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이라는 노래의 첫 소절이다. 시적인 가사의 서정성이 돋보인다. 구태의연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가을은 서정적인 계절이다. 그래서 추상적이기보다는 객관적인 계절이다. 저 말도 안 되는 노랫말이 헛소리로 치부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물하지 않는가.가을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턱을 괴고 열린 창문에 액자처럼 담기는 별과 달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사랑' 말고는 달리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난 보고 싶단 말이 사랑한단 말보다 더 진짜 같아. 사랑은 추상적이고 어려운데 보고 싶다는 참 명확해"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여기 사랑 생각에 보태면 좋을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이언희 감독의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가을밤에 본 이 영화를 나는 개인의 서정성이 타인의 객관성에 의해 승인되는 과정으로 읽었다. 마치 어느 한 개인의 몽상적인 가사가 널리 가을을 낭만으로 물들이는 노랫말이 되어가는 것처럼.
개인의 서정성에서부터
대학교 신입생 엠티(Membership Training), 불문학을 가르치는 올리비에가 홍수와 마주 앉는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에서 유명한 첫 문장을 읊조리고 홍수는 이를 통역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확실히 모르겠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이방인'을 다루는 만큼, 이 개념을 가능한 확장 시켜 놓지 않는다면 나는 쓸 이야기가 줄어들 것이다. 우선 이방인이란 '개인의 서정성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으로 정의해 둔다. <이방인>의 화자 뫼르소는 자신의 서정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무자비한 냉혈한으로 부풀려진 가여운 인간이 아니었던가. 누구나 쉽게 열어보이지 않는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 하나쯤은 가슴속에 묻어 두고 살 것이다. 물론 필자의 무리한 억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러한 해석에 기대어 감히 선언해 본다.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라고. '동등한 입장'에 서보려 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 있을 테니까.
홍수는 게이(gay)다.재희는 젊음을 만끽하는 자유로운 여학생이다. 영화의 대사를 그대로 옮겨 보자면 '미친년과 게이가 만났다. 바야흐로 애니멀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반쯤은 취해서 춤추듯 사는 게 젊음과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넘쳐나는 정념, 그를 받쳐주는 체력. 다만 부족한 건 고통에 대한 맷집 정도일 터, 이는 훈련하면 늘지 않던가. 알코올-클럽과 함께 한 몇 년.재희는 마마보이-플레이보이-집착보이까지 브레이크 없는 연애를, 홍수는 사랑하는 남자 수호를 만나 뜨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그들은 배가 난파되고 불이나도 주춤할 뿐 물러서지 않는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하듯이 새처럼 저 하늘로 훌훌 달아나 버리지 않고, 오히려 뱀처럼 찰싹 자신의 삶에 섞이고 뒤엉킨다. 낙태수술을 받은 후에도, 수호와 이별한 후에도 지상에 바짝 붙어 기꺼이 오물도 뒤집어쓴다.
홍수는 엄마에게조차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재희는 사람들에게 경박한 쾌락주의자로 일축된다. 그들은 외부에서 규정한 한계에 처절하게 부서진다. '자국'과 '타국'을 가르는 국경에서 억압되고 마는 정서들. 나와 너를 가르는 경계 사이에서 재희와 홍수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독립되고 격리된 섬이자 이방인이 아닌가. '동등한 입장'을 채택해 얻은 동병상련의 교훈과 함께 나는 여기서 부조리한 구조적 문제 또한 마주하게 된다. 이들의 아픔과 극복의 이야기를 그저 나답게 살기, '흔들리는 자아 속에서 정체성 찾기'라는 단순한 성장 스토리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개인의 서정성이 억압되고 파괴되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교환되는 '정체성의 한계'들을 나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타인의 객관성까지
세계는 단순히 홍수를 게이, 재희를 미친년이라는 단어로 구분했다.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프레히트가 말하듯 '주관성의 세계'는 타인에 의해 확인되어야만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과학적 사실까지 포함하여 모든 객관적 주장에는 주관적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주관성의 세계에서 결국 진실은 세상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의해 확인되어야만 하는 정당성에 불과할 뿐이다. 주관적 한계는 정체성의 한계이다.개인의 그럴듯한 서사, 그럴만한 서사, 그랬어야만 하는 서사는 타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구조적 부조리를 품는 주관성의 세계에서 영화는 후반부까지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객관성을 부여받지 못했던 재희와 홍수를 그려낸다.
