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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널하우스 Oct 02. 2024

뜨거운 사람, 차가운 사람

방해, 구원 그리고 항복



룩 백(look back), 그에 대한 방해


차라리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차가운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싶었다. 열정은 사람을 뜨겁게 달구며 무언가를 '창조'한다. 타오르는 열기만으로도 지켜보는 사람들은 충분히 고무된다. 나는 이 "뜨거운 창조자"들을 질투하는 "차가운 해석자"였다.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의 <룩 백>에 대해 다루기도 전에 지금 첫 단락은 영화의 포스터만 보고 적고 있다. 선제적으로 시작을 제압해 두었기 때문에 본문도 영향은 불가피할 것임을 안다. 아마 마련된 인식의 틀 안에서 작품을 감상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이야기에 앞서 이러한 문제의 불가항력에 대해서 먼저 풀어둔다. 


인간은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지식과 경험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새로운 인식을 포섭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보편성을 떠나서는 어떠한 이성과도 결합하여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올 수 없다. '아는 것을 통해서' 알 수밖에 없다는 고루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이성이 '유아론적 구조'를 갖출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나로서는 기결된 인식의 불가피한 당위성만을 고집하며 안심하고 싶지는 않다. 


앞선 '이성의 유아론적 구조'의 논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서 빌려온 것인데, 그는 이렇게도 말하였다. "삶은, 물질과의 투쟁 속에서 그의 일상적 초월이 늘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사건을 만날 때, 그때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아적인 이성의 왕복 운동을 영화는 어떤 식으로 방해할 것인가. 그 점이 나는 궁금했다.



비 내리는 여름, 구원


영화에서 후지노의 열정은 두 번의 좌절을 겪는다. 한 번은 쿄모토의 그림으로, 또 한 번은 쿄모토의 죽음으로. 첫 번째 좌절은 후지노의 열정을 더욱 타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차갑게 단념할 수 있는 근거도 되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후지노는 만화를 좋아하는 소녀다. 그녀의 만화를 친구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의 뜨거운 열정은 학보(교내잡지)에서 쿄모토의 그림과 비교될 때마다 조금씩 식어갔다. 


쿄모토가 그리는 '배경' 앞에서 후지노의 만화는 광활한 우주의 처량한 한 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지노는 저 얼굴도 모르는 '쿄모토'라는 녀석을 이겨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만다. "이성은 말을 건넬 또 다른 이성을 전혀 찾지 않는다. 의식의 지향성은 자아를 사물들과 구별하게 해 주지만 유아론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앞서 제시한 레비나스를 다시 소환해 본다. 


쿄모토의 그림에 의한 좌절은 '말을 건넬 또 다른 이성'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질투와 열정은 순전히 자신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탄생한 열망이 쿄모토의 그림에 부딪혀 다시 되돌아오는 데에 어떠한 방해는 없었다. 상대를 넘어서기 위해 종일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만 펜을 놓고 포기하는 것도 망설임은 불필요했다. 그러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날, 직접 마주한 쿄모토의 얼굴은 집 복도를 가득 메운 노트들처럼 정직했다. 


노력을 정량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성평가할 수 있는가. 그것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쿄모토의 집을 가득 메운 습작 노트들은 후지노를 정량과 정성 그 어디쯤에 서도록 요청했을 것만 같다. 당신의 팬입니다. '또 다른 이성'이 말을 걸었다. 쿄모토의 고백은 후지노에게 만화를 다시 그려야 한다는 요청으로 받아들여졌다. 응답의 가치는 요청을 유효하게 만들 때 탄생한다. 후지노의 응답이 멈추지 않는 동안 쿄모토의 요청도 유효했을 터였다.

