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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Mar 28. 2017

지배체제는 개인의 이기심을 먹고 산다?

이기적으로 살아갈 만큼 나의 자아는 정말 독립적인가?






수많은 갈등은 왜??     


인간의 세계인 지구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존재한다. 잘 사는 북반구의 나라들과 가난한 남반구의 부의 격차로 인한 갈등, 북반구 내에서도 경제적 문제로 인한 국가 간의 갈등,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두 축으로 유럽과 북미 그리고 중동지역 사이의 갈등, 1990년대 이전까지 냉전시대가 만들었던 이념적 갈등, 그리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인종적인, 종교적, 경제적인, 문화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존재한다. 우리의 시선을 2015 (& 2016)년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반도로 고정시키면 앞서 언급된 유형의 갈등의 예들이 쉽게 발견될 수 있다. 해고한 기업과 해고된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 정권을 되찾으려는 야당과, 뺏기지 않으려는 여당과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갑과 을 간의 갈등, 같은 을과 을 사이의 갈등, 브랜드가 있는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과 임대 아파트 주민들 사이의 갈등, 도시 개발에 관련한 철거 주체와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 사이의 갈등, 보수 단체와 진보 단체 사이의 이념적 갈등, 원자력 발전소, 송전탑, 그리고 해군기지와 같은 시설을 추진하려는 정부와 공기업, 그리고 이러한 정부와 공기업의 정책과 사업 집행에 저항하는 해당 지역 주민들 사이의 갈등 등과 같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갈등을 2015 (& 2016)년 대한민국은 목격한다. 돈이 만들어 내는 이념과 가치관들, 이와 관계된 정치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들, 신자유주의와 같은 경제적인 이념들,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층, 사회의 위계 구조와 지배적인 문화에 저항하는 다양한 소수자들 사이의 가치관의 차이가 위에 열거된 다양한 갈등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여러 갈등의 밑바탕에 이러한 갈등을 만들어 내는 다양한 이념과 신념이 있다. 그리고 이 이념과 신념의 주인은 한 개인의 자아다. 대략 이천 삼백 년 전에 중국의 고대 철학자인 장자의 ‘빈 배 (The Empty Boat)’의 비유는 현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유형의 갈등의 원인과 그 해법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빈 배        -장자-     


한 남자가 강을 건널 때, 이 남자가 타고 있는 배의 맞은편 쪽에서 또 다른 빈 배 한 대가 마주해 오고 있다면, 이 남자의 성격이 그리 좋지 않더라도, 이 빈 배를 향해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남자가 자신과 충돌할지도 모르는 배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본다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 사람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그 소리를 맞은편에 타고 있는 사람이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칠 것이다. 맞은편 배에 탄 사람이 이 소리마저 못 들으면, 결국 욕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그 배에 누군가가 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지만 만약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 성질 나쁜 사람은 소리를 지르지도, 화내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인생의 강을 건널 때, 당신이 당신 자신의 배를 비울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을 반대하지도,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강을 건널 때, 그 강을 건너는 자신의 배를 비울 수 있다면 위의 언급된 여러 갈등을 피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배를 타고 있는, 이 배를 운전하는 나는 누구인가? 만약 위에서 언급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의 원인이 자신의 자아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서 비롯되었다면 혹은 남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자아 (주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자아의 본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푸는 괜찮은 시작으로 보인다.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자아 (subject)란?    


Jacques Lacan (13 April 1901 – 9 September 1981)