난해하고 불가해하고 복잡한타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공감하기란 어렵다. 어쩌면 공감이라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고작 이 뼈아픈 진실에 대해서만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재희를 폭행한 남자친구 지석을 폭행한 홍수. 경찰서에서 지석은 홍수와 재희의 동거 사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 든다. 이에 홍수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한다. 그는 울먹이며 포효한다. '베프끼리 같이 살 수도 있잖아요. ㅆㅂ 서울 방세가 얼만데!' 간신히 교환된 둘의 주관적 한계는 좌중을 숙연해지게 만든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해라기보다는 차라리 오해에 가깝다. 언어는 진실을 오롯이 품지 못하기 때문에. 경찰서를 나오며 재희와 홍수는 서로를 마주 본다.'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겠어.' 그들의 육성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조차 공감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재희의 결혼식, 축무를 맡게 된 홍수는 무대 위에서 미스에이의 <배드걸 굿걸>을 부른다. 자칫 손발이 오그라들 법한 장면인데도 왠지 모르게 편안하며 감동적이다. 홍수의 당당함 때문에도 재희의 행복함 때문에도 아니었다. 철저히 객관적인 어색함 때문이었다. '게이 친구의 결혼식 축무'라는 다소 서먹한 단어의 조합은 추상적이거나 어렵지 않았다. 명확하며 어딘가 김 빠지게 단순했다. 그러한 단순함은 정직했고 나는 그 정직함을 확인했을 뿐이다. 영화가 보여준 그들의 역사, 그들의 서사를 읽어 왔기에 어느새 그들의 우정을 확인해 주는 타인들 중 하나가 나는 되어 있었다. 재희와 결혼을 결심한 민준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You don't know me, you don't know me. 축가에서 연거푸 반복되는 가사. 나는 아직도 이들을 잘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가 유행가처럼 세상 어디에 하나쯤 '평범하고 따분하게' 존재하고 있겠지 싶은 상상을 해본다.
터널링, 그 고독함
염치없이 필자는 또 한 번 억지를 부려 앞선 정의를 수정한다. 이방인은 '서정성을 확인받기 위해 터널링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터널링(Tunneling)은 일반적으로 가로지를 수 없는 지형이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방법을 말한다. 개인의 서정성과 타인의 객관성 사이에는 가로지를 수 없는 지형이나 경계가 산적해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때때로 극복하고 때때로 실패하며 살아간다.
삭막한 대도시, 사람으로 가득 찬 무인도에서도 누군가는 아직도 사랑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래 그런 사람, 그런 사랑도 살기야 하겠지. 공감은 진실들을 이렇게도 평범하고 따분하게 객관성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로써 강렬한 동조의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처연한 고독감을 인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미래의 모든 오해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홍수와 재희는 정당성을 부여받고 객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매 순간 터널링을 시도해야만 할 것이며, 성공보다 훨씬 많이 실패할 것이다.
고독한 이방인들은 여전히 대도시의 긴 터널 속을 거듭 방황할 것이다.노래도 영화도 더 이상 '사랑법'에만 그치지 않는다. 누구든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가. 성공보다는 실패한 터널링들을 더 많이 세어보면서. 영화는 유색 찬란한 '대도시의 사랑법'이 아니라 평범하고 따분하기까지 한 '대도시에서 사는 법'에 대해 말하는 것만 같다. 사랑에서 시작된 생각은 사는 일을 거쳐 고독에서 멈춘다. 사랑에서 시작한 노래가 작별(Farewell)로 끝나기 때문일까. 제법 쓸쓸한 가을인데도노래는 내게이 밤이 아름답다고만 말한다.
잊혀질까 두려워 곁을 맴도는 시월의 아름다운 이 밤을 기억해 주세요 / Farewell, farewell