  


눈 내리는 겨울, 항복


눈이 내리는 겨울밤, 후지노는 둘을 이어준 4컷 만화의 '나와', '나오지 마'라는 외침 사이에서 한참 동안 머뭇거린다. 쿄모토의 죽음은 또다시 후지노를 좌절시켰다. 쿄모토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쿄모토를 향해 던져진 이성도, 열정도, 마음도 같은 지점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뒤 돌아보면, 쿄모토와 그렸던 배경들이 펼쳐졌다. 은둔형 외톨이인 쿄모토는 학교가 괴로웠으나 후지노의 만화는 좋아했다. 후지노 쿄라는 콤비를 결성한 이후 자신의 특기인 배경을 전담해서 그렸고, 그래서인지 손을 잡고 앞서가는 후지노의 뒤에서 단 하나의 배경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쿄모토의 죽음 이후 다시 찾은 그녀의 방은 청춘을 가득 메운 배경들로 가득했다. 부재에 흔들리는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을 탐색했을 것이다. 끝내 다다른 결론은 '서로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후지노는 또다시 쿄모토가 그려놓은 배경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만화를 그려서 쿄모토는 죽었어' 귀찮고 차라리 읽고 말지 직접 그릴게 못 되는 하찮은 만화 때문에 쿄모토는 죽었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쿄모토는 살았을 것이다. 쿄모토의 부재에 후지노의 존재는 서있을 자리를 잃는다. 후지노는 '유아'처럼 울부짖는다. 


울고 있는 후지노의 앞에 또 다른 4컷 만화가 날아든다. 제목은 등 뒤를 봐. 룩 백. 만화를 볼 때면 나는 비스바와 쉼보르스카의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동화는 결코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는 법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틈만 나면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든다.' 후지노의 최근 연재작인 샤크킥 11권은 '샤크님께서 나설 차례다!!'는 장면을 끝으로 휴재 중이다. '샤크'는 물론 주인공일 것이고, 강대한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일 것이다. 쾌도난마, 어려운 문제를 단칼에 해결해 버릴 것만 같은 샤크의 발차기는 후지노를 난처하게 만든다. 


영화는 쿄모토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세계를 잠시동안 보여준다. 쿄모토를 죽이려는 남자를 후지노가 화려한 발차기로 날려버린다. 마치 샤크킥처럼. 후지노는 쿄모토의 집을 나서며 하얀 눈 밭을 가로질러 작업실로 걸어간다. 쿄묘토의 집에서 가져온 4컷 만화를 창문에 붙이고 자리에 앉는다. 차라리 '관성'처럼 보이는 묵묵한 그녀의 등은 어떠한 '중력'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를 무기력이라 단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이제 쉽게 단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수만 번을 되돌아 본들 쿄모토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단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쿄모토는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리는 걸까. 후지노는 다시 펜을 들고 샤크킥 12권을 그려 나간다. 이제 샤크님이 나설 차례다. 그녀의 등 뒤에서 소년 만화의 눈부신 희망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후지노는 그저 완전히 항복하지 않았을 뿐이다. 



겨울이 되어서야 꺼낼 수밖에


그럼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쿄모토는 다시 묻는다. 쿄모토의 요청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요청은 아직도 유효했다. 요청의 발신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쿄모토는 저 하얀 눈밭을 걸어와 후지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후지노는 대답을 고를 것이고, 그 대답은 태블릿 위에 만화를 그리는 것으로 밖에 대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등 뒤를 돌아봐도 왜 만화를 그리는 것인지 그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것일까. 어쩌면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등 뒤에 그려진 이미 풍성한 대답들 때문에 차마 고를 수 없었던 것일까. 질문을 품는 한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세상은 방해할 것이다. 오래 품어온 질문은 그 자체로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구원에 가까워 질지도 모른다. 고 적었다가 다시 한참을 생각해 본다.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 혹은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간은 성숙할 수 있다면, 죽음은 겪고 싶지 않은 성숙일 것이다성숙이 반드시 구원과 결부 지어지는 것은 아니라 해도 후지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13권, 14권 샤크킥은 완결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쿄모토가 말을 건넬 수 있도록. 그 말을 후지노 자신이 들을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유아적인 나의 이성은 아직도 뜨거운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어떻게 하면 숯처럼 오래도록 그 온기를 품어낼 수 있을까. 얼어붙은 이성마저 녹이는 그 뜨거움이 나는 부럽다. 한창이던 여름날의 이야기들을, 겨울이 되어서야 꺼낼 수밖에 없겠다. 나는 따뜻해지기 위해 더 차가워질 수밖에 없겠다. 마지막 두문장도 사실을 직고 하자면, 미리 써둔 것이다. 나는 결국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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