일단, 후기 구조주의 (post-structuralism)는 프랑스 현대 철학으로 1960년대 이후의 철학을 가리킨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차이를 중시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한 철학자나 그 철학자의 이론으로 후기 구조주의 전체를 설명하거나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자아에 대한 설명은 주로 자크 라캉 (Jacques Lacan)과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의 이론으로만 한정하려고 한다. 라캉은 인간을 유기체적인 존재와 사회화를 거치면서 형성된 주체 (subject)로 나누어서 이해한다. 인간은 문화 속에 태어나면서 그 문화와 그 문화가 가지는 언어를 통해 사회화를 거친다. 인간 자신의 유기체적인 욕구를 이 언어를 통해서만, 그리고 자신의 문화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실제적인 자아인 유기체로서의 자아는 상실된다. 왜냐하면 언어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욕구를 표현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설상가상으로 언어가 인간의 유기체적인 소망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상실된 자아는 자신의 존재를 꿈, 농담과 같은 신체적 증상 또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질병과 장애의 형태로 표출한다고 라캉은 분석한다. 라캉에 따르면 현대 인간의 주체 (자아)는 유기체적인 자아와는 구별되는 문화와 그 언어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러면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금지의 ‘아버지’ 개념을 이용하는데, 이 금지의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숙제를 대신해주거나 함께 놀아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 사회화를 거치면서 직면하게 되는 많은 금지된 것들을 지정해 주는 하나의 위계 제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다양한 금지와 이와 관련된 위계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의 문화는 인간을 착한 (?) 주체로 만들어 버린다. 유기체적인 존재로서의 실제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언어를 배워나가면서 문화가 요구하는 위계 제도와 금지들에 복종하게 되고 이것은 동시에 그 문화가 요구하는 가치나 신념에 아이들이 복종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실제적인 자아는 상실되고 문화가 만들어낸 주체가 형성된다. 이 주체는 나아가서 다시 그 문화가 요구하는 가치와 신념을 재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문화에 의해 대량 생산된 주체는 자신을 남과는 다른 독립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자아로 자신을 인식하면서 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현대인들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Cogito;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 이래로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간은 본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로서 인식해왔다. 하지만 라캉과 데리다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자아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 자아는 본인의 모든 생각과 가치를 만들어 내는 근원으로 간주되었지만,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인 라캉과 데리다에게 있어 주체 (subject)는 그 주체가 속한 문화와 그 주체가 사용하는 언어가 만들어낸 가치와 신념들로 구성된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는 문화가 항상 ‘제국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문화는 모든 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가지는 이러한 권력을 통해서 그 문화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학습시키고, 동시에 문화가 가지는 규칙과 규범을 인간에게 강요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여러 욕구를 포기하게 되면서 부자연스럽게 문화 속에서 살게 된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데리다는 인간은 문화 속에 던져진, 실제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망명자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인 라캉과 데리다의 자아에 대한 분석은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현대 국가의 모든 제도들, 예를 들면,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를 포함한 모든 제도들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아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자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문화로부터 자유롭다고 느껴졌던 자아는 현대에 이르면서 자신이 존재하는 문화와 그 문화의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로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경쟁, 효율, 사유재산권, 선거제도로 특징지어지는 간접민주주의, 자유무역, 공교육 제도와 같은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가치와 신념으로 구성된 자아, 한편으로는 이에 저항하는 인간 중심적이고, 효율과 경쟁보다는 연대와 배려라는 가치,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장려하는 직접 민주주의, 약소국의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는 보호무역,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을 주입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대안교육과 같은 가치들로 구성된 자아, 둘 다 21세기 한국이라는 문화가 만들어 낸 결이 다른 산물일 뿐이다. 동시에 이 두 가지 다른 버전의 자아가 잃어버린 유기체적인 자아도 서로 다른 이의 자아와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문화 구성 요소학 (memetics)으로 본 자아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진화생물학인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에 의해 우연히 시작된 문화 구성 요소학의 자아에 대한 설명도 위의 기술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주체에 관한 주장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문화 구성 요소학 (memetics)은 밈(meme)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밈이란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음식을 먹기 전에 끓여야 한다는 생각에서부터 기하학과 같은 복잡한 밈을 포함한다. 이러한 문화적인 생각에 대한 연구는 생물의 유전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전학은 생명체가 어떻게 유전자 자신의 복제를 통해서 발달하고 성장하는지를 연구한다. 문화적인 생각이나 정보를 연구하는 문화 구성 요소학은 정신이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문화 구성 요소학은 유전자가 스스로 복제함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처럼 정보나 생각도 복제를 통해 인간의 정신이 성장하고 발달한다고 이해한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개념은 문화 구성 요소학에서 의심을 받게 된다. 문화 구성 요소학에서의 자아는 그저 다양한 생각 (ideas) 즉, 다양한 밈으로 구성된 이러한 밈들의 복합체로 정의된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결정하는 요소로서 여러 유형의 밈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사람들의 정신과 언어에 의해 확산된다. 결국에는 다양한 종류의 밈은 사람들의 정신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를 결정한다. 유전자들이 자신들을 더 잘 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의 생명체에 모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인 정보나 생각인 밈들도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모이게 된다.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인간의 유전자가 아니라, 유전자의 생존 도구로서의 인간과 같은 유사한 역전현상이 문화 구성 요소학에서도 일어난다.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밈 (생각과 신념)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는 인간을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자신의 숙주인 생명체 내에서 자신들의 복제를 더 쉽게 만들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처럼 문화적인 생각이나 정보들인 밈도 자신의 복제를 더 쉽게 만들기 위해 자아 안으로 모여든다고 문화 구성 요소학은 주장한다. 이렇게 모여든 다양한 문화적인 생각이나 정보들의 복합체가 자아로 간주된다.      


