. 수많은 남녀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소품들에서 자동차, 심지어는 집 까지도 간접광고 (Product Placement)의 형태로 소비자인 시청자를 유혹한다. 대중문화와 대중문화를 생산해서 확산시키는 미디어가 각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이슈들에 대한 시민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욕망의 대상 즉,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해야 하는지까지 정해준다. 다양한 권위와 법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포함해서 이러한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아무 생각 없이 미디어가 전달하는 것을 무조건 믿고, 미디어에 의해 부추겨진 욕망에 순순히 순응하는 주체를 은유적으로 좀비 (zombies)라 부른다. 언론과 대중문화가 대량으로 생산해서 유포한 생각이나 신념, 그리고 욕망의 대상을 소비하면서,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조종을 받는 다수의 인간이 좀비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나 신념, 그리고 여러 가치관, 심지어 특정 상품을 소비하고 싶은 욕망마저 언론과 그 언론이 조장한 문화에 의해 형성된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왜? 불편하니까!
좀비 문화를 수호하는 충실한 전문개들?
노암 촘스키는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각 사회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소수의 지식 전문가 집단 (guardians)을 훈련시키고, 한편으로는 다수의 중산층에 속한 시민에게는 더 많은 상품을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라고 미디어를 통해서 세뇌시킨다. 촘스키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한 노학자의 허황된 음모론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언론이나 교육기관에서 신자유주의 (자유시장, 규제완화, 민영화)와 같은 지배 이념을 마치 학문으로 둔갑시켜서 떠들고, 공동체의 문화를 좀비 문화로 만드는 전문개 (?)들이 역사적으로 늘 존재해왔다. 또 하나의 예로, 플라톤의 국가론이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거의 전 세계의 모든 대학에서 철학 고전이나, 인문학, 혹은 여러 이름의 교양과목의 형태로 개설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관한 영국 지식인들의 동시다발적인 관심 폭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왜 고대 그리스의 여러 대표적인 철학자 중에서도 플라톤이, 그리고 그의 여러 저서들 중에서도 왜 하필 국가론이 대학의 교수들에 의해 집중 조명되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생각공장의 시선 - 플라톤의 국가론이 추천도서라고?'의 글을 참고하시면 영국과 전 세계의 귀족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특권인 입법권을 시민 다수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플라톤의 국가론을 교묘히 활용했는지를 이해하실 수 있다. (생각공장 브런치의 인기글입니다. 더욱 많은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좋은 지식은 확산시키면 시킬수록 사회는 더 건강해집니다. 생각공장 브런치의 모든 글은 건강한 사회를 위한 지식확산 운동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쓰인 결과물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불평등의 원인은 비대칭 정보 상황 즉, 한 계층에 의한 지식의 독점에 있습니다. 이 지식 독점을 해소하는 것이 불평등의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생각공장은 지식확산 운동을 작은 목소리지만 브런치를 통해 전개하고 있습니다. 생각공장 브런치의 글이 확산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시는 독자분들의 많은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좋아요'와 '구독'도 해 주시고요 ㅎㅎ 댓글까지 달아주시면 금상첨화죠 ^^) 플라톤의 국가론을 귀족들이 활용한 결과는 참혹했다. 귀족들과 그들의 개인 전문가 집단의 노력의 대가로 21세기 대부분의 민주주의의 형태는 소수의 선출된 엘리트 집단에 의한 국가의 통치 즉, 플라톤이 주장했던, 동시에 19세기 이후의 각 국가의 귀족이 간절히 바라던 대의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mocracy)로 고정된다. 시민들은 4년에 단 하루 동안만 정치 참여의 기회 (투표)를 허락받는다. 다르게 설명하면 귀족들이 후원하고, 훈련시킨 전문개 (?)들의 덕택으로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민들은 정치에서 거의 완벽히 배제된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 정도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진정한 (?) 민주주의 형태로 시민 다수가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귀족들이 훈련시킨 개들의 노력이 빛났다. 그래서 다수 시민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소유나, 소유를 통한 화려한 삶에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욕망의 부추김은 귀족들의 확성기인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그리고 대량으로 확산된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로 조장된 가치만을 쫓는 다수의 좀비와 그들의 문화가 형성된다. 좀비 문화다. '화려한 삶'이라는 미디어나 대중문화에 의해 생산된 가치가 좀비 문화를 소리 없이 만든다.
