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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폭탄과 유도탄들 Jun 28. 2023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

미국의 외교와 외교정책 #5

해리 S. 트루먼, 그는 재임 중 세상을 떠난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곧바로 대통령에 취임해 미국 행정부를 이끌었다. 루즈벨트의 지명을 받아 부통령이 된 지 고작 3개월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인데 그는 이를 두고 달과 별, 그리고 모든 행성이 자신에게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권력과 거리가 먼 평범한 정치인에 불과했던 그는 취임과 동시에 정말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2차 대전이 한창이었고,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의 패색이 짙은 상황 속에서 전후 국제질서를 수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인들, 심지어 트루먼이 소속된 민주당과 트루먼 본인조차도 트루먼 행정부가 잘 굴러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는 훌륭히 미국과 국제사회를 이끌었다.


#1. 트루먼의 전임자, 루즈벨트

루즈벨트는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으로, 2차 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것에 더해 미국이 전후 국제질서의 리더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유능한 지도자였다. 루즈벨트는 1942년 이후 연합국이 추축국과의 주요 전투에서 연일 승리를 거두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해 전후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전후 국제질서를 이끌 네 개의 강대국으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과 중화민국을 꼽았다. 1943년 11월, 루즈벨트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과 함께 회담을 열고 카이로 선언을 채택했다. (카이로 선언은 일본의 태평양 식민지를 전부 몰수하고 중국에게 일본이 빼앗은 영토를 전부 돌려주며 한국을 가급적 빨리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카이로에서의 회담 직후 루즈벨트는 이란의 테헤란에서 처칠과 함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을 만났다. 이 회담에서 그들은 소련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한편 두 번의 회담 이후 루즈벨트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장제스와 한 테이블에 앉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루즈벨트는 둘 사이를 자주 오가야 했고,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전후 국제사회의 리더 자리를 놓고 소련과 담판을 짓기 위해 열었던 얄타에서의 회담을 끝으로 루즈벨트는 일어나지 못했다. 1945년 4월의 일이었다. 얄타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그의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후덕한 인상은 사라지고 없고 초점 잃은 눈과 앙상한 얼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의 사인은 뇌출혈이었는데, 혈압이 300을 넘어 400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관리하지 않은 탓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 트루먼 행정부와 제2차 세계 대전

트루먼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으로 향했다. 영국의 클레맨트 애틀리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중국의 장제스까지 포함해 네 명의 정상은 포츠담 선언에 합의했다. 포츠담 선언에는 일본을 향해 즉각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을 몰아내고 군국주의를 완전히 청산해 연합국의 관리를 받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카이로 선언을 비롯한 4강의 주요 회담에서 나온 내용들을 모두 이행할 것임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트루먼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할 핵무기의 사용, 즉 원자폭탄의 투하를 명령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열도의 완전한 파괴를 염두에 둔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작전은 8월 15일 쇼와 덴노가 포츠담 선언의 수용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실행되지 않았다.


#3. 소련의 급부상, 그리고 철의 장막(Iron Curtain)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세계 대전이 끝났다. 독재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뭉친 국가들의 연합이 더 강력하다고 외쳤던 트루먼은 어렵게 되찾은 평화를 유지하고 전쟁으로 인해 무참히 짓밟힌 인권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단결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제연합(UN)의 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트루먼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주장을 굽혀야 했다. 카이로 회담부터 포츠담 회담까지, 모든 회담을 주도하며 미국은 스스로 전후 국제질서의 확고한 리더로 자리매김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발톱을 숨기고 있던 소련이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소련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신생국이 많아 공산주의를 퍼뜨릴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동유럽동아시아에 서서히 침투했다. 소련의 팽창정책과 공산화정책은 서방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처칠은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통해 소련의 주도로 유럽이 공산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연설은 트루먼의 모교에서 트루먼을 바로 옆에 앉혀두고 이루어졌다.)


#4.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과 마셜 플랜(Marshall Plan)