참고로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이론들은 다양한 세계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고려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들 중에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여러 입자, 유전자, 문화적인 구성 요소인 다양한 형태의 밈은 포함되지만, 자아는 이 세계의 핵심적인 구성요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자아는 세상을 설명할 때에 어떤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단순한 요소들이 하나의 복잡한 전체 속에서 함께 모일 때 생겨나는 하나의 만들어진 구성물로 간주된다. 위에서 설명된 문화 구성 요소학의 자아에 대한 설명을 고려하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아에 대해 가지는 현대인들의 환상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인간은 문화가 대량 생산한 밈들로 가득 찬 자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자역학 (Quantum mechanics)으로 본 자아란?


Double slit experiment

자아를 설명하는데 갑자기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이 동원되는 현상은 참 뜬금없어 보인다. 양자역학은 20세기 초기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함께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운동 법칙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리킨다. 물론 상대성 이론은 우주에 존재하는 행성과 별, 은하계와 같은 거대한 물질의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인 반면에, 양자 역학은 물질의 최소 단위로 알려졌던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입자 즉, 양성자, 중성자, 전자와 같은 입자들의 운동 원리를 설명해주는 이론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닐 보어, 맥스 플랑크, 에르빈 슈뢰딩거 등을 포함한 과학자들에 의해서 양자역학은 물리 학내에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원자 내부의 양자들 중에 전자의 운동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전자는 실험자의 관측 여부에 따라 입자처럼 혹은 파동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험자가 관측할 때는 입자처럼 이동하고, 반면에 실험자가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하지 않을 때는 물과 같이 파동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이중 슬릿 실험 (Double slit experiment)을 통해서 밝혀진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전자의 특성은 매우 흥미로운 함의를 인간의 자아와 관련해서 가진다. 왜냐하면, 실험자가 전자의 이동을 관측할 때, 전자의 파동은 붕괴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이 관측되는 전자와 상호작용한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전자와 이 전자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의식의 상호 작용은 전자가 하나의 특정한 특성을 갖고, 나머지 다른 특성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전자는 나머지 다른 여러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전자를 관측할 때, 오로지 한 특성만 전자가 갖게 된다는 사실은 동시에 전자의 행동이 관찰될 때, 전자가 나머지 또 다른 특성을 가질 수 있는 다른 여러 세계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 있다. 관찰자인 우리 인간도 또한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관측될 때, 전자와 같이 다른 특성이나 미래를 가진 우리가 존재하는 여러 세계 (우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각각의 세계 (우주) 속에 조금씩 다른 여러 나를 (mes)를 가지게 된다. 좀 더 쉽게 이중 슬릿 실험의 의미를 설명하면 양자 즉,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서 주사위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서 주사위 게임의 한 선수가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 숫자 중에 한 숫자만 나오지만, 양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한 선수가 주사위를 던지는 순간 주사위의 여섯 가지 숫자가 동시에 나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자는 여섯 가지 숫자가 분리시키는 여섯 가지 버전의 미래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원자 이하의 양자의 세계에서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여섯 개의 다른 차원이 생겨나면서 각기 다른 차원마다 전자의 다른 미래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양자 물리학의 관점에서도 남과는 다른 독립된 자아의 지위는 그리 굳건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여러 우주 속에 존재하는 많은 자아 (selfs) 중에 어떤 자아를 진정한 나로 결정하느냐의 과제는 그리 간단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 역학의 관점에서도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립된 자아를 탐구하는 임무는 그럴 만한 의미도 없어 보일 뿐 만 아니라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불교철학의 관점으로 본 자아 (self) & 무아 (no self) 이론      


어찌 보면 자아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탐구하는 사고 행위 혹은 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는 시도 자체가 자아에 대한 지나친 강조나 관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교철학에서는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할 때에 고통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자아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않을수록 인생의 고통을 덜어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진다. 티베트의 한 문서에서도 이렇게 쓰여 있다: ‘인간의 자아를 영원하고, 타인과 다른 독립적인 존재로 믿는다면 인간은 자아에 집착하게 되고, 이러한 집착은 번뇌 (근심, 두려움, 욕망 등)를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는 결국에는 부정적인 카르마를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발생한 카르마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Milinda’s Panha; Questions of Milinda)