귀족, 미디어, 전문개들의 연대 vs. 다수의 영혼 없는 좀비들?
요약하면 귀족들은 고등 교육의 형태로 시민 다수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정의를 학습시켰다. 그 결과, 시민 다수는 입법권이 귀족들과 똑같이 누려야 할 시민 자신의 권리인지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학교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시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에게 입법권이 주어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교육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 교육을 통해서 귀족주의적인, 그래서 반민주적인 대의민주제를 민주주의라 시민들은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확신은 필자와 같은 소수의 시민이 입법권을 귀족들에게서 찾아오자고 주장하면 '왜 그래야 하냐?'라고 귀족이 아닌 시민 스스로 의심하고 반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러한 세뇌 효과 덕택에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 (입법권의 독점을 통해 자신들에게 모든 법률과 제도를 유리하게 만듦으로써)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노암 촘스키가 앞서 주장한 것처럼 귀족들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계속해서 독점하기 위해 또 다른 전술을 사용한다. 미디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시민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부에 대한,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부추김을 통해서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정치의 영역 즉, 귀족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의 세계를 시민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특권의 세계인 정치영역은 매년 400조 가까운 눈먼 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눈먼 돈들은 소수의 살찐 고양이 집단 (정치인과 자본가)이 독차지한다. 4대 강 사업, 자원외교, 철도, 고속도로 민영화, 창조 경제란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결국 이런 이름들은 이 배부른 고양이들이 우리 돈 (세금)을 갈취해서 등쳐 먹는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은 정치 영역에서 시민들을 무관심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 정말 재밌고 매력적인 대중문화 상품을 개발해 우리를 현혹시킨다. 스포츠, 게임, 드라마, 영화, 리얼리티 쇼 (reality shows), 오디션 프로그램, 뮤지컬, 연극 종류도 참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로 우리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리고 눈먼 돈을 지내들이 다 독차지한다. 결과는 당연히 참담하다. 세금을 낸 시민들한테 복지로 사용되어야 할 돈이 소수의 이미 배부른 고양이들한테만 향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를 눈먼 돈이 있는 영역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미디어의 교묘한 시선 끌기에 다수의 시민이 넘어간다. 그 결과로 수많은 좀비의 무리들이 오로지 살아있는 인간의 몸만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상당수의 현대인들도 한 가지 가치만 주목하게 된다. 살찐 고양이의 바람잡이인 미디어가 조장한 가치다.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함을 통해서 화려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가 된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대한민국의 시민들보다 더 혹독하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수많은 갑질과 이렇게 치열하고 잔인한 경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돈에 대한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욕망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미디어를 통해서 학습된 우리의 욕망이다. 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현대인의 욕망은 고기만을 쫓는 좀비와 인간과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슬프게도 필자는 시민 다수가 좀비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다. 돈을 좇는 시민 다수가 제발 좀비여도 괜찮으니 눈먼 돈이 모여 있는 그곳에 그들의 시선을 돌려주길 간절히 바란다. 매년 눈먼 돈 400조가 모여있는 곳으로 5천 만의 좀비가 돌진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정부 예산 400조는 우리가 다양한 이름의 세금으로 만든 돈이다. 우리가 소비할 때마다 낸 세금 (부가세)이다. 우리는 그게 복지의 형태든, 기본 소득의 형태든 국가로부터 돌려받아야 한다. 다양한 복지제도는 절대 '무상'이 아니다. 우리가 낸 돈을 돌려받는 것이 복지다. 복지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주거, 의료, 교육, 연금 등의 공적 서비스를 저렴하게 공동구매하는 것이다. 복지에 대한 시민 다수의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특히, 이미 세금을 탈탈 털리는 중산층에 속하는 가장들이 복지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위에 언급된 공적 서비스 (교육, 주거, 의료, 연금 등등의)를 세금으로 공동구매하는 것이 싼지 아니면, 이런 공적 서비스를 개인이 구매하는 것이 싼지를 계산기를 꼼꼼히 두드려봐야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정치에 관심 가져달라는 필자의 애원이다. 위의 '슬프게도'부터 여기까지는 사족이다.
무엇이 붉은 심장이 뛰는 인간을 회색의 좀비로 만들었는가?