1947년 3월, 트루먼 행정부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트루먼은 양원의 의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연설을 통해 미국 정부가 그리스와 터키(오늘날의 튀르키예)에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하는 이유를 피력했다. 여기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전체주의의 새로운 씨앗으로 규정하고, 이 씨앗이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빈곤을 해소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을 시작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민주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노력하는 국가에 한해 경제 및 군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미국의 외교 방침이었던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폐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먼로 독트린은 미국의 고립주의를 대표하는 선언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상호 불가침을 규정하고 있다. 미국이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테니, 유럽도 미국을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국제정치의 양상이 다변화함에 따라 먼로 독트린의 색깔이 옅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떤 행정부도 이를 명시적으로 폐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는 먼로 독트린에 공식적인 사망선고를 내리며 승부수를 띄웠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직후 트루먼 행정부는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의 주도 아래 유럽 부흥 계획(ERP)을 발표했다. 이것이 마셜 플랜이다. 서유럽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다방면의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서유럽의 요청이 따로 없어도 지원한다는 것과 무상원조, 즉 갚을 필요가 없는 원조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련의 영향 아래 있는 동유럽을 노골적으로 배제하여 공산주의를 견제하고, 자유주의를 선택하면 미국으로부터 무상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여 자유주의 진영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미국은 100억 달러를 훨씬 웃도는 예산을 풀어 서유럽을 지원했고 그 효과는 굉장했다. 자유주의 진영의 세는 매우 커졌고 미국에 대한 진영의 충성도는 하늘을 찔렀다. 미국의 재정 부담이 막대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냉전이 본격화하기 전에 진영의 결속력을 다짐으로써 소련을 위시로 한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한편 소련도 이에 질세라 소련판 마셜 플랜몰로토프 플랜(Molotov Plan)을 제시했다. 외무장관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주도로 수립된 이 계획은 지역만 동유럽으로 바뀌었을 뿐, 마셜 플랜과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으로 발전해 공산주의 진영의 결속과 바르샤바조약기구(WTO)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력은 미국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고 공산주의 체제라는 특성상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와 국제무역의 발달을 추구할 수 없었기에 몰로토프 플랜은 소련과 위성국 간의 상호 협동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골자로 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이 주로 지원을 제공하기는 하나 지원을 받는 국가는 궁극적으로 자급자족을 향해 나아가야 했고, 원조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공하는 모습도 보여주어야 했다. 이는 결국 공산주의 진영이 자유주의 진영만큼 끈끈하게 뭉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5.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설립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전후 독일의 동부 지역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연합국의 구상은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이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분할해 공동으로 관리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민주적인 총선거를 통해 새로운 독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생각이 달랐다. 독일을 공산주의를 서유럽까지 퍼뜨리는 교두보로 삼으려 했고 서방이 제시하는 총선거 방안에 계속해서 반대하며 독일 동부에서 독자적인 총선거를 단행했다. 그러자 미국은 크게 당황했고, 소련의 영향력 밖에 있는 세 개 지역이라도 한데 묶어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소련은 미국의 움직임에 대항해 베를린을 봉쇄하고 물자의 교류를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베를린 봉쇄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항공 수송이라는 묘수 앞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해제되었으나 독일의 분단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 독일의 동부 지역에는 흔히 동독이라고 일컫는 독일 민주 공화국이, 서부 지역에는 흔히 서독이라고 일컫는 독일연방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을 통해 소련의 기를 꺾었다고 판단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새로운 형태의 압박을 가할 필요성이 있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이던 1949년 4월, 서유럽 국가들과 북대서양조약(NAT)을 체결했다. 조약의 핵심은 미국과 서유럽이 군사적인 연대를 표방한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은 미국 또는 서유럽 국가에 대한 공격을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자위권을 발동해 무력을 행사하여 공격을 격퇴할 것이라 천명했다. 자유주의 진영의 집단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을 표방한 것이다. NAT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제기구가 바로 NATO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NATO나 소련이나 처음부터 서로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며 소련이 NATO에 가입을 신청하자 NATO 회원국들이 회의를 열어 소련의 가입을 허락할 것인지 치열하게 토론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1950년, 미국이 군비를 증강하지 않으면 서유럽의 동맹국들이 미국과 소련의 대치 상황에서 소련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분석하며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강도 높은 봉쇄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보고서(NSC-68)가 공개되고 트루먼 행정부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NATO를 소련을 압박하는 것을 넘어 위협하는 도구로 쓰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NATO와 소련의 미묘한 대치는 1955년까지 계속되다가 NATO가 서독의 가입을 허락한 것을 계기로 소련이 공산주의 진영의 NATO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인 강대강 대치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6.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의 실책

트루먼 행정부는 자유주의 진영을 두텁게 하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NAT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시간과 돈은 대부분 서유럽에 투자되었고 동아시아에 대한 지원에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한 점이나 일본을 세계대전의 원흉에서 아시아의 파트너로 탈바꿈시킨 점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지원에 소홀했다.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1948년 5월, 38도선 이남 지역의 한반도에서 UN의 관리 및 감독 아래 총선거가 시행되어 동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38도선 이북 지역의 한반도에서는 동년 9월 9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게다가 루즈벨트와 트루먼이 전후 국제질서를 미국과 함께 주도할 4강 중 한 곳으로 평가했던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거처를 옮기는 국부천대가 일어나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거대한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등장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북부가 공산화하자 전문가들은 트루먼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이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과 중국의 팽창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가상의 방어선을 설정해 발표하는데 이를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의 이름을 따 애치슨 라인이라고 한다. 소련과 중국이 애치슨 라인을 넘어서 팽창하는 경우 미국이 무력을 동원해 저지할 수 있다고 천명하면서 애치슨 라인의 바깥쪽에 있는 국가들의 경우 미국이 그들의 안보까지 책임지는 것은 너무 과도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며 스스로 저항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문했다. 이때 한국이 애치슨 라인의 바깥쪽에 자리했다.