자아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갈등과 이로 인해 고통이 일어난다는 불교의 현실적인 분석과 더불어 독립된 자아에 대한 개념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불교의 한 문서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 문서는 ‘밀린다 왕의 질문 (Milinda’s Panha; Questions of Milinda)’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밀린다 왕의 질문이란 고대 불교 문서에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로 알려진 불교의 승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먼저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란 승려에게 질문한다. 나가세나에게 밀린다 왕은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만, 나가세나의 답변은 흥미롭다. ‘저는 사람들에게 나가세나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응해서 나가세나란 승려는 밀린다 왕에게 왕의 마차에 대해 질문하는데, 나가세나의 계속된 질문에 밀린다 왕은 결론적으로 마차의 모든 부품 즉, 바퀴, 바퀴 축, 마차의 기둥 등의 모든 부품을 적절하게 합친 것이 마차입니까?를 묻는 나가세나의 질문에 밀린다 왕은 ‘아니오!’라고 답한다. 승려 나가세 나와 밀린다 왕 모두에게 위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대화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인식, 의식, 감정, 정신, 몸)의 총합이 나가세나라는 승려의 이름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나가세나의 존재 자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밀린다 왕의 마차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품들의 총합은 역시 마차라는 이름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다.' ‘나가세나와 마차’라는 이름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이 둘의 자아나 본성을 이 두 이름이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란 승려의 대화가 강조하고 있다. 이 대화의 진정한 목적은 ‘이름’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아가 다른 사람의 자아와 독립되어 존재한다는 부정확한 인식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불교의 무아 (No self) 이론이 만들어진다. 인간이 독립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인간이 서로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강조가 만들어내는 갈등과 이로 인한 고통을 없애려고 불교철학은 시도했다.      







고통받는 사람의 눈물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후기 구조주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문화와 그 언어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된 자아, 문화 구성 요소학에서 주장하는 문화적인 생각인 밈의 복합체로서의 자아, 그리고 양자 역학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많은 여러 우주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 (mes)에 대한 설명을 고려하면, 어쩌면 바로 위에서 언급된 불교 철학의 무아 (no self) 이론은 실용적인 측면과 이론적인 측면 모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고 외치는 무아 이론은 인간 사회의 여러 갈등을 바라보는 실용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갈등의 악화를 막는 괜찮은 생각 백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된 설명을 폭넓게 적용하면,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신념은 이론적 근거가 약한 환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동시에 독립적인 자아를 강조하거나 이를 설명하려는 시도 또한 의미 없는, 불가능한 시도일 수 있다고 결론 내려도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의미 없는, 어쩌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독립적이고 분리된 ‘나와 나의 이익’을 최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과 그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이런 시도와 동반된 많은 갈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일으키는 파장은 우리의 인식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여러 파장은 우리 감각적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까지 미쳐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느끼는 모든 감정들의 원인 혹은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감각과 이를 기반한 인식능력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수많은 사건과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와 아픔들의 진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의 모든 경험은 수많은 동료 인간이 만들어낸 행동이 일으킨 파장의 일부일만큼 우리 현대 인간은 촘촘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 사이의 이러한 연결성은 우리 뇌의 수백조가 넘는 신경세포간의 연결만큼이나 복잡하다. 그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그녀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호 유가족의 슬픔이, 백남기 농민 유가족의 아픔과 분노를 우리가 함께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복잡한 연결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행복하면, 슬프면, 그리고 분노하면, 나도 행복하고, 슬프고, 그리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지역에서 살고 있는 한 사람의 눈물이 한 여름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폭염을 잠깐 동안이나마 식혀주는 소나기가 될 수 있는, 이렇게 신비스럽게 연결된 세계 속에 인간이 함께 살고 있다는 인식의 확산이 매우 절실해 보인다. 인간이 동료 인간과 독립되고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결된 존재라는 인식의 확산이 절실하다. 다양한 관계에서 비롯된 수많은 갈등과 이로 인한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다시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과 함께 '다양한 갈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갈등의 최종 승리자인 나만 진정으로 타인과는 분리된 채 홀로 행복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의 복잡한 고리를 푸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는  너무나 상투적인 깨달음을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참고로 이 글은 2015년에 필자가 쓴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olkinghorne, J. (2002), ‘Quantum The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Wacks. R (2006), ‘Philosoph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Westerhoff, J. (2011), ‘Realit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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