밈이다. 다양한 종류의 밈 (memes; 가치, 신념, 아이디어, 생각 등을 일컫는 말)으로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한 종의 유기체가 살고 있다. 이 생물은 자아 (self)라고 부르는 가공물을 자신의 존재라 믿으며 산다. 이 자아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밈의 복합체이며,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밈의 구조물 속에 산다. 이 생물의 종은 바로 인간이다. 밈이란 문화적인 생각이나 사상 등을 의미한다. 밈은 패스트푸드를 먹은 후에 콜라를 마시면 개운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유클리드의 기하학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밈들도 있다. 이와 같이 중립적인 밈도 있지만 부정적인 밈과 긍정적인 밈도 있다. 부정적인 밈은 다음과 같다: 귀족주의적인 대의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적이다; 기업의 돈에 의해 만들어진, 획일적인 가치를 확산시키는 문화가 대중문화다; 복지는 국민을 게으르게 만든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다. 반면에 대의민주주의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의 여러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보완되어야 한다는, 세계 지성들의 사상과 이론을 접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대중의 문화여야 한다는, 복지는 모든 시민의 당연한 사회적 권리이며, 시민 스스로 낸 세금으로 여러 공적 서비스를 공동 구매하는 것이라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장점을 모두 이용해 더욱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헌법이 보장하는 여타 자유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긍정적인 밈의 대표적인 예이다.
현대의 문화 구성 요소학 (memetics)은 인간의 자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아는 다양한 유형의 즉, 종교적인 여러 유형의 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밈들이 스스로의 복제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의 뇌를 점령한 밈의 복합체다. 원래 미메틱스 (문화 구성 요소학)라 불리는 이 학문은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학에 의해 시작된다. 인간 유전자가 스스로를 복제하면서 생명이 발달하는 것처럼 인간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밈들이 스스로를 복제해가면서 사람에서 사람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퍼지면서 인간의 정신이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밈은 인간의 문명을 만들어 낼 정도의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동종인 인간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적인 힘도 가진다.
흑사병보다 더 파괴적인 밈? 반유대주의라는 밈?
14세기 중엽의 유럽에 불청객이 한 번 지나가면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의 생명을 빼앗아간다. 이 불청객은 다름 아닌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로 알려진 일명 흑사병이다.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의 여러 측면 즉, 경제적, 종교적, 예술적인 측면에 영향을 준다. 인구 감소로 인해서 농노들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노동력의 비용이 상승하면서 교회 건축 양식에도 장식이 없는 수직적인 양식이 건축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 흑사병은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꿔 놓았다. 수없이 죽어 가는 동료 시민이나 가족을 보면서 당시의 유럽인들은 죽음이 자신들에게 늘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시의 사람들은 죽음이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아 가면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이 예술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죽음의 춤'이다.
유럽인들이 수많은 죽음을 초래한 흑사병을 겪으면서 보여준 또 하나의 반응은 인간이 동종인 인간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행동이었다. 흑사병은 생명의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흔하게 나타나는 다른 두 생물 (인간과 박테리아)의 종간 경쟁으로 본다면 그리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박테리아와 인간이라는 각기 다른 종간의 생존 경쟁이다. 하지만 기독교 대륙의 유럽인들은 흑사병을 재난이 아니라, 같은 생명의 종인 인간인 유대인들을 죽일 기회로 삼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제적인 채무를 해결하려 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때문에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의 상당 부분이 영주나 성주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상납되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가지는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인 혐오는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더욱더 뿌리 깊게 유럽인의 정신 깊숙이 박혀 있었다. 흑사병을 계기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며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일부의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일부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마을 우물에 독을 풀어놓아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누명을 씌우고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다. 1349년에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라는 한 지역에서 유대인 천 명이 화형 당했고, 독일 라인 강 유역의 대부분의 유대인 마을도 이러한 종류의 재난을 피할 수 없었다. 흑사병이 휩쓸고 간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프랑스의 대부분의 유대인 마을들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된다.