한국을 애치슨 라인의 바깥쪽에 둔 이유와 관련하여 많은 가설이 있지만 북한의 남침 가능성보다 한국의 북침 가능성을 더 높게 본 트루먼 행정부에서 이승만 정부에 충격요법을 가한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을 향해 계속해서 전차와 같은 무기를 지원해줄 것과 군사훈련을 위한 교관들과 고문단을 파견해줄 것, 그리고 생필품에 더해 외화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북진통일을 구호로 내세우기도 했고 38도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을 반복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현상이 변하는 것을 꺼렸다. 유럽에서의 대치만 하더라도 충분히 미국의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9년에는 주한미군도 철수시켰다. 이것을 첫 번째 충격요법으로 본다면 애치슨 라인은 두 번째 충격요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산주의 진영의 남침에 대한 야욕을 저평가한 것으로 북한에 남침을 통한 한반도의 적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다.


#7. 트루먼 행정부와 6.25 전쟁

주한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이라는 충격요법으로 이승만 정부를 압박한 미국이었지만 한국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가 공산화한다면 미국에 큰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트루먼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면적인 철수를 희망한 군부의 요청을 거부하고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군기교육을 제공할 것 등을 지시했다. 또 애치슨 라인을 선언한 것과 한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한반도의 공산화는 미국에 큰 부담이기 때문에 트루먼 행정부에서 한국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이 개입하는 속도에 차이를 두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애치슨 라인의 안쪽에 위치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군사적 충돌에는 즉시 개입하고 바깥쪽에 위치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군사적 충돌에는 당사국의 대응과 국제사회의 반응을 지켜본 뒤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는 이것이 한국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간과했고, 북한이 남침에 대한 야욕을 불태울 때 발표하는 악수를 두었다. 아시아의 정세에 어두웠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아주 기민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 유럽에서의 2차 대전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만주를 침공한 것이 아시아에서의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것이 아시아를 무대로 한 진영 간의 격돌 또는 3차 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주UN 미국 대사로 하여금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고 철군하지 않을 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결의안을 안전보장이사회 제출하게 했다. 이 결의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에도 대만, 즉 중화민국이 여전히 상임이사국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반대하던 소련이 이사회에 불참한 덕분에 가결되었고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더글러스 맥아더로 하여금 6.25 전쟁의 전선을 시찰하고 미군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한편 7월 7일에는 미국의 주도 아래 UN 설립 이래 최초로 다국적군을 구성해 한반도에 파병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소련은 불참했다.) 맥아더가 UN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6.25 전쟁은 UN군이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사례로 남았다.


한편 일각에서는 트루먼 행정부가 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진을 주장하던 맥아더를 해임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트루먼 행정부가 현상의 변화를 꺼렸던 것과 동아시아의 정세에 어두웠던 것은 사실이며 핵무기와 같이 승기를 단숨에 가져올 수 있는 무기를 투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교착 상태에 놓이자 빠르게 협상에 돌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가 의도적으로 한국의 통일을 막았다고 볼 수는 없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단숨에 뒤집은 공이 있지만 여러 실책으로 인한 과도 많다.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뒤집혀 UN군과 국군은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미국의 핵무기를 사용할 권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수십 기의 핵무기를 동원해 중국의 남진을 저지하고 북한을 지도 위에서 지우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언론에 자신의 구상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기도 했다. 트루먼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맥아더는 공화당 소속의 정치인에게 트루먼을 비방하는 전보를 보내 의회에서 발표하게 했다. 치명적인 실책과 무리한 요구, 항명으로 인해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따라서 맥아더의 해임과 관련한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8. 마무리하며

트루먼은 재임 기간에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인권을 강조한 탓에 흑인의 민권 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흑인의 권리를 신장하는 여러 정책을 펼쳤고 이는 민주당원의 등마저 돌리게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트루먼은 옳은 일을 한 것이지만 당대의 관점에서 트루먼은 괴짜에 불과했다. 트루먼의 인기가 떨어질수록 공화당의 공세도 심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재선에 성공했으나 임기의 대부분을 6.25 전쟁을 수습하는 데 써야 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당시에는 이미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기에 후임자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헀다. 게다가 전임자와 후임자가 모두 전쟁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루즈벨트와 아이젠하워였던 탓에 평범한 정치인이자 고졸이었던 트루먼은 시도때도 없이 비교당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트루먼에 대한 평가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 중심의 전후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루즈벨트의 공백을 성공적으로 메웠다. 냉철하고 적절한 판단이 미국을 자유주의 진영, 나아가 국제사회의 리더로 자리매김하도록 도왔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NATO의 창설과 6.25 전쟁에의 개입은 미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중요했던 순간들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트루먼 행정부는 냉전의 초창기에 강한 자유주의 진영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 유능한 행정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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