흑사병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박테리아와 인간의 종 사이의 경쟁으로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당시에 이루어졌던 유대인 학살은 정말 기이한 현상이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동안에 다른 종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가 동시에 유럽을 휩쓸었다. 다름 아닌 종교적인, 동시에 문화적인 '밈'이 유대인 학살의 보이지 않는 원인이었다. 무생물 박테리아인 밈은 천 년이 넘게 유럽인들에 의식 구조에 학습되어 왔기 때문에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균처럼 사라지지 않고, 이후에도 수백 년 간 더 수명을 누리면서 2차 세계 대전에 다시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로 다시 인간의 역사에 재등장하게 된다. 유대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편견에서 비롯한 밈은 당시의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전체 인구의 3분의 2의 생명을 요구했다. 기독교인 신이 된 유대인 청년 예수가 동족인 유대인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종교적 이유와, 여기에서 비롯된 한 인종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와 증오는 인간이 동종인 인간을 죽이는 일을 2000년 가까이 지속시키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이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혹은 경제적인 밈은 세대에서 세대로, 동시에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동료 기독교인들에게로 복제되면서 유럽인들의 정신을 오염시켜왔기 때문이다.
파괴적인 밈의 영향력에서 위대한 지성도 벗어나기 힘들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박테리아는 항생제의 발견으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해졌지만 밈이라는 무형의 박테리아는 인간의 의식구조 속에 뿌리 깊이 박혀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고 있다. 밈의 스텔스 (stealth) 기능 때문에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와 편견과 같은 파괴적인 밈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발견된다. 이러한 종류의 파괴적인 밈은 인간을 마치 동종의 살아있는 인간의 고기를 쫓아 무한 질주하는 좀비로 만들어 버린다. 이 보이지 않는 사악한 밈은 마틴 루터 (유대인의 재산 몰수, 추방, 탈무드 불태우기 등의 주장을 자신의 수십 편의 논문에다 쓴 대표적인 반 유대주의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 개혁가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에서 한 유대인을 비정한 고리대금업자로 묘사함; 그 유대인은 샤일록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명인 하이데거 (나치 당원;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유대인 학살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어느 전쟁이나 비슷한 인종학살은 있어왔다고 말함)까지 사로잡는다. 유럽에서 거의 2천 년 간 지속돼 온 반 유대주의는 필자가 추후에 다루기로 약속드린다. 어쨌든 이 밈은 작게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고착시키는 일에서부터, 심하게는 유대인 학살이나 박해를 선동하고, 이러한 행동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파괴적이고 잔인한 밈들이 인간의 정신에 더 복제되면 될수록 인간은 점점 더 동종인 인간을 소비하는 좀비가 되어간다.
여성을 소비하는 밈은?
인간이 가지는 수많은 종류의 편견 (meme; 밈)과 이러한 편견에서 비롯된 수많은 형태의 차별과 폭력이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일어난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파괴적인 밈들이 21세기에도 힘을 발휘한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을 더욱더 남성에게 종속시키고, 독립적인 여성을 ‘페미니스트’라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딱지를 붙여버리는 환경에서 현대의 여성이 살아간다. 이러한 밈들은 주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라는 하나의 대중 예술의 장르를 통해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복제된다. 왜냐하면 대중 예술의 한 형태인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현재의 질서 (status quo)나 가치 체제를 대중의 의식 속에 더욱더 견고하게 만드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차별받고, 남성이 지배하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현상을 대중으로 하여금 당연하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밈의 공장이 대중문화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드라마가 단연 돋보인다. 이러한 밈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밈을 더욱더 파괴적으로 만든다. 최근에 한 여성 연예인이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그대로 옮기면, ‘자신보다 연봉이 100만 원이라도 더 많아야 자신의 남자 친구를 존경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여성 연예인의 발언은 매우 상식적이다. 하지만 이 상식이 현재의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관계를 지탱시키는 근본 원인이다. 이것이 밈이 가지는 스텔스 기능이다. 상식이란 이름의 보이지 않는 밈은 남성의 우월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위를 남성과 여성 둘 다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고, 동시에 이러한 여성의 인식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열등한 여성 자신의 지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드라마를 포함한 예술 장르의 사실주의 (Realism)가 갖는 매우 보수적인 특성을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이 여러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다거나, 혹은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재생산하고 확산시키는 주체가 드라마다. 드라마는 양성 간의 차별 폐지나 완화를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여성과, 이에 협력해야 하는 남성이 둘 다 이 차별적인 우리 사회의 모습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보이지 않는 상식이라는 밈이 만들어 낸다.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상식이 바로 양성평등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이다. 역사적으로 가끔씩 여성 대통령이나 총리들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여러 통계자료는 현대 사회가 남성 지배적인 사회라는 모습을 강력히 증명한다. 20세기 후반에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와 동등한 임금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 시간제 근로자는 남성 정규직 노동자보다 평균적으로 37% 적은 임금을 받고 있고, 정규직 여성 근로자도 평균적으로 남성 정규직 근로자보다 17% 낮게 급여를 받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가정에서도 육아에 대한 부담이 여전히 주로 여성의 일로 여겨지고 있고, 이러한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성 정치인의 비율이 40%인 일부 북유럽 국가를 제외한 전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남성과 여성 정치인의 비율이 대략 80: 20의 비율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그나마 정치영역에서의 여성의 차별적인 상황은 경제 영역에 비하면 심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여성 CEO의 비율을 생각해보면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양성 평등의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은 여성들에겐 거의 재난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밈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밈들이 여러 미디어나 드라마에 의해 생산되고 확산된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에서 보이는 남성 캐릭터의 지위가 일반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여러 지위보다 높게 묘사된다. 상식적인 묘사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적인 드라마의 연출이 여성의 차별적 상황을 시청자들로 하여금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드라마가 생산하는 상식이라는 밈은 여성에게 차별적 상황을 고쳐야 한다는 인식, 혹은 의지의 싹을 아예 없애 버린다. 심지어 여성이 페미니스트를 혐오하게 만든다.
소수자를 소비하는 밈?
유대인 학살과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보이는 미모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특성은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쉽게 발견된다. 여러 유형의 소수 집단에 대한 다수의 폭력 또한 밈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다. 성적 소수자를 포함해서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인 소수자를 향한 다수의 폭력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형태로, 양심적 병역 거부 자들에 대한 대안적 군복무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로, 이주 노동자에 대한 경제적인 차별의 형태로, 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정치적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제한의 형태로 밈의 폭력성이 나타난다. 곤궁과 차별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을 보면 자연스럽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도록 우리 인간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설계되었다. 최소 수십 만년 동안 인류는 공감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의 인간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힘없는 소수자 그룹에 보이는 다수의 폭력과 차별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바로 보이지 않는 파괴적인 밈이 살인, 약탈, 그리고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 냈다. 바로 이 밈이 진정한 악마다! 이 악마가 인간을 좀비로 만들어 버린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좀비를 붉은 심장이 뛰는 공감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건?
역시 밈이다. 긍정적인 밈이다. 대략 2500년 전의 인도의 한 국가의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라는 불교 철학자와의 대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대화는 왕이 그 철학자에게 이름을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철학자는 왕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나가세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긴 하지만 나가세나는 단지 이름일 뿐이며,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을 한 밀린다 왕 역시 불교의 철학에 상당히 정통한 왕이었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 인간의 존재는 다섯 가지 요소 즉, 물리적인 형태의 몸, 느낌, 인식, 정신,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밀린다 왕은 알고 있었다. 이 불교 철학의 핵심은 이 다섯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하나도 인간의 존재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이다. 밀린다 왕은 이러한 원리를 마치 확인해 나가는 것처럼 불교 철학자에게 질문한다. 느낌이 인간입니까? 인식이 인간입니까? 등등의 질문을 하고 철학자는 매번 ‘아니오’ 란 답을 반복한다. 하지만 왕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철학자의 답은 좀 의외였다. 마지막 질문은 ‘그렇다면 느낌, 인식, 정신, 의식을 다 담고 있는 몸이 인간입니까?’였다. 하지만 나가세나는 이번에도 ‘아니오’라고 답한다. 이 대답에 주변의 사람들까지 놀라지만 이번에는 철학자가 왕의 마차에 대해서 같은 형식의 질문을 왕에게 던진다. 예를 들면, 마차의 바퀴가 마차입니까? 에서 마차의 바퀴를 연결하는 기둥이 마차입니까? 등등의 질문이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왕도 철학자에게 ‘아니오’라고 연속해서 답한다. 철학자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왕의 대답도 역시 놀랍다. 마지막 질문은 ‘바퀴와 마차의 기둥, 고삐 등을 포함한 모든 부품의 질서 정연한 합이 마차입니까? 였다. 왕의 대답은 놀랍게도 ’ 아니오 ‘였다.
이 수수께끼와 같은 대화의 목적은 인간과 마차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합쳐질 때 인간과 마차의 본성이 아닌 이름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대화의 진정한 목적은 이 이름들이 인간과 사물이 독립적인 자아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을 인간에게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불교 철학의 목적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내는 데에 있고, 인간이 처한 문제 상황의 근원에 '인간의 자아는 타인과 독립된 채 분리되어 있다; 타인이 불행하든, 행복하든 나는 혼자 행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교 철학자들은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즉, 자신을 남과 구별된 독립된 자아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이 자아에 집착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도 갈등이 생겨난다. 이러한 갈등이 여러 분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라는 인식을 불교 철학은 가진다. 이런 인간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문제 인식을 통해서 불교 철학의 핵심적인 원칙 중에 하나인 무아 (no self)의 개념이 만들어진다. 불교의 이런 철학함은 무아 (no self; inter-connected beings)의 개념과 같은 긍정적인 밈의 확산을 통해서 인간이 직면한 고통으로 가득 찬 실존적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장자는 호수에 서로 마주 향해 오고 있는, 충돌에 직면한 두 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배에 각각 사공이 있다면 두 배는 마주 오는 서로를 향해 서로 방향을 바꾸라고 싸우겠지만, 두 배 중에 한 배가 빈 배라면 맞은편 쪽에서 오고 있는 사공이 방향을 피함으로써 두 배 사이의 갈등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공이 없는 빈 배가 배의 충돌과 같은 갈등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비울 때 갈등에서 비롯된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이렇듯 장자의 빈 배의 비유는 무아 (no self)의 철학적, 윤리적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 준다. 인간이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동시에 독립적인 내 (self)가 존재한다는 밈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파괴적인 밈이 아닌, 공감의 밈을 소유한 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악인 파괴적인 힘에 의해 조종되는 좀비를 붉은 심장이 뛰는 인간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밈을 늘 새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나와 우리를 동시에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새로운 밈으로!!
파괴적이든 창조적이든 밈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인간을 좀비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만드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인생의 가치 중에 돈 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 역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료 인간과 우리 사회에 다양한 소수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밈이다. 필자에겐 인간의 역사는 밈과 밈의 소리 없는 전쟁 즉, '생각의 전쟁'으로 정의하고 싶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환경 속에서 인간이 지금까지 진화에 성공한 것처럼, 계속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과거의 가치관들과 전통, 그리고 개인의 신념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신념을 버리라고? 철 지난 정치적인, 문화적인, 종교적인 신념이 정의, 상식, 그리고 신의 뜻으로 위장해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이 신념들이 바로 진정한 '악' (evil)이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은 매번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창조된 혹은 변화된 세계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이나 신념을 갖도록 요구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라'란 예수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과거의 여러 밈에 대한 창조적인 해체의 과정을 통해서 사고된 새로운 밈들로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민주주의, 시민권, 양성 평등, 인종주의,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견해와 판단은 계속된 의심을 통해 업데이트되어야 한다. 의심과 숙고의 과정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이 타인과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한 밈인지, 아니면 우리를 여러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유의 밈인지를 매 순간 점검해야 한다.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밈의 본성과 영향력에 대해 끊임없이 긴장하며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이 소유한 밈의 본성에 대한 계속된 경계가 사라질 때 우리 인간은 동료 인간을 죽이는 좀비가 된다. 그리고 이때부턴 우리가 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밈이 우리를 소유 (possessed)한다. 밈이 우리 인간을 소유한 상태를 필자는 좀비라 부른다. 계속해서 생산되고 확산되는 밈에 대한 경계와 우리 자아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밈의 본성에 대한 파악은 살아있는 인간의 의무이자 운명이다. 그 밈이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들 수도 있고, 우리를 이 땅에서 번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살아 있는 인간 몸의 세포도 끊임없이 줄기 세포를 통해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고 죽은 세포를 밀어낸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밈도 같은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밈으로 인간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고기만 추구하는 폭력적인 좀비가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는, 공감할 수 있는, 붉은 심장이 뛰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밥으로가 아니라 밈으로 즉, 생각으로, 깨어 있는 의식으로 철학함을 통해 참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좀비가 아니라!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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